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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 시대(弥生時代)

한국고고학사전
(야요이 문화에서 넘어옴)


야요이 시대
기본 정보
동의어 미생 시대
시대 청동기 시대
지역 북부 규슈
관련 정보
유적 무코가오카 조개더미, 이타즈케 유적, 사이토야마 유적, 마가리타 유적, 나바타케 유적, 이마가와 유적
키워드 벼농사, 수도작, 야요이식 토기, 돋을띠무늬 토기, 청동 거울, 철기, 비파형동검 재가공품, 송국리 문화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19
집필자 이창희



설명

야요이 시대는 일본 열도의 시대 구분 중 하나로 조기·전기·중기·후기로 구분한다. 기존에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지속된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최근의 AMS를 이용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에 따르면 기원전 10세기부터 야요이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확인된다. 시기적으로는 수렵·채집 경제의 조몬 시대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표지로 하는 고훈 시대의 사이에 위치한다. 벼농사(수도작)를 주된 생산 경제로 하는 시대로 벼농사의 개시 시점부터 야요이 시대라고 한다.

야요이 시대 조기에 북부 규슈에서는 돼지의 사육도 이루어지고, 전기에는 도카이 지역, 중기에는 간토 지역까지 확산된다. 도작과 가축은 중국 대륙이나 한반도로부터 도래한 문화로, 도작과 가축의 출현은 조몬 시대의 수렵·채집 생활의 쇠퇴를 의미한다. 중기가 되면 중국의 연나라나 한반도로부터 들어온 주조(鑄造) 철기의 파편을 재가공한 철기가 등장한다. 청동기도 중기부터 한반도 남부에서 무기류나 거울이 전해지며, 곧 일본 내에서 자체 제작된다. 북부 규슈에서는 한반도나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얻게 된 귀중품을 무덤에 부장한 유력 개인묘가 출현한다. 후기에는 철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석기의 사용은 쇠퇴한다. 이렇듯 야요이 시대는 한반도와의 본격적인 인적·문화적 교류가 시작되고, 일본 열도 내 사람들이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에 편입되어 가는 시대이다.

‘야요이(弥生)’라는 명칭은 1884년 현재의 도쿄도 분쿄구의 무코가오카 조개더미에서 발견된 토기를 지역의 이름을 따서 야요이식 토기라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당시에는 야요이식 토기가 사용된 시대를 야요이식 시대라고 불렀지만, 그 후 점점 ‘식’을 생략하는 명칭이 통용되었다.

1936년 고바야시 유키오(小林行雄)는 조몬 문화와 고분 문화 사이에 위치하는 독립된 문화로 야요이 문화(당시 야요이식 문화)를 설정하였다. 야요이 문화는 야요이 토기, 농업, 철이라는 세 요소에 의해 규정되었고, 야요이 전기 단계에 모두 갖추어졌다고 인식하였다. 이는 1940~50년대에 후쿠오카현 이타즈케 유적과 구마모토현 사이토야마 유적의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그 결과 야요이 문화는 농업과 철기가 동시에 출현하는 선사 문화로 인식되었다. 특히 철기를 야요이 문화를 성립 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보았으며, 1960년대에는 철기는 이기(利器), 청동기는 예기(禮器)나 제기(祭器)로 판단하였다.

1970년대 사하라 마코토(佐原真)는 정형화된 수도작 농업이라는 경제적 측면을 강조하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는 기존의 정의를 수정하여, 수도작 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생활이 시작한 시대를 야요이 시대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초 후쿠오카현의 이타즈케 유적, 마가리타 유적, 사가현 나바타케 유적에서 조몬 시대 만기말의 과 철기가 확인되었다. 이에 사하라 마코토는 수도작이 시작한 조몬 시대 만기말의 돋을띠무늬 토기(突帶文土器) 단계를 야요이 시대 조기로 설정하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야요이 시대 조기의 설정은 야요이 문화의 성립 계기를 그 때까지 중국의 진·한에서 생각해오던 것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개시 연대도 기원전 5~4세기까지 상향 조정하게 되었다. 1980~90년대에는 시대 구분에 대한 논쟁이 더욱 활발해졌다. 수도작 등의 경제적 측면이 아닌 사회적 측면을 중시하여 시대를 구분하려는 방법이 등장한다. 즉 농업의 개시가 아니라 환호 취락의 등장이나 분쟁의 시작 등 질적으로 다른 문화 요소의 출현을 야요이 시대의 시작으로 하자는 것이다. 이는 농업을 생산 기반으로 하는 사회의 성립이야말로 야요이 문화의 특질을 드러낸다고 하는 사회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 구분 논쟁과 함께 활발히 진행된 논의가 야요이 문화의 성립에 큰 역할을 한 것이 도래인인가 재래인인가라고 하는 논쟁이다. 조몬 시대 이래의 풍부한 고고학적 물질 문화를 중시한 재래인 주체설과 수도작 기술, 수전과 관련된 토목 기술, 사회 조직이나 농경 제사 등에서 확인되는 도래인의 존재를 중요시해야 된다는 견해가 대립하였다.

1979년에 후쿠오카현 이마가와 유적(今川遺跡)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의 재가공품이 야요이 시대 전기 전엽으로 비정되었다. 이 자료가 한반도 남부의 청동기 시대 송국리식과 병행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야요이 문화의 성립에 한반도의 송국리 문화가 중요한 열쇠를 가진다는 인식이 확대되었다. 야요이 시대를 규정하는 정형화된 야요이 토기의 독(甕)은 조몬 계보를 잇는다고 생각되어 왔으나 농업이나 금속기와 마찬가지로 한반도 남부 민무늬 토기의 영향으로 성립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는 등 야요이 문화의 성립을 생각하는 데 있어 한반도의 영향력이 보다 커지게 되었다.

2003년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이 발표한 야요이 수도작 개시 연대 기원전 10세기설은 야요이 문화의 정의에도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새로운 연대관에 의하면 서일본에서 야요이 수도작의 개시기가 대폭 상향되며, 같은 수도작 생활을 하면서도 서일본처럼 대륙이나 한반도계의 요소가 명확하지 않은 지역도 동일본에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서남~동북으로 길게 뻗은 일본 열도는 같은 시기에 야요이 시대라고 할 수 없는 지역이 매우 많다. 때문에 새로운 연대관은 찬반 양론을 떠나 야요이 문화의 범위와 개념 자체를 수정할 필요는 없는가 등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