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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표제어=오덕리 유적(燕灘 五德里遺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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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조사 || 1971년 || 오덕리 고인돌 발굴 보고 || 1974 || 사회과학출판사 | | 발굴조사 || 1971년 || 오덕리 고인돌 발굴 보고 || 1974 || 사회과학출판사 | ||
2026년 1월 20일 (화) 05:37 판
| 기본 정보 | |
|---|---|
| 동의어 | 연탄 오덕리 유적 |
| 시대 | 청동기 시대 |
| 국가 | 북한 |
| 소재지 | 황해북도 연탄군 성매리(舊 오덕리)와 송신동 일대 |
| 관련 정보 | |
| 성격 | 복합유적 |
| 키워드 | 고인돌, 집자리, 돌 두름 유구, 오덕형 고인돌, 침촌형, 간 돌검, 팽이 토기, 선돌, 거석 문화 |
| 사전 정보 | |
| 수록 사전 |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 집필 연도 | 2019 |
| 집필자 | 장호수 |
설명
황해북도 연탄군 성매리(舊 오덕리)와 송신동 일대에 위치한다. 1971년에 발굴 조사하여, 고인돌 21기와 집자리 1기, 그리고 돌 두름 유구 1기를 확인하였다. 연탄읍에서 연산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12㎞에 황주천으로 흘러드는 큰 개울이 있고, 개울 앞쪽은 벌판을 이루고 있다. 벌판 동쪽에 오덕산이 솟아 있고, 오덕산 남쪽 골짜기에 송신동을 비롯하여 석장골, 평촌 마을 등 골짜기에 고인돌이 수십 기씩 떼를 지어 있다. 오덕리에는 적어도 200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오덕형 고인돌이 대부분이고 침촌형(沈村型)도 있다. 송신동 남쪽 골안 화산동에도 고인돌 8기와 선돌(立石) 1기가 있다.
오덕리 고인돌군은 돌무지(積石) 묘역 시설(墓域施設)이 있고 그 안에 2기 이상의 고인돌이 들어있는 것과, 묘역 시설이 없이 홀로 서 있는 것 두 가지가 있다. 묘역 시설이 있는 것을 1유형이라고 한다. 묘역 시설이 없는 것은 다시 세 가지로 나누어, 무덤방(墓室) 둘레에 돌무지나 흙무지를 보강한 것을 2유형, 받침돌(支石)을 잘 다듬고 무덤방 바닥에 강돌이나 판돌(板石)을 깐 것을 3유형, 받침돌과 덮개돌(上石)을 잘 다듬고 무덤방 한쪽에 문이 있는 웅장한 것을 4유형으로 하였다.
평촌마을은 송신동에서 1㎞ 떨어진 강 건너 마을로 마을 앞으로 서북으로 흐르는 큰 개울 왼쪽 기슭에 구릉진 충적 벌판에서 4개군 51기의 고인돌을 발견하여 5기를 발굴 조사하였다. 1~3유형이 섞여 있으며, 오덕리 고인돌군 중에 1유형이 유일하게 확인된다. 1유형에 속하는 10호와 11호는 길이 17m, 너비 8m 정도의 묘역에 2m 간격을 두고 1열로 놓인 고인돌 3기 가운데 중간과 북쪽에 각각 위치한다. 10호는 뚜껑돌과 받침돌이 상대적으로 작고 매우 거칠게 다듬어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덮개돌은 길이 2.3m, 너비 1.8m, 두께 0.3m이며, 무덤방은 길이 0.85m, 너비 0.6m, 높이 0.45m 크기이다. 11호의 덮개돌은 길이 3.2m, 너비 2.8m, 두께 0.35m이며, 무덤방은 길이 1.4m, 너비 0.8m, 높이 0.58m 크기로 일정한 두께로 흙을 쌓고 그 위에 받침돌을 세웠다. 유물은 10호에서 돌도끼, 간 돌살촉, 팽이 토기(角形土器), 11호에서 간 돌검이 출토되었다. 평촌 고인돌군 북쪽으로 흐르는 강 맞은편 광대바우 밑에는 고인돌 석재를 떼어낸 채석장(採石場) 자리가 남아 있다.
