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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정보
| 한글표제어=한반도 중서부 지역의 신석기 문화(韓半島中西部地域의 新石器文化)
| 시대=신석기 시대
| 관련 지역=한반도 중서부 지역
| 관련 유적=평양 금탄리 유적
| 키워드=[[한반도의 신석기 문화]], [[궁산 문화]],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지역 구분]], [[한반도 중서부 지역의 신석기 마을]], [[한반도 중서부 지역의 신석기 토기]]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신석기 시대 편)
| 집필연도=2024
| 집필자=임상택
}}


==설명==
==설명==

2026년 1월 20일 (화) 12:33 판


설명

한반도 신석기 시대의 중서부 지역은 대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뾰족 바닥 빗살무늬 토기가 처음 등장하여 유행한 곳이다. 남한에서는 일제 강점기부터 서울 암사동 유적의 자료가 알려져 있었으나, 편년 구축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주로 1970~1980년대 초반의 연구를 바탕으로 크게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하는 편년안을 설정하였다. 토기 전체에 무늬를 시문하지만 아가리와 몸통, 바닥의 무늬가 각각 다른 구분계 토기 문화가 전기에 속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늬가 바닥부터 점차 소멸한다. 최근에는 마을 유적에 대한 조사가 급증하면서, 해안 지역과 내륙 지역에 맞추어 편년안을 세분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1950년 평안남도 온천 궁산 유적을 처음 발굴한 이후 이 지역 문화를 ‘궁산 문화’로 명명하였다. 1957년 황해도 봉산 지탑리 유적을 발굴하며 궁산 문화를 전기(1기)와 후기(2기)로 나누었다. 이후 평양 금탄리 유적 발굴 보고서에서 금탄리를 1·2문화층으로 나누고, 기존의 ‘궁산 문화’에 이어지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궁산 문화는 실질적으로 4기의 편년 틀을 갖춘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금탄리 1·2문화층을 ‘궁산 문화’에 포함하면서 궁산 문화는 공식적으로 4기 편년 체제로 정립된다. 그 이후 평양 남경 유적 발굴(1979∼1981년)에서 남경 1기와 2기를 설정하면서 궁산 4기는 2단계로 세분되었고, 지금은 5기의 편년 체제로 이해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고고 문화의 설정을 체계화하면서 청천강 이남과 남한 전역을 포괄하는 뾰족 바닥 토기 문화를 ‘운하 문화’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설정하였고, 궁산 문화는 그 하위의 지방 유형으로 보고 있다.

궁산 1기 토기는 뾰족 바닥으로 포탄과 같은 형태를 띠며, 구분계 무늬가 배치된다. 구분계 시문 방식은 궁산 1기에 출현하여 2기까지 유행하며 중서부 이남 각지로 확산된다. 아가리에는 눌러찍은 점열무늬[押捺點列文], 짧은 빗금무늬, 손톱무늬가 새겨지며, 몸통에는 새기기[沈線] 기법의 세로 생선뼈무늬가 주로 시문된다. 바닥에는 새기기 기법의 빗금무늬[斜線文]나 가로 생선뼈무늬, 방사상무늬 등이 시문된다. 바탕흙[胎土]에 활석을 섞은 토기가 많다. 봉산 지탑리 유적 1지구 1호 집자리가 대표적인 유적이다.

궁산 2기 토기는 1기와 형태는 동일하지만 무늬가 달라진다. 기존에 유행하던 점열무늬와 세로 생선뼈무늬에 더해 곡선적인 점열타래무늬나 반겹고리무늬가 유행한다. 아가리와 몸통 사이에는 부가무늬가 시문된다. 몸통에는 가로 생선뼈무늬가 점차 많이 사용된다. 봉산 지탑리 유적 2지구 2·3호 집자리, 봉산 마산리 유적, 연천 삼거리 유적, 서울 암사동 유적에서 주로 출토된다.

