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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支石墓]

한국고고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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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기본 정보
동의어 지석묘
시대 청동기 시대
지역 한반도
관련 정보
유적 은율 관산리 고인돌, 제천 황석리 고인돌, 달성 평촌리 고인돌, 진주 남강 고인돌
키워드 거석 문화, 거석 기념물, 덮개돌, 판돌, 탁자식 고인돌, 바둑판식 고인돌, 덮개식 고인돌, 돌 두름식 고인돌, 간 돌검, 간 돌살촉, 비파형동검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19
집필자 이영문



설명

지상에 드러난 거대한 덮개돌과 그 밑의 받침돌(支石), 지표면의 묘역 시설(墓域施設), 지하의 무덤방(墓室) 등 하부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청동기 시대의 무덤과 기념물로 축조된 유적. 고인돌은 선돌과 함께 거석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고인돌의 명칭은 거대한 덮개돌(上石) 밑을 판돌이나 자연석이 고이고 있는 모습에서 붙여진 것이다. 즉 고여 있는 돌이란 의미이며, 고인(支·撑)과 돌(石)의 합성어이다. 한자로 지석묘라 하며, 북한에서는 고인돌 무덤이라 한다. 선조들은 고인돌 무리를 이룬 곳을 독배기, 바우배기라 불렀으며, 고인 모습에서 괸돌·괸바우·괸돌바위로, 덮개돌의 형상에 따라 배바우나 거북바우 등으로, 넓적한 덮개돌을 마당바위, 덕석바위 등으로 불렀다. 옛날 힘센 장수나 마고할머니가 돌을 옮기다가 말았다는 전설 등 민간 신앙이나 풍수지리에 따라 여러 이야 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고인돌과 관련된 지명이나 마을 이름도 많다. 돌고개(석현(石峴)), 바위고개(암치(岩峙)), 거북 바위(귀암(龜岩)), 배바위(주암(舟岩)), 칠성바위(칠암(七岩))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서는 지석묘, 중국에서는 스펑(石棚(탁자식))대석개묘(大石蓋墓(개석식)) 혹은 대개석묘(大蓋石墓)로 구분해 부른다. 유럽에서는 거석 기념물 또는 돌멘(Dolmen)이라 한다. 돌멘은 탁자란 뜻인 ‘Dol’과 돌이 란 의미인 ‘Men’의 합성어로 탁자 모양의 돌이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입지는 평지나 구릉, 산기슭 등지에서 수기에서 수십 기가 줄지어 무리를 이룬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규모가 크고 형태적으로 정제된 덮개돌을 가진 고인돌은 평지나 구릉에서 1기만 단독으로 있는 사례도 많다. 고인돌의 분포는 덮개돌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지형 조건을 갖춘 지역을 중심으로 밀집해서 분포하는 양상이다. 고인돌은 유라시아 대륙을 둘러 싼 바다에 인접된 곳에 밀집되어 있다. 특히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지역은 세계적으로 고인돌이 밀집 분포한 곳이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약 4만 기가 분포한 것으로 추산되고, 전북 고창을 포함한 전남 전 지역에 2만 이상이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에 비해 주변 지역인 일본 규슈 지방이 6백여 기, 중국 동북 지방이 750여 기로 알려져 우리나라가 고인돌 중심 분포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의 형식은 덮개돌과 하부 구조의 유무와 형태에 따라 형식을 구분하고 있다. 외형적으로 탁자식, 바둑판식, 덮개식, 돌 두름식 고인돌이 있다. 탁자식 고인돌(卓子式支石墓)은 편평한 덮개돌 밑에 판돌 4매로 짜 맞춘 무덤방이 지상에 드러나 마치 책상처럼 생긴 모양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로 북쪽에 집중 분포하여 북방식, 북한에서는 오덕형, 중국에서는 스펑(石棚)이라 한다. 대형 탁자식 고인돌은 벽석 3매가 덮개돌을 직접 받치고 있으며, 한쪽 짧은 벽은 개폐가 용이한 구조이다. 남한의 탁자식 고인돌은 짧은 벽이 훼손되어 긴 벽석 2매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바둑판식 고인돌(碁盤式支石墓)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받침돌을 배치하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은 형태로, 마치 바둑판 모양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 기반식(碁盤式), 지석식(支石式), 남쪽에 밀집되어 남방식이라고도 한다. 바둑판식 고인돌은 주로 중부 이남 지역에 분포하며, 호남 지역에 집중 분포한다. 단독 입지한 대형 바둑판식 고인돌은 웅장한 덮개돌 밑에 무덤방이 없이 받침돌 4개만 고인 것이 특징이다. 덮개식 고인돌(蓋石式支石墓)은 지하에 있는 무덤방을 덮고 있는 형태로, 가장 보편적인 형태이다. 한자로는 개석식이며 받침돌이 없어 무지석식(無支石式), 북한에서 침촌형·묵방형으로, 중국에서 대석개묘(大石蓋墓)로 불린다. 이 형식은 수기에서 수십 기가 줄지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북쪽의 개석식 고인돌은 두께가 얇고 규모가 작으며, 남쪽으로 올수록 두꺼워지고 규모도 커진다. 대부분의 껴묻거리는 이 형식의 고인돌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돌 두름식 고인돌(圍石式支石墓)은 덮개돌 밑에 10여매 의 잘 다듬어진 판상석으로 빈틈없이 돌려놓은 형태로, 한자로는 위석식이다. 이 형식은 제주 지역 고인돌의 특징으로 알려져 제주식, 돌 돌림식이라고도 한다. 돌무덤방의 평면 형태는 덮개돌의 형태에 따라 방형과 타원형으로 달라진다.

