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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설명==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임실읍 갈마리 542에 위치한다. 임실 제2 농공 단지 조성 사업에 앞서 발굴 조사되었다. 유적은 북쪽의 고덕산(해발 625m)에서 남서쪽으로 흘러내린 가지구릉(해발 240m 내외)에 위치한다. 주변으로 해발 300m 내외의 구릉이 발달하고, 서편으로 대덕천이 남북으로 흘러 임실천으로 합류한다. 유구는 해발 240~230m의 가지구릉 정상부와 능선, 사면에 걸쳐 분포한다.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집자리|집자리]]를 비롯하여 [[구석기시대|구석기 시대]] 문화층, [[원삼국시대|원삼국 시대]] 집자리와 [[구덩이|구덩이]], 고려 시대 [[돌덧널무덤|돌덧널무덤(石槨墓)]], 조선 시대 [[움무덤|움무덤(土壙墓)]]과 [[회곽묘|회곽묘(灰槨墓)]]가 다수 확인되었다.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해리면 금평리 산 89-20·왕촌리 산 11-5 일원에 위치한다. 고창 무장-금평 간 국지도 확·포장 공사에 앞서 2013년에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은 도로 공사 구간에 해당되며 금평리·왕촌리·고성리로 나누어 조사되었다. 금평리에서는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고인돌|고인돌]] 9기·[[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3기·[[돌덧널무덤|돌덧널무덤(石槨墓)]] 1기가 확인되었고, 왕촌리에서는 도랑(溝) 1기, [[초기철기시대|초기 철기 시대]] 돌널무덤(石棺墓) 1기가 조사되었다. 금평리와 왕촌리 지점은 약 600m 거리이다.
고창군 해리면 금평리 산 89-20·왕촌리 산 11-5 일원에 위치한다. 고창 무장-금평 간 국지도 확·포장 공사에 앞서 2013년에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은 도로 공사 구간에 해당되며 금평리·왕촌리·고성리로 나누어 조사되었다. 금평리에서는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고인돌|고인돌]] 9기·[[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3기·[[돌덧널무덤|돌덧널무덤(石槨墓)]] 1기가 확인되었고, 왕촌리에서는 도랑(溝) 1기, [[초기철기시대|초기 철기 시대]] 돌널무덤(石棺墓) 1기가 조사되었다. 금평리와 왕촌리 지점은 약 600m 거리이다.


먼저 금평리 유적에서 조사된 청동기 시대 무덤은 고인돌, 돌널무덤, 돌덧널무덤으로 10여 기 이상이 좁은 공간에 군집을 이루며 분포한다. 고인돌은 동서-남동 방향으로 2~4기씩 열을 맞춰 조성되었으며, 3호와 8호 고인돌을 제외한 나머지는 묘역 시설(墓域施設)을 갖추고 있다.
먼저 금평리 유적에서 조사된 청동기 시대 무덤은 고인돌, 돌널무덤, 돌덧널무덤으로 10여 기 이상이 좁은 공간에 군집을 이루며 분포한다. 고인돌은 동서-남동 방향으로 2~4기씩 열을 맞춰 조성되었으며, 3호와 8호 고인돌을 제외한 나머지는 묘역 시설(墓域施設)을 갖추고 있다.

2026년 4월 14일 (화) 16:08 판


금평리·왕촌리 유적
기본 정보
동의어 고창 금평리·왕촌리 유적
시대 청동기 시대
국가 대한민국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해리면 금평리 산 89-20·왕촌리 산 11-5 일원
관련 정보
성격 복합유적
키워드 고인돌, 돌널무덤, 돌덧널무덤, 바둑판식 고인돌, 덮개식 고인돌, 집자리, 움무덤, 독무덤, 분구묘, 송국리 문화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19
집필자 김진



설명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해리면 금평리 산 89-20·왕촌리 산 11-5 일원에 위치한다. 고창 무장-금평 간 국지도 확·포장 공사에 앞서 2013년에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은 도로 공사 구간에 해당되며 금평리·왕촌리·고성리로 나누어 조사되었다. 금평리에서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 9기·돌널무덤(石棺墓) 3기·돌덧널무덤(石槨墓) 1기가 확인되었고, 왕촌리에서는 도랑(溝) 1기, 초기 철기 시대 돌널무덤(石棺墓) 1기가 조사되었다. 금평리와 왕촌리 지점은 약 600m 거리이다.

