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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신석기 문화(韓半島의 新石器時代文化)

한국고고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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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신석기 문화
기본 정보
시대 신석기 시대
지역 한반도 전 지역
관련 정보
유적 나선 서포항 유적, 봉산 지탑리 유적,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서울 암사동 유적, 양양 오산리 유적, 용천 신암리 유적
키워드 신석기 시대, 한반도 남부 지역의 신석기 문화, 한반도 동북 지역의 신석기 문화, 한반도 서북 지역의 신석기 문화, 한반도 중동부 지역의 신석기 문화, 한반도 중서부 지역의 신석기 문화, 신석기 시대 토기 문화,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지역 구분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신석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24
집필자 임상택



설명

신석기 시대는 지역에 따라 다른 기준에 의해 정의될 필요가 있는데, 동북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토기의 등장을 신석기 시대 시작의 지표로 삼아 왔다. 그렇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셴런(仙人) 동굴 유적이나 위찬옌(玉蟾岩) 유적처럼 약 20,000~18,000년 전 플라이스토세 말부터 이미 토기가 등장하고 적어도 15,000년 전 이후에는 동아시아 각지에서 토기가 확인된다. 따라서 토기의 등장만으로 신석기 시대를 정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다만 아직 적절한 대안은 없는 상황이다.

토기 등장을 기준으로 할 때, 한반도에서 신석기 시대는 약 10,000년 전 무렵 시작되었다.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 발견된 고산리식 토기 문화층의 절대 연대가 기원전 7,600년 무렵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를 가진 유적은 제주도에 국한되어 있다. 한반도 내에서는 약 기원전 6,000년 이후에야 동해안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유적 점유가 시작된다. 이런 이유로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의 전이 과정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다만, 고산리식 토기와 함께 출토되는 석기들은 좀돌날 몸돌좀돌날, 밀개긁개, 양면 가공의 창촉과 화살촉 등 한반도 후기 구석기 최말기의 석기를 계승하고 있는 유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후기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문화가 단절적이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1,500년 무렵 청동기 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끝나게 된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강가와 바닷가, 구릉 등 해안과 내륙의 다양한 입지 조건에서 발견된다. 신석기 사회는 기본적으로 수렵·채집·어로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지역과 시간에 따라 생업 경제 활동에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기원전 5,000~4,000년에 한반도 동북 지역이나 남해안에서는 어패류와 바다 포유류 등의 해양 자원이 중요한 식량 자원이었으나, 중서부 지역에서는 어패류 이외에도 상대적으로 식물성 식량 자원이 중요하였다. 중서부 지역에서는 기원전 4,000년대 초에 조와 기장을 중심으로 초기 농경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기원전 3,500년 무렵이 되면 남부 지역 전역으로 확산된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움집에서 생활했다. 기원전 6,000~5,000에 해당하는 집자리로는 양양 오산리 유적, 고성 문암리 유적 등이 있으나 한반도 전역에서 많이 확인되진 않는다.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 토기가 등장하고 퍼져 나간 기원전 4,000년 이후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몇 채에서 몇십 채 정도의 움집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신석기 시대 유적의 수와 규모는 급감하며, 기원전 1,500년 무렵이 되면 거의 사라진다. 이러한 양상은 신석기 사회가 해체되고 청동기 시대로 이행하는 등 모종의 사회 경제적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의 이행 과정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로서 신석기 사회 내부 인구 및 자원의 균형 관계 붕괴, 민무늬 토기 집단의 남하(南下)에 따른 토지 이용 전략의 급격한 변화 등에 대한 탐색적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는 산맥과 수계 등 자연·지리적 환경과 문화 내용에 따라 서북·동북·중서부·중동부·남부 지역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각 지역에 따른 시기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크게는 초창기–전기–중기–후기로 나눌 수 있다. 초창기는 제주도에서 확인되는 고산리식 토기와 화살촉, 창촉을 중심으로 한 수렵 위주의 도구 구성을 특징으로 하는 시기이다. 전기는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해양 자원 이용이 활발해지고 조개더미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토기는 덧무늬, 눌러찍은 무늬[押捺文] 위주이며 전기 말에 중서부 지역에서 뾰족 바닥의 새김 줄무늬[沈線文] 토기가 등장한다.