궁산 3기 토기에서는 구분계 시문이 사라진다. 가로 방향의 여러 줄무늬와 삼각 집선무늬 등이 교대로 시문되는 금탄리 Ⅰ식 토기가 등장하여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유행한다. 점차 둥근 바닥이 많아지고 몸통이 부풀며, 바탕흙에 활석이 섞인 토기가 많아진다. 평양 금탄리 유적 1문화층, 증산 용덕리 유적, 덕천 남양리 유적, 영변 세죽리 유적 7호 집자리 등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한강 유역에서는 여전히 구분계 토기가 중심을 이룬다. 특히 몸통에 가로 생선뼈무늬를 찰과상(擦過狀)처럼 시문하는 것이 유행한다. 이 무늬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서해안까지 분포하는 지역성이 강한 무늬이며 서울 암사동 유적이나 하남 미사리 유적, 시흥 능곡 유적 등에서 다량 확인된다. 궁산 3기 단계부터 대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토기 문화가 분화되는 양상이 뚜렷하다.

궁산 4~5기는 이 지역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데 토기 전체에 가로 생선뼈무늬를 가득 시문하는 금탄리 Ⅱ식 토기가 유행한다. 중소형 토기를 중심으로 민무늬화가 현저히 진행되며, 아가리가 벌어지고 몸통이 부풀어 오르는 등 형태도 크게 변화한다. 중부 서해안 일대에서는 몸통 윗부분까지만 무늬를 새기는 토기가 유행한다. 평양 남경 유적 발굴을 계기로 궁산 4기는 궁산 3기의 특징이 잔존하는 4기와 동일계 가로 생선뼈무늬가 유행하고 민무늬가 현저히 진행되는 5기로 세분되었다. 주요한 유적으로는 평양 금탄리 유적, 남경 유적, 장촌 유적, 표대 유적 등이 있다. 활석이 섞인 토기는 거의 사라지고 모래를 섞어 빚은 토기가 증가한다. 한반도 전체 편년에 비추어 궁산 1·2기는 전기, 궁산 3기는 중기, 궁산 4·5기는 후기로 볼 수 있다. 중서부 지역에는 전기 후반이 되어서야 뾰족 바닥 토기가 등장하며, 그 이전 단계의 토기 문화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중서부 지역 신석기 시대의 생업 양상은 도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시종일관 수렵채집, 어로가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 암사동 유적이나 하남 미사리 유적 등의 도토리나 유적마다 발견되는 그물추, 다량의 굴지구 등은 당시 생업이 수렵과 채집 기반이었음을 방증한다. 특히 궁산 4기에 해당하는 평양 남경 유적이나 금탄리 유적에서는 그물추가 매우 많이 출토되고 있어 강변에서 어로 활동이 활발했음을 입증한다. 중서부 지역은 한반도에서 초기 농경이 가장 먼저 등장한 지역이기도 하다. 궁산 2기의 봉산 지탑리 유적 2지구에서 출토된 다량의 따비형 석기돌낫, 조, 피로 보고된 탄화 곡물이 바로 그 증거이다. 탄화된 조는 봉산 마산리 유적에서도 출토되었고 궁산 4기의 평양 남경 유적에서도 출토되어 조가 주요한 재배 곡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궁산 1기에는 뿌리나래 화살촉과 그물추, 횡단면이 방형인 돌도끼, 말안장 형태의 갈판과 막대 모양[棒狀] 갈돌 세트 등이 주요 도구 조성을 이룬다. 궁산 2기에는 기존 도구 조성에 큰 변화 없이 새로운 굴지구인 따비형 석기와 돌낫이 완성된 형태로 탄화 곡물과 함께 갑자기 등장한다. 중서부 지역 초기 농경이 자체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수용된 것임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수렵과 채집 중심이던 생업 방식이 일변한 것이 아니라 초기 농경이 보조적 수단으로 기존 생업에 추가되었음을 알려준다.

