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 병용기(金石竝用期)
| 기본 정보 | |
|---|---|
| 동의어 | 동석기시대 |
| 시대 | 청동기 시대 |
| 관련 정보 | |
| 유적 | 김해 봉황동 유적 |
| 키워드 | 금속기, 석기,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우메하라 스에지, 하마다 고사쿠, 후지다 료사쿠 |
| 사전 정보 | |
| 수록 사전 |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 집필 연도 | 2019 |
| 집필자 | 김범철 |
설명
금속기와 석기가 함께 쓰이는 시기.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전이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등장한 동기와 기존의 석기를 같이 쓰던 시기를 지칭하기 위해 명명한 ‘(에)이니올리식([A]Eneolithic)’ 또는 ‘캘콜리식(Chalcolithic)’의 번역어이다. (에)이니올리식([A]Eneolithic)은 구리 또는 청동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에누스(aeneus)’와 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리디코스lithikos’를 합성하여 만든 이태리어 ‘에넬리티코(Enelitico)’에서 차용된 것이다. 캘콜리식은 구리 또는 청동을 의미하는 ‘캘코스(chalkos)’와 ‘리디코스’의 두 그리스어를 합성하여 만든 것인데, 언어 계통학적으로 좀 더 일관적이어서 (에)이니올리식보다 널리 사용된다. 금속기와 석기를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금석 병용(金石竝用)’의 측면을 강조하면서 그 두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합금하지 않은 구리를 활용하기 때문에 ‘순동 시대(純銅時代, Copper Age)’도 널리 사용된다. 몇 가지 시대 명칭을 종합하면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전이하는 과도기로서 성격이 강하지만, 신석기 시대에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금석 병용의 기간에 대한 유럽 고고학의 관심은 북미 대륙의 선사 문화에서 그에 해당하는 실제 자료를 확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개념의 부과, 명명 등 시대 설정을 위한 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근대 고고학이 정착되어 가는 1860~1880년대에 삼시대 체계(Three Age System)가 유럽의 지역별 문화 진화 과정과 부합하지 않는 점을 내포한 자료를 확인하면서부터이다. 더 나아가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활발하게 연구를 진행한 근동, 남아시아 등 지역으로 이 개념이 확산되기도 한다. 결국, 인류의 보편적인 발달 단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정착된다.
그 무렵 유럽 고고학과 접촉하던 일본 고고학에도 이 시대 개념이 도입된다. 1917년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는 야요이 토기(彌生土器), 석기, 청동기, 철기가 공반(共伴)하는 상황을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논리로 설명하기 위해 조몬 시대(繩文時代)와 고훈 시대(古墳時代) 사이에 금석 병용기의 개념을 적용한다. 그러나 원래와는 달리 (신)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의 전이 과정에 적용하는 부정합을 발생시켰다. 그러한 점이 거센 비판을 받는 등 일본 고고학에서 금석 병용기는 그다지 적극적인 동조를 받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이 시대 개념은 일제 강점기 몇몇 일본 관변(官邊) 학자들이 한국의 선사·원사 시대 사회 문화적 변화를 설명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하마다 고사쿠와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가 김해 패총(金海貝塚)(지금의 김해 봉황동 유적) 보고서에서 ‘금석 병용기’의 유적으로 규정한 것이 그 시작이다. 김해 패총은 1907년에 알려진 이래 1920년까지 6차례 발굴된다. 계단식 발굴법이 적용된 조사를 통해 다량의 토기 편, 골각기, 석기, 철기, 방추차, 옥류, 탄화미(炭化米) 및 중국 신(新, 7~23년)나라의 화천(貨泉)이 출토되었다. 선사 시대 유적이 금속 시대에 다시 점유되었던 것으로 이해한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1923년의 종합적인 발굴 보고서에서는 김해 패총을 금석 병용기로 비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 당시까지도 일본 고고학에서처럼, 단순히 중국이라는 선진 문화 지역 주변에 있던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후진 문화 지역에서 나타나는 철기 시대로의 전이 과정에 대한 고고학의 설명논리 정도였다. 그러나 1930~40년대를 거치면서 이 시대 개념은 고고학적 양상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식민사관(植民史觀) 정착을 위한 논리에 적극 활용된다. 그 선봉에 섰던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는 『조선고고학연구(朝鮮考古學硏究)』(1948)를 통해, 서력기원 전후까지 석기 시대에 머물던 한국은 중국 한(漢)의 침략과 지배를 경험하면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철기 시대로 넘어가게 되는데, 선진적인 철기 문화가 이식되는 과도기가 곧 금석 병용기로, 그 시기는 한(漢)에 의한 식민 시기이며 서기 3세기까지 지속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철기 시대까지 포괄하면서 신석기-청동기 시대 과도기적 성격을 염두에 둔 당초의 의미나 현재의 용례와도 현격한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에는 한국 역사는 오랜 기간 선사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정체(停滯)’되어 있었으며, ‘중국’이라는 선진 세력의 타율(他律)에 의해 진전되어왔다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어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결국, 일제에 의한 지배를 합리화하는 학문적 지원이 된 것이다.
해방 후 남·북한 고고학계는 청동기 시대 유적을 조사하고 그 시간적 위치를 정립해가면서 식민사관이 투영된 ‘금석 병용기’의 전제들을 극복해 간다. 오늘날은 일제 관변 학자들이 오용한 의미의 금석 병용기를 의식하기조차 어렵다. 다만 자체적인 편년 체계나 조사 성과가 축적되지 못했던 1950년대 초까지도 한국 학자들의 글에는 ‘금석 병용기’의 명칭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식민사관에 동조해서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세계적으로 적지 않은 지역에서 금석 병용기는 특정의 문화 진화 단계로 인식되고, 그 명칭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1910년대 일본 고고학이나 일제 강점기 김해 패총 등에 적용되었던 개념은 보편적인 경향에서는 벗어난 특수한 것이다. 특히, ‘공반(共伴)’의 의미를 과도하게 단순하고 기계적으로 해석한 결과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제한적인 계단식 발굴법과 같이 조개더미의 층위를 파악하기에 부적합한 발굴 방식을 통해 유물이 획득된 상태에서 그런 방식의 해석이 이루어진다면 그 위험은 더할 수밖에 없다. 고고학적 현상으로서 공반은 함께 퇴적되었다는 것일 뿐, 동시기에 제작·사용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금석 병용의 개념이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전이 양상을 설명하는 논리를 내포하고 있으며, 삼시대 체계의 부족을 보충하는 것이라면, 청동기가 나오지 않거나 도구가 아닌 장신구 등 극히 일부의 것만이 출토되는 초기 민무늬 토기 사회에 대해서는 참고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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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신숙정. (2003). 금석병용기. 국립문화재연구소.
- 이기성. (2010). 일제강점기 ‘금석병용기’에 대한 일고찰. 한국상고사학보, 68, 25-44. https://www.riss.kr/link?id=A82630976
- Gilchrist, R., Reynolds, A. (2009). Reflections: 50 Years of Medieval Archaeology, 1957-2007. Routledge.
- Pearce, M. (2019). The ‘Copper Age’: A history of the concept. Journal of World Prehistory, 32(3), 229–250. https://www.jstor.org/stable/45217630
- Renfrew, C., Bahn, P. (2014). The Cambridge World Pre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 Roberts, B. W., Thornton, C. P. (2014). Archaeometallurgy in Global Perspective: Methods and Syntheses. SpringerVerl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