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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리 유적(慶山 大學里遺蹟)

한국고고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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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동의어 경산 대학리 유적
시대 청동기
국가 대한민국
소재지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대학리 969-1, 산74, 50-1, 51-1·5 일원
관련 정보
성격 복합유적
키워드 집자리, 돌널무덤, 구덩이, 화덕 자리, 민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돌도끼, 무덤 구덩이, 돌창, 외날 돌도끼, 조갯날 돌도끼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19
집필자 김광명



설명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대학리 969-1, 산74, 50-1, 51-1·5 일원에 위치한다. 도로 확장 공사로 2002~2003년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대학리 969-1 일원을 조사하였다(대학리·동강리 유적) 이후 경산 지식 산업 지구 개발 공사에 앞서 2015~2016년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15~2017년 동북아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하여 집자리, 돌널무덤(石棺墓), 구덩이 등을 확인하였다. 유적은 무학산(해발 574m)에서 동쪽으로 뻗은 구릉의 말단부와 평탄대지 위에 입지한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은 2002년 조사에서 집자리 1기, 2015년 조사에서(대학리 산74, 51-1) 집자리 3기, 돌널무덤 5기, 구덩이, 석조(石造) 시설 등을 확인하였다. 집자리는 모두 장방형이고, 2호(2015년) 길이 5.72m, 너비 2.27m로 가장 크다. 내부 시설은 벽 도랑(壁溝), 화덕 자리, 기둥 구멍,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화덕은 짧은 벽 쪽에 치우쳐 위치하며, 무시설식이다. 1·2호 집자리 내에서 움이 각 1기씩 확인되었다. 1호는 구덩이 내부에 민무늬 토기 바리(鉢)와 붉은 간 토기가 깨어진 채 출토되었고, 2호는 돌도끼와 미완성 석기가 세워져 출토되었다. 집자리에서 확인된 목탄을 분석한 결과 3호 2760±40 BP(보정 연대 기원전 1010년)로 확인되었다.

돌널무덤은 구릉 말단부 평탄지에 5기가 군집을 이루며, 동북아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한 묘역식(墓域式) 고인돌 6기와 단일 묘역 내에 속한다. 축조 방법은 무덤 구덩이(墓壙)를 굴착 후 바닥에 얇고 납작한 깬돌(板狀割石)을 깔고, 그 위에 같은 돌을 눕혀쌓기(平積)로 만들었다. 상부에는 판돌(板石)로 뚜껑돌(蓋石) 얹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돌널 내부는 길이 0.15~1.02m, 너비 0.09~0.37m, 깊이 0.12~0.4m로 매우 협소하여, 당시의 장법(葬法)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북아문화재연구원은 대학리 122, 50-1, 51-5 일원을 조사하였다(대학리·교리 유적). 122에서는 집자리 4기, 기둥 건물터(高床式建物址) 1기, 구덩이 2기, 50-1·5에서는 묘역을 갖춘 돌널무덤 6기를 비롯하여, 도랑(溝) 1기를 확인하였다. 집자리는 훼손이 심하여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4호는 장방형이고, 나머지는 방형으로 추정된다. 내부 시설은 대부분 벽 도랑이 설치되었고, 화덕 자리는 2기에서만 확인되었다. 기둥 구멍은 일부 확인되었으나, 정형성이 없다. 출토 유물은 민무늬 토기, 돌창(石槍), 외날 돌도끼(片刃石斧), 조갯날 돌도끼(合刃石斧) 등이 확인되었다.

조사된 돌널무덤 가운데 가장 대규모 묘역을 갖춘 1호는 묘역의 장축은 남동-북서향이고, 길이 34.8m, 너비 7.6m이다. 묘역 전체가 조사되지 않았지만 형태는 장방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묘역은 두께 10㎝ 이내의 납작하게 깬돌(板狀割石)을 첫 단부터 눕혀쌓기하여 바깥쪽으로 다듬은 면을 맞추어 8~10단 정도 쌓았고, 묘역 내부에는 주변에서 채취한 흙을 채워 넣은 구조이다. 매장 주체부는 묘역의 남동쪽으로 치우쳐서 배치되었으며, 납작하게 깬돌을 첫 단부터 눕혀쌓기하였다. 나머지 5기의 묘역은 1호 묘역의 남쪽으로 나란하게 열을 지어 분포하며, 묘역끼리 연결된 무덤은 4호(장방형), 5호(방형)이다. 묘역은 조사 구역 바깥쪽인 919번 지방 도로 하부로 연결되고 있어 매장 주체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고, 유물 또한 출토되지 않았다. 묘역식 고인돌의 연대는 묘역 내에서 확인된 목탄을 통해 보정 연대 기원전 900년(±30)이라는 결과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