북한의 고인돌 형식은 외형적인 형태와 묘역 시설, 무덤방 구조 등에서 오덕형(五德形), 침촌형, 묵방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오덕형 고인돌(五德形支石墓)은 탁자식 고인돌 형태이다. 황해 은율 관산리 고인돌처럼 대형 고인돌은 단독으로 평지나 구릉상에 입지해 있다. 침촌형 고인돌(沈村型支石墓)은 하나의 묘역 시설 안에 5~6기의 돌무덤방이 있는 소위 집합식 고인돌이다. 판돌을 조립해 무덤방을 축조한 덮개식 고인돌이다. 묵방형 고인돌(墨房型支石墓)은 하나의 묘역에 1기의 무덤방이 있는 것으로 깬돌이나 판돌 편, 강돌(川石) 등으로 쌓아 지하에 무덤방을 축조한 덮개식 고인돌이다. 돌무덤방 짧은 벽 한쪽에 판돌로 막음 시설을 한 것이 특이하다.

고인돌의 구조는 지상의 덮개돌, 지표에 드러난 받침돌, 지표면의 묘역 시설, 지하에 돌 무덤방(石室)이 있다. 탁자식 고인돌은 덮개돌과 무덤방을 겸한 받침돌만 있는 단순한 구조이고, 대형 바둑판식 고인돌도 무덤방 이 없이 덮개돌과 받침돌만 있는 구조이다. 덮개식 고인돌은 덮개돌과 무덤방 사이에 받침돌이 없는 구조이다. 덮개돌(上石)은 고인돌의 가장 큰 특징이며, 한자로 윗돌 의미의 상석(上石)이라 한다. 평면 형태는 대체로 장방형이나 타원형으로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덮개돌 길이가 2-3m 내외지만 대형의 탁자식 고인돌은 길이가 4m 이상의 편평한 덮개돌이며, 대형의 바둑판식 고인돌은 높이(두께)가 2m 이상으로 매우 웅장한 덮개돌이다. 받침돌(支石)은 덮개돌이 웅장하게 위용을 드러나게 하거 나 덮개돌의 무게로부터 무덤방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한글로 괸돌, 굄돌, 고임돌 등 다양하며 한자로 지석, 탱석(撑石), 족석(足石)으로 쓰였다. 받침돌 형태는 판돌, 둥근 자연석, 각진 인공석(기둥 형태) 등이 있으며, 받침돌 형태에 따라 탁자식과 바둑판식 고인돌로 구분된다. 묘역 시설은 고인돌 주위를 구획한 시설이며, 무덤의 영역을 표시한 것이다. 묘역 시설은 고인돌 주위를 정지한 것에서부터 정교하게 조성된 거대한 규모까지 매우 다양하며, 그 형태는 장방형, 타원형, 원형 등이 있다.

묘역 시설의 종류는 깬돌을 무질서하게 쌓은 돌무지형(積石形)과 납작한 돌을 깐 포석형(鋪石形), 부석형(敷石形) 판돌을 중첩해 쌓은 석축형(石築形), 도랑으로 돌린 둘레 도랑형(周溝形) 이외에 연접 묘역(連接墓域) 등 특이한 유형도 있다. 묘역 시설은 특히 남해안지역 고인돌에서 거대한 묘역 시설과 함께 정교한 묘역까지 다양한 묘역이 매우 성행한다.