석장동 고인돌군은 송신동에서 능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2㎞ 올라가면 석장골 사이로 흐르는 작은 냇가 북쪽 양지바른 구릉 지대에 3개 지점에 분포하는데 그중 2기를 발굴 조사하였다. 탁자식 고인돌이 대부분이다. 2지점 2호 고인돌은 남북으로 받침돌을 세우고 동서에 막음돌(閉塞石)을 세운 구조이다. 무덤방은 길이 1.6m, 너비 1m, 높이 1m이고 2개의 칸막이 시설을 하여 3칸으로 구획하였는데 1칸의 길이는 무덤방의 너비와 같다. 덮개돌은 길이 4.4m, 너비 2.4m이다. 3지점 1호 무덤방은 길이 1.2m, 너비 7m, 높이 0.6m이다. 출토 유물은 없었다.
송신동 고인돌군은 송신동 북쪽에 있는 담터벌에 있다. 1지점에 27기, 2지점에 6기, 3지점에 8기 등 모두 41기를 확인하였고, 1지점에서 11기, 3지점에서 1기를 발굴 조사하였다. 또한 고인돌 무리 한가운데 돌 두름 유구가 1기씩 자리하고 있다. 오덕리 고인돌 2유형인 31호는 큰 받침돌 2개를 동서로 나란히 세웠고 무덤방 안에 칸막이 시설을 3개하여 4칸으로 구획하고 바닥에 판돌을 깔았다. 무덤방은 길이 2.2m, 너비 1.4m이며, 유물은 간 돌살촉, 간 돌검, 뼈 구슬 등이 나왔다. 오덕리 고인돌 3유형인 4호의 덮개돌은 길이 5.1m, 너비 3.85m, 두께 0.5m이며, 동서 받침돌과 북쪽 막음돌을 세우기 위한 기초홈을 팠다. 받침돌은 안 기울임을 주었고, 무덤방은 길이 1.9m, 너비 1.9m, 높이 1.75m로 무덤방 안에 막돌이 0.25m 두께로 쌓여 있다. 오덕리 고인돌 4유형인 5·6호 고인돌은 덮개돌 밑에 뚜껑돌이 있다. 20호와 22호 고인돌은 무덤방에 칸막이 시설이 있는 구조로 칸막이 구획 가운데 한 곳에만 바닥에 막돌을 깔아 높게 만들어 다른 칸과 차별화를 두었다. 무덤의 껴묻거리로는 10호에서 슴베 간 돌검(有莖式磨製石劍), 간 돌살촉, 5호에서 달도끼(環狀石斧)와 팽이 토기 편, 22호에서는 사람 뼈와 조가비 등이 나왔다.
돌 두름 유구는 송신동 고인돌군 3개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1지점의 유구는 길이 1.3m, 너비 1m, 두께 0.8m 크기의 큰 돌덩이를 모서리가 죽은 방형으로 둘러놓고 그 안에 지름 0.3~0.4m 크기의 둥글둥글한 강돌을 깔아 길이 12m, 너비 8.5m 규모의 일정한 구역을 설치하였다. 2, 3지점에 있는 돌 두름 유구도 1지점의 것과 비슷한 구조를 이루며 크기만 다르다. 돌 두름 유구는 고인돌군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선돌은 높이 3m이다.
집자리는 송신동 3지점 1호 고인돌 동북쪽 10m거리에 있다. 집자리는 길이 8m, 너비 4.3m, 깊이 0.45m로, 화덕은 무시설식으로 중심선을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에 각 1기씩 있고, 기둥 구멍은 네 모서리에 1개씩 위치한다. 유물은 팽이 토기, 돌도끼, 간 돌검, 갈판(耉石), 돌돈(石貨) 등이 출토되었다.
오덕리 유적은 고인돌, 돌 두름 유구, 선돌이 서로 관계가 있는 거석 문화(巨石文化) 관련 유적이다.
조사정보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 |
|---|---|---|---|---|
| 발굴조사 | 1971년 | 오덕리 고인돌 발굴 보고 | 1974 | 사회과학출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