중기 이후는 새김 줄무늬 토기가 중심이 되는 시기로, 서북 및 동북 지역에서는 시종일관 편평한 바닥 토기 계통이 유지되지만 그 이남에서는 뾰족 바닥 토기가 중심을 이룬다. 중기에는 한반도 전역에 움집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확산되면서 초기 농경이 보급되고 인구도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 후기에는 기본적으로 중기 이후의 양상이 지속되지만 유적의 규모가 평균적으로 감소하고 토기 무늬도 점차 쇠퇴하여 민무늬로 변해 간다.

전형적인 빗살무늬 토기 등장 이전 집자리는 동북 지역의 나선 서포항 유적 1·2기 및 중동부 지역의 양양 오산리 유적과 고성 문암리 유적 그리고 남부 지역 해안가의 여수 돌산 송도 조개더미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3호 집자리 등 소수만이 알려져 있다. 모두 움집 구조로 평면 형태는 장방형, 방형, 원형 등 다양하다. 빗살무늬 토기가 유행하는 신석기 전기 말부터는 본격적 마을 유적이 확산되는데, 대표적인 사례로는 인천 운서동 유적, 서울 암사동 유적, 김포 신안리 유적, 파주 대능리 유적, 인천 중산동 유적 및 중동부 지역의 강릉 초당동 유적, 양양 지경리 유적, 남부 지역의 김천 송죽리 유적, 진주 상촌리 유적·평거동 유적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정주 마을의 등장은 신석기 시대 중기에 식물 자원 이용이 심화되고 조와 기장을 중심으로 한 곡물 재배가 확산되는 생업 경제의 큰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기의 집자리는 평면이 주로 원형이나 방형이지만, 시간이 흐르며 원형이 줄어들고 방형이나 장방형이 늘어난다. 장방형 집자리는 대동강 유역이나 남부 내륙에서는 신석기 시대 중기 단계에 등장한다. 대동강 유역과 충청 내륙 지역에서는 출입구가 달린 대형 장방형 집자리가 후기 단계에 나타나지만, 서해안에서는 후기 단계에도 방형이 우세하다.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강원 영동 지역에서도 늦은 단계까지 방형 집자리가 중심을 이룬다. 집자리 내부의 주요 시설인 화덕 자리는 집자리의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른 단계에는 돌두름식[圍石式]과 구덩식[竪穴式] 화덕 자리가 공존하지만 중기 이후에는 각지에서 구덩식이 우세하다. 마을의 규모는 신석기 시대 전·중기에 평균적으로 10~20동 정도로 최대를 이루며 후기에는 규모가 더 작아져 3~5동 정도가 일반적이다. 전기 중서부 지역의 마을은 집자리가 줄을 지어 배치되는 것이 특징인 데 비해 후기가 되면 3동 내외의 집들이 모여 있는 형태가 나타난다. 마을의 구조가 이처럼 변화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한 해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신석기 시대 초기 농경은 기원전 4,000년 이후 출현한다. 조와 기장을 중심으로 하며 중기 이후에는 콩과 팥이 안정적으로 추가된다. 중기 늦은 시기의 옥천 대천리 유적에서는 보리와 밀이 확인된 바 있지만, 아직 사례가 적어 맥류의 재배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논하기 어렵다. 농경 도구로는 따비형 석기어깨 도끼가 대표적이다. 따비형 석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사용되지만 어깨 도끼는 주로 동북 지역에서 유행하였다. 작물의 종류와 도구로 볼 때 한반도 신석기 시대 초기 농경은 중국 동북 지역, 특히 랴오닝성(遼寧省) 일대의 농경 기술과 정보가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사회를 밭작물 재배 중심의 농업 경제 사회라고 규정할 수는 없고 수렵 채집 집단들이 보조적 수단으로 소규모의 재배를 시행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중기 단계의 이 보고되었으나, 신석기 시대 밭 존재 여부는 층위에 대한 해석 차이로 인해 논란이 있다.