먼저 금평리 유적에서 조사된 청동기 시대 무덤은 고인돌, 돌널무덤, 돌덧널무덤으로 10여 기 이상이 좁은 공간에 군집을 이루며 분포한다. 고인돌은 동서-남동 방향으로 2~4기씩 열을 맞춰 조성되었으며, 3호와 8호 고인돌을 제외한 나머지는 묘역 시설(墓域施設)을 갖추고 있다.

고인돌군은 조지산(해발 225m)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린 팔령치의 하단부인 해발 16m 내외의 낮은 구릉에 열을 지어 9기 조밀하게 무리지어 있다. 덮개돌과 매장 주체부 시설의 장축 방향은 대부분 해리천의 방향과 평행한 북서-남동 방향이다. 고인돌의 형식은 바둑판식(碁盤式) 5기와 덮개식(蓋石式) 3기이다. 덮개돌의 평면 형태는 방형, 장방형, 부정형 등 다양하고 상면과 바닥 면은 편평하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1.77~2.73m, 너비 0.92~1.63m 높이 1m 미만이며, 무게는 0.9~18톤 정도이다. 받침돌(支石)은 보통 네 모서리에 위치하는데, 1호는 4개가 온전히 남아 있고 3~6호는 받침돌 일부가 유실되어 2~3개만 확인된다. 덮개돌과 받침돌의 상관 관계를 살펴보면, 덮개돌의 두께가 두꺼우면 받침돌의 높이는 낮고, 덮개돌의 두께가 얇으면 받침돌이 높다. 묘역 시설은 6기에서 확인되었는데, 평면 형태는 방형 또는 장방형이었다. 대부분 훼손되고 1호만 비교적 온전하게 남았는데 크기는 길이 4.98m, 너비 4.1m 정도이다. 축조 방법은 돌무지형(積石形)으로, 가장자리를 판돌으로 두르고 그 안쪽에 작게 깬돌(割石)을 2~3단으로 채워 넣은 형태이다. 나머지 묘역 시설은 작게 깬돌을 이용하여 덮개돌 주위에 깔았으나, 세부적인 규모와 형태는 파악할 수 없었다. 매장 주체부 시설은 1호를 제외하고는 지상식 돌널(石棺) 형태로, 길이 0.98~2.48m, 너비 0.5~0.8m 내외로 9호가 길이 0.98m 정도의 소형이고, 나머지는 길이는 1.1m 이상이다. 축조 방법은 판돌(板石)로 네 벽을 세우고 주위에는 작게 깬돌을 채워 넣었다. 바닥 시설은 판돌을 깐 것(5·6·7호)과 작게 깬돌을 깐 것(4호), 생토면을 이용한 것(3·8·9호)으로 구분된다. 뚜껑돌(蓋石)은 8호에서만 확인되었는데 길이 1.2m, 너비 0.6m, 두께 0.05m의 얇고 판판한 돌을 사용하였다. 고인돌의 선후 관계는 고인돌의 연접 및 탐색 트렌치 등을 통해 파악하였는데, 북서쪽에 위치한 고인돌이 먼저 축조되었다. 그리고 북쪽에 일렬로 조성된 4·5·7호는 연접된 묘역 시설을 통해 볼 때 4호 묘역 시설 위로 5호가 축조되었고, 7호 묘역 시설은 5호 위로 중복되었다. 또한 남쪽에 분포하는 9호와 6호 역시 묘역 시설의 상태로 보아 9호 이후 6호가 축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돌널무덤은 고인돌군 안쪽에서 3기가 확인되었다. 1호와 3호는 온전하게 남아있지만, 2호는 민묘로 인해 일부가 훼손되었다. 무덤의 구조는 지하식(1·2호)과 지상식(3호)으로 구분되고, 뚜껑돌은 1호에서만 확인되었는데 3매의 판판한 돌을 3단으로 쌓았다. 벽석은 대부분 판판한 돌을 이용하여 세로 방향으로 세워쌓기하였고, 2호는 판판한 돌 뒤로 작게 깬돌로 충전하였다. 바닥은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고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돌널무덤 역시 덮개돌이 유실된 고인돌의 하부 구조일 가능성도 검토하였으나, 주변 고인돌군의 구조와 축조 방법 등으로 보아 그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고인돌 주위에 조성된 돌널무덤은 당시 동일 집단의 위계를 반영한 결과로 추정하고 있다. 유물은 8호 고인돌 매장 주체부의 벽석 사이에서 붉은 간 토기 편이 출토되었는데, 몸통와 바닥만 남아 있어 전체적인 형태는 파악하기 어렵다.