무덤방은 피장자의 주검이 안치된 공간으로 가장 중요한 시설이며, 형태는 장방형이다. 무덤방 위치는 지상에 드러난 탁자식과 지하인 바둑판식과 덮개식 고인돌로 구분된다. 무덤방 형태는 사용된 석재에 따라 구분한다. 즉 판돌을 세워 조립한 돌널형(石棺形), 깬돌 등으로 쌓은 돌덧널형(石槨形), 빈틈없이 고여진 돌 두름형(圍石形), 나무널을 안치한 구덩형(土壙形) 등이 있다. 한 고인돌에 하나의 무덤방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드물지만 쌍무덤방이나 칸막이한 무덤방도 있다.

고인돌 껴묻거리는 껴묻거리 유물과 의례 유물이 있다 껴묻거리 유물들은 무덤방 안에서 발견되는 무기류·부장 토기류·장신구류 등이 있으며, 주로 완형으로 출토된다. 부장 유물간 돌검(石劍)간 돌살촉(石鏃), 비파형동검 등 무기류가 대표적이며, 1점씩만 부장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간 돌검은 우리나라 고인돌의 대표적인 부장 유물이다. 가장 많은 공반 유물은 간 돌검과 간 돌살촉이다. 비파형동검은 전 지역에서 출토되나 여수 반도를 중심으로 남해안 지역 고인돌에서 집중되어 있다. 이외 청동기로는 청동 투겁창(銅鉾), 청동 살촉, 세형동검 등도 드물게나마 출토된다. 부장 토기는 단지형으로, 붉은 간 토기(紅陶)가지무늬 토기(彩文土器)가 있으며, 장신구는 곱은옥(曲玉, 飾玉)대롱옥(管玉)이 대표적이다. 이외 돌칼(石刀), 가락바퀴, 그물추 등 구멍 뚫린 유물도 장신구로 무덤방에서 껴묻거리 된 채 발견되기도 한다. 의례용 유물은 고인돌 축조 과정에서 의식에 사용 된 유물이며, 일부를 인위적으로 깨뜨린 파손품이거나 의도적으로 파손한 생활용 유물들이다. 무기류인 간 돌검 편과 간 돌살촉, 돌칼(石刀)과 돌낫(石鎌), 돌도끼(石斧), 돌 자귀(有溝石斧), 돌끌(石鑿), 돌대팻날, 그 밖에 그물추, 가락 바퀴, 숫돌(砥石), 갈판과 갈돌(碾石) 등 다양한 실생활에 사용되는 석기 편들이다. 껴묻거리 풍습은 검과 토기가 1점씩 부장되고, 촉과 옥은 다수가 부장되는 양상이다. 부장 유물 상호 간에 조합되어 세트로 부장되기도 하고, 부장 유물에 따라 껴묻거리 위치는 일정한 경향성을 보인다.

고인돌에서 발견되는 사람 뼈는 하천이나 강변의 퇴적 평지에서 입지한 제천 황석리달성 평촌리, 진주 남강댐 지역 고인돌돌널무덤이 대표적이며,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발견된 바 있다. 사람 뼈는 하나의 무덤방에 한 사람만 묻은 것이 일반적이나 한쪽 면의 개폐(開閉)가 용이한 탁자식에서는 여러 사람의 뼈가 발견되기도 한다. 주검의 매장 방법은 바로 펴묻기(伸展葬)굽혀묻기(屈葬)가 대부분이고 화장(火葬)도 많다. 성인의 사람 뼈 자료를 보면 무덤방 크기에서 160cm 이상은 바로 펴묻기가, 150cm 내외는 굽혀묻기가 가능한 규모이다. 성별은 남자가 월등히 많으나 여자도 확인되며, 나이는 30세 전후가 가장 많으나 60세 이상도 있고 10세 미만의 어린아이도 있어 당시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다. 키는 170cm 이상도 있지만 주로 150cm 내외가 많다. 특이한 사례로 진주 남강댐 지역 돌널무덤에서는 어린 아이 뼈와 목이 없는 사람뼈, 복상 발치(服喪拔齒) 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중국 동북 지역과 북한의 탁자식 고인돌 안에서 사람 뼈가 다수 발견되기도 하고, 특정 부위의 뼈만 추려 안치한 간골 풍습 등 매우 다양한 장법들이 사용되고 있다.