남한에서는 서울 암사동 유적과 인천 운서동 Ⅰ 유적 등에서 따비형 석기가 다량으로 확인되었다. 운서동 Ⅰ 유적은 절대 연대가 기원전 4,000년기 전반으로, 중서부 지역이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초기 농경이 수용된 지역임을 입증한다. 주변 지역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중국 랴오닝(遼寧) 지역으로부터 농경이 수용되었다고 추정된다. 초기 농경은 중서부 지역에 도입된 이후 기원전 4,000년 후반에 남쪽으로 광범위하게 확산한다. 이 시기에 중국 동북 지역의 내륙과 멀리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도 초기 농경이 시행되었다.

궁산 3기 이후가 되면 대동강 유역에서는 따비형 석기가 급감하고 단면 방형 돌도끼도 사라지는 등 변화가 일어난다. 반면 한강 이남에서는 소형화된 따비형 석기가 여전히 주요 기종으로 자리 잡고 있고 돌낫 대신 뗀석기 기술로 제작된 반달돌칼 모양 석기가 추가된다. 즉, 궁산 2기에 도입된 초기 농경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진폭을 보이지만 후기까지 지속된 듯하다. 다만 중서부 지역에서는 마지막 단계의 마을 유적이 확인되지 않아, 최후 단계의 양상은 아직 불명확하다.

중서부 지역은 한반도 전체에서 집자리가 가장 많이 조사된 지역으로, 전 시기에 걸친 변화상이 비교적 소상히 알려져 있다. 궁산1·2기는 평면이 원형이나 방형이며, 내부 중앙에 화덕을 두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화덕은 강돌이나 깬 돌을 돌린 돌두름식[圍石式]이 유행하나, 궁산 2기 단계에 이르면 서해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구덩식[竪穴式]이 등장하여 이후 지속된다. 기둥은 4주식(4柱式)이 일반적이다.

궁산 3기 이후가 되면 대동강 유역에서는 평면 장방형 집자리가 출현하기 시작하여, 궁산 4기 단계에는 복도식 출입구가 달린 장방형 집자리가 일반화된다. 화덕 자리 역시 궁산 3기 이후에는 방형에 점토 둑을 두른 형식으로 변화한다. 반면 한강 이남에서는 4주식 기둥을 배치하고 구덩식 화덕을 둔 방형 집자리가 지속되며,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돌출식 출입구가 달린 대형 장방형 집자리(대천리식 집자리)가 출현한다. 서해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후기 단계에 다시 돌두름식 화덕이 일부 출현한다. 대천리식 집자리는 평면 형태와 방형의 점토둑식 화덕 자리 등에서 궁산 4기의 대동강 유역 집자리와 관련성을 보인다.

중서부 지역 마을은 궁산 2·3기에 집자리가 20기 이상인 대규모 마을이 유지되다가 점차 마을 규모가 작아진다. 특히 후기 단계에는 서해 중부와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집자리가 5기 내외인 소규모 마을이 구릉에서 많이 확인된다. 이 시기에 서해안을 따라 조개더미가 다수 형성된다. 전기에는 대체로 구릉이나 능선, 자연제방 상에 열을 이루어 마을 내 주거가 배치된다. 다수의 집자리가 확인되는 마을에서도 서로 간에 중복되는 일이 거의 없다. 인천 운서동 유적, 파주 대능리 유적, 김포 신안리 유적 등에서 전형적 사례가 남아 있다.

후기가 되면, 열을 이루는 주거 배치는 사라지고 집자리 2~3동이 모여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이 단위가 서로 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몇 개씩 배치되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인천 중산동 유적이 대표적이다. 마을 내에서 집자리 이외에는 야외 화덕 자리나 구덩이 등이 약간 확인될 뿐 무덤이나 여타 시설들은 확인되지 않는다.

중서부 지역은 뾰족 바닥 빗살무늬 토기로 대표되는 독특한 토기 문화가 시종일관 유지되는 곳이자 남한에서 초기 농경이 처음 도입된 지역이다. 또한 중서부 지역의 토기 문화와 생업 형태는 이후 중동부 지역이나 남부 지역으로 확산하여 한반도 남부를 대표하는 신석기 문화로 자리 잡는다는 점에서 중서부 지역은 한반도 신석기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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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