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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구(農耕具)

한국고고학사전
Admin (토론 | 기여)님의 2026년 1월 21일 (수) 12:03 판 (dkamaster 800-0047 자동 업로드 (entry_type=개념))


농경구
기본 정보
시대 신석기 시대
지역 한반도 전 지역
관련 정보
유적 고성 문암리 유적, 봉산 지탑리 유적, 서울 암사동 유적, 진주 상촌리 유적
키워드 신석기 시대 농경, 갈돌, 갈판, 굴지구, 돌괭이, 돌낫, 뼈낫, 어로구, 수렵구, 재배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신석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24
집필자 최종혁



설명

농경구농경 활동에 사용된 도구이다. 한반도 신석기 시대 농경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으며, 그 용어 문제에서도 이견(異見)이 많다.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재배 곡물은 조·기장 등의 잡곡이 탄화된 채로 확인되거나 토기·토제품에서 곡물의 눌림흔적[壓痕]으로 나타난다. 경작지로는 강원도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밭(2개 층)이 확인되었다. 토제품에서 확인되는 눌림흔적은 아직 재배종인지 야생종인지의 문제가 남아 있으며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확인된 경작지(밭)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농경 문제에 대해서는 잡곡의 출토를 비롯해 해안에서 내륙으로의 유적 입지와 도구 조성의 변화 등으로 중기부터는 내륙 지역을 중심으로 농경이 생업 경제의 일부분을 담당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농경은 적어도 ‘입지 결정→토지 이용과 개간→거름주기→경작과 제초→파종→수확→가공’이라는 일련의 행위가 필요하다. 고고학적으로 토지 이용과 개간·경작에는 경기구·굴지구, 수확에는 수확구, 가공에는 조리구가 확인되어 그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외의 행위는 관련된 유물이 없어 정확한 양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유물로 남아 있는 경우도 유사한 형태의 것이 출토하는 예가 있다. 그러나 이때 경기구(굴지구)·수확구·조리구가 세트로 출토하지 않기도 해 농경구로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따라서 경기·수확·조리의 행위에 관련된 도구가 세트로 출토할 때 농경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농경구 종류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차이는 보이지만, 보편적으로 경기구(굴지구)로는 보습괭이, 어깨도끼와 사슴뿔을 이용한 굴지구가 있다. 수확구로는 멧돼지 견치·돌·조개를 이용해 제작된 낫·원반 모양 석기·뗀 돌칼이 있다. 조리구로는 막대기 모양[棒狀]의 갈돌과 말안장 모양의 갈판이 확인된다.

먼저 경기구(굴지구) 중 보습과 어깨 도끼는 대동강·한강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서부 지역을 비롯해 그 이하 지역에서 확인된다. 어깨 도끼는 주로 북부 지역에 분포하며, 사슴뿔을 이용한 굴지구는 서북 지역과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되어 유적 입지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수확구 중 원반 모양 석기는 지름 10cm 내외의 크기이며, 떼기 기법으로 날을 만들었다. 진주 상촌리 유적 등 남부 지역뿐 아니라 서울 암사동 유적에서도 출토된다. 돌칼모양 석기는 청동기 시대반달돌칼과 달리 그 형태가 전형적이지는 않으나 청원(현재의 청주) 쌍청리 유적 출토품과 유사한 것으로, 이를 반달돌칼의 시원(始原)으로 보고 있다.

조리구 중 갈돌과 갈판은 수렵 채집에서 야생 식물 등을 가공 처리 할 때 필요한 도구로, 신석기 시대 조기부터 확인된다. 수렵 채집과 관련된 갈돌·갈판과 농경구의 갈돌·갈판은 형태에서 차이를 보인다. 전자는 갈돌·갈판이 둥근 형태인 반면, 농경과 관련된 갈돌·갈판의 경우 갈돌은 막대기 모양이며, 갈판은 말안장 모양(장방형)이다. 사용 방법상에서도 전자는 갈돌은 갈판 위에서 원을 그리며 사용하고, 후자는 앞뒤로 굴려 사용하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우리나라 농경의 기원지로 판단되는 중국 동북 지역에서도 같은 형태를 보인다.

신석기 시대 중기에 들어서면 이러한 경기구·수확구·조리구가 세트로 출토되기 시작하는 등 석기 조성에 변화가 나타난다. 이와 함께 중기 이후에 해안·도서에 집중되어 있던 유적의 입지도 내륙으로 넓어지는 등 앞 시기와는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지역적·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중기 이후에는 출토되는 곡물을 비롯하여 농경구의 조성, 유적의 입지 변화 등으로 보아 내륙 지역을 중심으로 농경이 어느 정도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 생업에 있어 그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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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