고인돌의 기능은 무덤설(무덤 고인돌)과 제단설(기념 고인돌)이 있다. 무덤설은 무리지어 있는 장방형 돌 무덤방이 널 형태이고, 사람 뼈와 껴묻거리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기능이다. 제단설은 초창기에 평지에 있는 탁자식 고인돌을 농경 의례와 관련된 제단 시설로 본 것에서 주장한 것이다. 제단설과 관련 된 고인돌은 기념 고인돌이다. 기념 고인돌은 무덤 고인돌에 비해 웅장한 규모에 정제된 형태를 갖추고 있고, 평지나 높은 지형에서 단독 입지를 한 고인돌이다. 기념 고인돌에는 제단 고인돌과 묘표석 고인돌이 있다. 제단 고인돌은 단독으로 입지한 고인돌로 주변의 집단들의 공공의 기념물이며, 묘표석 고인돌은 무덤 고인돌에서 일정한 거리를 둔 고인돌로 혈연 집단의 기념물 성격을 가진 것이다. 이외 고인돌이 농경 사회의 기념물로 축조 되었다는 설, 교통로의 표지석, 취락의 경계, 가매장시설 등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고인돌을 축조할 때 가장 어렵고 중요한 작업이 덮개돌의 채석과 운반이다. 덮개돌 측면에 남아 있는 채석공(採石孔)으로 보아 암벽에서 분리하는 방법은 바위틈이나 암석의 결을 이용하여 구멍을 파고 나무 쐐기를 박아서 물로 불리어 떼어냈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거석 운반 방법은 지렛대식, 목도식, 끌기식(牽引式)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거대한 고인돌의 운반 도구와 방법은 이집트의 석상을 운반하는 부조상이나 1607년에 제작된 일본 준부성 축성도, 1796년 화성 성역 의궤의 구판(駒板), 인도네시아 숨바섬의 고인돌 축조 사례 등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 사례를 통해 거석을 운반하는 도구는 모두 ‘Y’자 모양의 나무 끌개(修羅, 나무 끌판)가 사용되며, 앞에서 4개의 밧줄로 끌고 뒤에서 지렛대가 사용되었다. 덮개돌을 옮기는데 동원된 사람은 실험 고고학에 의하면 1톤의 돌을 1마일(1.6㎞) 옮기는데 16~20명이 필요하며, 32톤의 큰 돌을 둥근 통나무와 밧줄로 옮기 는데 200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운반되어 온 덮개돌을 올리는 방법은 받침돌이 낮은 바둑판식이나 덮개식 고인돌의 경우 흙을 경사지게 돋우고 끌어 올린 후 흙을 제거하였다고 추정된다. 무덤방과 받침돌이 한 쪽으로 밀려난 흔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탁자식이나 받침돌이 높은 바둑판식 고인돌의 경우 인도네시아 숨바섬 사례처럼 통나무를 정井자 모양으로 쌓은 후에 무덤방 위로 끌어 옮기는 방법이다. 고인돌의 덮개돌과 받침돌 사이에 균형을 잡기 위한 쐐기돌, 받침돌 크기를 조정해 수평을 유지한 사례, 지상 무덤방 위에 정확하게 올려진 것에서 추론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축조 연대는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축조설 등이 있다. 신석기 시대 설은 세계 거석 문화가 신석기 시대부터 축조되었다는 설에서 씨족의 공동 무덤의 성격을 띠고, 고인돌 주변에서 뗀석기, 빗살무늬 토기 편 등이 출토된 점을 근거로 한다. 하지만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껴묻거리는 청동기 시대에 속한 유물들이다. 고인돌의 축조 시기는 집자리의 연대 등 상대 연대방사성 탄소 연대절대 연대 측정 자료 등을 통해 밝힐 수 있다. 청동기 시대 집자리와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홈 자루 간 돌검(二段柄式石劍)이나 삼각 오목 돌살촉(三角灣入石鏃)과 턱 슴베 돌살촉(二段莖式石鏃) 등은 이른 시기의 표지적인 유물이다. 또한 겹아가리에 구멍이나 골아가리 무늬, 빗금무늬가 있는 토기도 이 시기의 대표적인 토기이다. 이런 유물들이 집자리와 고인돌에서 공반 출토되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부터 축조되었음은 확실하다.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통자루식(一段柄式)과 슴베식(有莖式) 간 돌검이나 슴베식 간 돌살촉 등이 청동기 시대 늦은 시기에 성행한 유물들이며, 고인돌에서 의례용 유물로 출토되는 삼각 돌칼이나 홈자귀 등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석기 유물이다. 