신석기 시대의 무덤은 매우 적은 수가 확인되었다. 남부 지역 조기 덧무늬 토기 단계의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와 중기 단계의 진주 상촌리 유적에서는 독무덤이 알려졌다. 움무덤부산 가덕도 장항 유적·범방 유적, 통영 연대도 유적·욕지도 조개더미·산등 조개더미, 울산 처용리 유적, 고성 문암리 유적 등에서 발견되었으며, 여수 안도 조개더미에서는 두 사람을 움에 함께 묻은 무덤도 발견되었다. 울진 후포리 유적의 경우, 40인 이상이 겹겹이 집단으로 매장된 특수한 사례로, 화장펴묻기가 행해졌다. 시신을 바로 펴서 묻는 펴묻기 외에 시신의 다리를 구부린 굽혀묻기가 확인되기도 한다. 부산 가덕도 장항 유적, 여수 안도 조개더미, 통영 산등 조개더미에서는 조개 팔찌를 찬 인골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무덤의 껴묻거리는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동해안에서는 토기는 거의 껴묻지 않고 옥으로 만든 터진 고리 모양 귀걸이나 돌로 만든 돌도끼 등의 제품을 주로 껴묻었다. 울진 후포리 유적에서는 초대형의 간 돌도끼로 인골을 덮은 특이한 방식도 확인된 바 있다. 이와 달리 남해안 지역에서는 토기가 껴묻거리의 중심을 이루며 토기를 깨뜨려 시신을 덮는 장법도 나타난다. 부산 가덕도 장항 유적, 통영 연대도 유적, 울산 처용리 유적 등에서는 공동묘지가 확인되었는데, 토기·석기·옥기·장신구 등의 껴묻거리에서 피장자 간의 차이는 확인되지만, 이것이 개인 간의 상하 관계보다는 생전의 역할 차이를 드러낸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주변 지역 집단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교환이나 교역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 근거로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나 여수 안도 조개더미 등 남부 지역 해안가의 여러 유적에서 보이는 일본 규슈(九州)산 흑요석이나 일본 조몬(繩文) 토기를 들 수 있다. 초창기부터 확인되는 이러한 교류 양상은 수천 년에 걸쳐 지속되어 왔다. 흥미로운 것은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에서 무려 1,500점 이상의 조개 팔찌가 확인된 점인데, 자체 소비를 초과하는 이러한 수량은 주변과의 교환을 위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 규슈 지역에서 이러한 조개 팔찌가 확인될 뿐 아니라, 한반도 내륙의 단양 상시 3 바위 그늘 유적·금굴 유적, 청도 오진리 바위 그늘 유적 등에서 바닷조개로 만든 조개 팔찌가 확인되고 있다. 대동강 유역에서는 후기 단계에 중국 랴오닝성 일대의 토기가 확인되기도 하고, 중동부 지역에서는 전기에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토기가 확인되기도 한다.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 확인된 통나무배 또한 바다를 건넌 교류의 흔적을 보여 주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이다.

이상과 같이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는 약 6,000여 년간 지속되었고 그 기간에 토기의 등장과 간석기 사용의 일반화, 해양 자원의 이용, 초기 농경의 전국적 실시 등 신석기적 요소들이 시차를 두며 완성되어 갔다. 기본적으로 수렵·채집·어로를 중심으로 하고, 위계가 현저하게 발달하지 않은 사회가 지속되었다.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중국 동북 지역, 러시아 연해주 일대, 일본 규슈 지역 등 주변과 교류하면서 동아시아 차원의 사회 변화 흐름을 함께하는 가운데 뾰족 바닥 토기와 같이 동아시아 내에서도 독특한 문화를 영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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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