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600-4576: 두 판 사이의 차이

한국고고학사전
dkamaster 600-4576 자동 업로드 (entry_type=개념)
dkamaster 600-4576 자동 업로드 (entry_type=개념)
 
20번째 줄: 20번째 줄:


서주 시대에 접어들면 이전 시기에 비해 기종의 증가가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정과 궤 등의 식기로 조합의 중심이 옮겨지고 주기는 상대적으로 쇠퇴한다. 문양은 은허 문화기와 마찬가지로 수면문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지만 봉조문이 현격히 증가하고, 서주 후기에는 절곡문(折曲文), 파곡문(波曲文), 인문(鱗文) 등의 기하학적 문양이 주류를 점한다. 서주 후기에는 보와 수 등의 식기가 출현하여 식기의 기종이 다양해지는 반면 작, 가, 반, 이, 굉, 고 등의 주기는 점차 사라지고, 화와 반 등의 수기도 완비된 청동 예기 조합에서 필수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기부터 청동 예기 제작 공예는 쇠퇴하는 경향을 보인다. 청동 예기의 일부에는 명문이 있다. 이를 통상 [[금문|금문(金文)]]이라 한다. 금문은 얼리강 문화기에 처음 등장하여 은허 문화기에도 보이지만, 대개 소유자와 제사 대상 등을 표기한 간단한 것이다. 그러나 서주 시대에 들면 금문의 출현 사례도 증가하고, 내용도 장문화(長文化)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런 경향은 서주 중기에서 후기까지도 지속된다. 예컨대 서주 후기 선왕(宣王) 때의 작품인 [[모공정|모공정(毛公鼎)]]에서는 497자의 명문이 확인되었다. 때문에 금문은 문헌 사료가 부족한 상주 시대의 역사, 특히 서주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유용한 자료로 널리 활용된다. 한편 서주 중기에는 열정(列鼎)처럼 동일 기종으로 형태와 문양을 같이 하면서도 크기는 서로 다른 청동 예기 세트가 제작된다. 『주례(周禮)』나 『의례(儀禮)』 등 예서(禮書)에서는 열정의 개체 수가 신분의 고하를 나타내는 일종의 표지라고 한다. 이는 서주 중기 이래 청동 예기의 성격이 제례에 사용되는 신기(神器)에서 사회적 계층과 신분을 과시하는 위신재로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 서주 후기에 들어 박태(薄胎), 무문의 청동 예기가 부장을 위한 명기(明器)로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것도 청동 예기의 성격적 변화가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춘추 시대 이후에도 청동 예기는 꾸준히 제작되었지만 그 본질적 함의가 희박해져감에 따라 사회적, 문화적 중요성은 점차 퇴조된다.
서주 시대에 접어들면 이전 시기에 비해 기종의 증가가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정과 궤 등의 식기로 조합의 중심이 옮겨지고 주기는 상대적으로 쇠퇴한다. 문양은 은허 문화기와 마찬가지로 수면문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지만 봉조문이 현격히 증가하고, 서주 후기에는 절곡문(折曲文), 파곡문(波曲文), 인문(鱗文) 등의 기하학적 문양이 주류를 점한다. 서주 후기에는 보와 수 등의 식기가 출현하여 식기의 기종이 다양해지는 반면 작, 가, 반, 이, 굉, 고 등의 주기는 점차 사라지고, 화와 반 등의 수기도 완비된 청동 예기 조합에서 필수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기부터 청동 예기 제작 공예는 쇠퇴하는 경향을 보인다. 청동 예기의 일부에는 명문이 있다. 이를 통상 [[금문|금문(金文)]]이라 한다. 금문은 얼리강 문화기에 처음 등장하여 은허 문화기에도 보이지만, 대개 소유자와 제사 대상 등을 표기한 간단한 것이다. 그러나 서주 시대에 들면 금문의 출현 사례도 증가하고, 내용도 장문화(長文化)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런 경향은 서주 중기에서 후기까지도 지속된다. 예컨대 서주 후기 선왕(宣王) 때의 작품인 [[모공정|모공정(毛公鼎)]]에서는 497자의 명문이 확인되었다. 때문에 금문은 문헌 사료가 부족한 상주 시대의 역사, 특히 서주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유용한 자료로 널리 활용된다. 한편 서주 중기에는 열정(列鼎)처럼 동일 기종으로 형태와 문양을 같이 하면서도 크기는 서로 다른 청동 예기 세트가 제작된다. 『주례(周禮)』나 『의례(儀禮)』 등 예서(禮書)에서는 열정의 개체 수가 신분의 고하를 나타내는 일종의 표지라고 한다. 이는 서주 중기 이래 청동 예기의 성격이 제례에 사용되는 신기(神器)에서 사회적 계층과 신분을 과시하는 위신재로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 서주 후기에 들어 박태(薄胎), 무문의 청동 예기가 부장을 위한 명기(明器)로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것도 청동 예기의 성격적 변화가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춘추 시대 이후에도 청동 예기는 꾸준히 제작되었지만 그 본질적 함의가 희박해져감에 따라 사회적, 문화적 중요성은 점차 퇴조된다.
==참고문헌==
* 김정열. (2013). 산 자를 위한 죽은 이의 그릇. <i>미술사학, 27</i>, 329-364.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2288529
* 리쉐친. (2005). <i>중국 청동기의 신비</i>(심해훈 역). 학고재. https://www.riss.kr/link?id=M9769533
* 马承源. (2003). <i>中国青铜器</i>. 上海古籍出版社.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2026년 4월 2일 (목) 12:30 기준 최신판


청동 예기
기본 정보
동의어 이기
시대 청동기 시대
지역 중국 전역
관련 정보
키워드 의례, 의례 물품, 청동제 용기, 청동제 악기, 얼리터우 문화기, 얼리강 문화기, 은허 문화기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19
집필자 김정열



설명

예기는 고대 사회에서 지배층이 제사, 향연(饗宴), 정벌 또는 장의(葬儀) 등의 각종 의례에서 사용자의 신분, 계층, 권력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의례용 물건을 가리킨다. 예기는 신석기 시대 후기 사회에 지배층이 발생하면서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고, 청동기 시대 이후에 크게 발전하였다. 예기는 주로 각종 옥기와 청동제 용기악기인데, 이 중 후자를 청동 예기라 칭한다.