돌덧널무덤은 1호와 6호 고인돌 사이에서 1기가 확인되었다. 돌덧널무덤의 벽석 위로 6호 고인돌의 묘역 시설이 조성되어 6호 고인돌보다 먼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평면 형태는 말각 장방형이고, 장축 방향은 주변의 고인돌들과 같이 북서-남동 방향(N2° W)이다. 뚜껑돌은 3매의 널빤지 모양 돌(板狀石)을 나란히 덮었다. 무덤 구덩이(墓壙)는 생토면을 비스듬히 굴광하였고, 네 벽은 온전히 잘 남아 있었다. 벽석은 작게 깬돌과 널빤지 모양 돌을 이용해 3~4단으로 쌓았다. 짧은 벽인 북벽을 먼저 만들었고 양쪽 긴 벽과 짧은 남벽의 순으로 축조하였다. 바닥은 작게 깬돌을 깔았다. 무덤 구덩이는 길이 1.89m, 너비 1.35m 정도이며, 돌덧널(石槨)은 길이 1.1m, 너비 0.38m, 깊이 0.39m 정도이다. 이 돌덧널무덤은 덮개돌이 유실된 고인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매장 주체부의 위치, 묘역 시설 구축 등 축조 방식에서 차이가 보여 독립된 무덤으로 구분하였다.

왕촌리 유적은 해발 30m 내외의 구릉 정상부와 남쪽 사면부에 위치한다. 유적의 북동쪽으로 인접하여 해리천이 북서쪽의 서해로 흘러가고, 해리천 주변으로 넓은 충적지가 펼쳐져 있다. 청동기 시대 도랑 1기와 초기 철기 시대 돌널무덤 1기를 비롯하여 원삼국 시대 집자리·움무덤(土壙墓)·독무덤(甕棺墓)·분구묘, 도랑·구덩이와 조선 시대 움무덤이 확인되었다.

청동기 시대 도랑은 구릉의 남쪽 사면부(해발 28.0m)에 자리하는데, 경사면을 따라 길게 이어진 형태이다. 사면부 중앙에 자리하고 있어 유구가 폐기된 이후 원삼국 시대 집자리와 움무덤이 축조되면서 일부 유실되었다. 장축 방향은 북동-남서(N19°E)이고, 경사면을 따라 길게 조성하였으며, 단면 형태는 ‘U’자 모양이다. 잔존 길이 23.96m, 너비 2.76m, 잔존 깊이 0.28~0.86m 정도이다. 바닥에는 잔자갈이 깔려 있고, 유물은 바닥에 깔린 잔자갈 위로 민무늬 토기 편이 출토되었다.

초기 철기 시대 돌널무덤은 바다와 인접한 구릉의 남쪽 사면부에서 1기가 확인되었다. 장축 방향은 등고선과 직교한 남북 방향이다. 무덤 구덩이는 1단이고, 덮개돌은 여러 매의 널빤지 모양 돌을 2단으로 덮고 덮개돌 위와 주변에 깬돌을 덮은 형태이다. 벽석은 널빤지 모양 돌을 이용하여 가로 방향으로 세워쌓기 하였으며, 서쪽 긴 벽은 벽석 위로 뚜껑돌을 받치기 위해 1단을 더 쌓았다. 유물은 돌널무덤의 남쪽 바닥돌 위에서 검은 간 긴 목 항아리(黑陶長頸壺) 2점이 출토되었다.

금평리 유적은 성격과 편년은 절대 연대 측정값이 제시되지 않았으며 고인돌 내 껴묻거리가 매우 빈약한 고창 지역의 특징적인 고인돌로, 축조 집단의 성격이나 연대를 설정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청동기 시대 무덤의 묘역 시설 및 무덤의 축조 방식과 축조 재료, 출토 유물 등을 통해 살펴보면 송국리 문화 단계의 무덤들로, 기원전 5~4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왕촌리 유적의 돌널무덤은 축조 방식과 검은 간 긴 목 항아리 등을 통해 보면, 기원전후로 보고 있다. 하지만 출토 유물이 빈약하여 성격과 편년을 설정하는데 한계가 있다. 금평리 유적은 청동기~초기 철기 시대의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어 고창 지역의 선사 시대 무덤의 축조 방법과 문화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조사 이후 고인돌 3기, 돌널무덤 1기, 돌덧널무덤 1기를 고창 고인돌박물관으로 이전·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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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