고인돌 껴묻거리 출토 빈도로 보아 청동기 시대 송국리 문화 단계에 와서 고인돌이 가장 활발하게 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동기 시대 늦은 시기를 대표하는 둥근 덧띠 토기검은 간 긴 목 항아리 등도 드물게나마 껴묻거리나 매납 유물로 출토되어 고인돌이 늦은 시기까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에서 측정된 방사성 탄소 연대 자료는 청동기 시대의 연대와 같이 3000~2200 BP의 측정치가 절대 다수(90% 정도)이다.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로 측정된 연대는 3000~2800 BP로 집자리에서 측정된 것과 같은 양상이며, 보정 연대는 기원전 1200~900년이다. 청동기 시대 늦은 시기인 2700~2300 BP가 60% 이상으로 가장 밀집된 분포 곡선을 이루며, 보정 연대는 기원전 800년 전후~400년이다. 청동기 시대 유물의 상대 편년과 절대 연대를 비교해 보면 고인돌은 이른 시기에 축조되기 시작해서 늦은 시기에 가장 성행하였다가 덧띠 토기 단계에 쇠퇴한다. 고인돌 축조 시기는 기원전 1200년대부터 기원전 200년 전후한 약 1000년간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인돌의 기원은 동남아시아에서 해로를 통해 전파되었다는 남방설, 북방의 돌널무덤에서 파생되었다는 북방설, 한반도에서 발생하였다는 자생설 등이 있다. 남방설은 동남아시아로부터 해로를 통해 도작 문화(稻作文化)와 함께 중국 동북 지방과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다는 설이다. 이는 고인돌의 분포가 평안·황해도·전라도 등 서해안을 따라 집중 분포하고, 남방 문화의 요소인 난생 설화(卵生設話)의 분포 지역과 고인돌 분포 지역이 일치한다는 점과 세골장 풍습이나 벼농사를 배경으로 한 농경문화와 함께 동남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북방설은 크게 보면 자생설에 포함시킬 수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가 랴오닝(遼寧) 지방의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관점에서 돌널무덤에서 변화·발전하였다는 설이다. 자생설은 우리나라에 고인돌이 가장 밀집 분포하고 형식도 다양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나라에서 고인돌이 독자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세계적인 밀집 분포권을 형성한 것은 오랜 기간 동안 정착 성행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 문화는 북쪽과 남쪽 지역 간 탁자식과 바둑판식이라는 독특한 형식이 존재하고, 주변 지역보다는 축조 시기가 빠르거나 같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고인돌 사회에 대한 추론은 씨족 사회설, 부계제 사회설, 부족 사회설, 족장 사회설, 공동체 사회설 등의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왔다. 씨족 사회나 부계제 사회설은 혈연을 중심으로 한 집단들의 가족 공동 무덤으로 고인돌이 축조되었다는 설로, 1960년대 이전과 북한 지방에서 보는 설이다. 부족 사회설은 고인돌이 평등한 공동체 사회로 연장자나 능력 있는 지도자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족장 사회설은 선사 시대 사회 발전 과정에서 전문인이 출현하여 지역 간의 문화 전파 및 교역을 촉진하였으며, 토착 농경을 바탕으로 하여 계급이 발생한 사회였다는 견해이다. 공동체 사회설은 고인돌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개의 군집으로 분포하고 무덤방이 줄지어 배치되어 각 집단 간의 상호 협동 체계에 의해 혈연적이거나 지연적으로 뭉쳐진 공동체 사회라는 것이다. 고인돌 사회에서 집단 간의 통합과 흡수 과정으로 마한 소국이 각지에서 형성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런 사회에서 인접 집단과의 전투 과정에서 전사자의 공헌 무덤으로 고인돌을 축조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고인돌의 차별적 입지와 형태, 군집과 배치 양상, 구조나 규모, 거대한 묘역 시설, 껴묻거리의 조합상 등에서 혈연 집단의 형성과 농경 사회, 위계화된 계층 사회, 집단 간 지역권과 영역권이 형성된 사회, 전문 집단과 교역이 활발한 사회인가 등의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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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