청동 예기는 기원전 19~17세기의 얼리터우 문화기(二里頭文化期)에서 처음 출현한 이래 역사 시대까지 사용되었으며, 특히 상주 시대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청동 예기는 주로 제사에 진헌(進獻) 용기로 사용되었지만 연회 등에도 활용되었다. 때문에 사당에 ‘항상’ 진열하여 두고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이기(彝器)라고도 칭한다. 청동 예기는 일반적으로 용도에 따라 식기, 주기(酒器), 수기(水器), 악기 등으로 구분한다. 식기는 음식에 관련된 것으로 정(鼎), 력(鬲), 언(甗) 등의 조리기구(烹飪器)와 궤(簋), 수(盨), 보(簠), 두(豆) 등의 성식기(盛食器)로 구별된다. 주기는 술에 관련된 것으로 작(爵), 각(角), 가(斝) 등의 온주기(溫酒器), 준(尊), 굉(觥), 방이(方彝), 유(卣), 뢰(罍), 호(壺) 등의 성주기(盛酒器), 고(觚), 치(觶), 배(杯) 등의 술잔(飮酒器), 두(斗) 등의 국자(挹酒器) 등이 포함된다. 제례 과정에서 손을 씻을 때 사용한 도구를 수기라 하는데, 여기에는 반(盤), 이(匜), 화(盉), 우(盂) 등이 있다. 악기는 모두 타악기로서 령(鈴), 요(鐃), 종(鐘), 박(鎛), 탁(鐸), 순우(錞釪) 등이다. 이상 현행의 예기 명칭은 대부분 송나라의 『박고도록(博古圖錄)』에서 차용한 것인데, 그것이 원래의 이름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청동 예기의 형태나 문양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 발전한다.

얼리터우 문화기의 청동 예기는 기종도 적고 문양도 없지만 얼리강 문화기(二里岗文化期)에는 기종이 다양해지고 단순한 형태의 문양이 출현하며, 식기, 주기, 수기로 구성된 청동 예기 조합도 형성된다. 이후 은허 문화기(殷墟文化期)에 접어들면 수면문(獸面文), 기문(夔文), 봉조문(鳳鳥文), 초엽문(蕉葉文), 유정문(乳釘文), 호문(虎文), 상문(象文), 잠문(蠶文) 등과 전신을 장식(滿花)하는 문양이 출현한다. 문양 가운데서 가장 발전한 형태는 뇌문(雷文)을 바탕으로 하고 주문(主文)을 부조로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다층적(三層花)인 것이다. 이 시기의 청동 예기는 주로 주기를 위주로 하며, 그 가운데서도 고와 작이 중심이 된다.

서주 시대에 접어들면 이전 시기에 비해 기종의 증가가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정과 궤 등의 식기로 조합의 중심이 옮겨지고 주기는 상대적으로 쇠퇴한다. 문양은 은허 문화기와 마찬가지로 수면문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지만 봉조문이 현격히 증가하고, 서주 후기에는 절곡문(折曲文), 파곡문(波曲文), 인문(鱗文) 등의 기하학적 문양이 주류를 점한다. 서주 후기에는 보와 수 등의 식기가 출현하여 식기의 기종이 다양해지는 반면 작, 가, 반, 이, 굉, 고 등의 주기는 점차 사라지고, 화와 반 등의 수기도 완비된 청동 예기 조합에서 필수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기부터 청동 예기 제작 공예는 쇠퇴하는 경향을 보인다. 청동 예기의 일부에는 명문이 있다. 이를 통상 금문(金文)이라 한다. 금문은 얼리강 문화기에 처음 등장하여 은허 문화기에도 보이지만, 대개 소유자와 제사 대상 등을 표기한 간단한 것이다. 그러나 서주 시대에 들면 금문의 출현 사례도 증가하고, 내용도 장문화(長文化)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런 경향은 서주 중기에서 후기까지도 지속된다. 예컨대 서주 후기 선왕(宣王) 때의 작품인 모공정(毛公鼎)에서는 497자의 명문이 확인되었다. 때문에 금문은 문헌 사료가 부족한 상주 시대의 역사, 특히 서주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유용한 자료로 널리 활용된다. 한편 서주 중기에는 열정(列鼎)처럼 동일 기종으로 형태와 문양을 같이 하면서도 크기는 서로 다른 청동 예기 세트가 제작된다. 『주례(周禮)』나 『의례(儀禮)』 등 예서(禮書)에서는 열정의 개체 수가 신분의 고하를 나타내는 일종의 표지라고 한다. 이는 서주 중기 이래 청동 예기의 성격이 제례에 사용되는 신기(神器)에서 사회적 계층과 신분을 과시하는 위신재로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 서주 후기에 들어 박태(薄胎), 무문의 청동 예기가 부장을 위한 명기(明器)로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것도 청동 예기의 성격적 변화가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춘추 시대 이후에도 청동 예기는 꾸준히 제작되었지만 그 본질적 함의가 희박해져감에 따라 사회적, 문화적 중요성은 점차 퇴조된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