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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표제어=신창동 유적(光州 新昌洞遺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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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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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조사 || 1963년 || 신창리옹관묘지 || 1964 ||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 | 발굴조사 || 1963년 || 신창리옹관묘지 || 1964 ||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 ||
2026년 1월 20일 (화) 05:36 판
| 기본 정보 | |
|---|---|
| 동의어 | 광주 신창동 유적, 광주 신창동 저습지 유적 |
| 시대 | 청동기 시대 |
| 국가 | 대한민국 |
| 소재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512-1 일원 |
| 관련 정보 | |
| 성격 | 복합유적 |
| 키워드 | 독무덤, 저습지, 경작지, 환호, 토기 가마, 도랑, 집자리, 탄화미, 송국리식 집자리, 덧띠 토기, 주구 토기, 거여구, 칠기, 둥근 덧띠 토기, 삼각 덧띠 토기, 합구식 독무덤, 야요이계 토기, 낙랑계 토기 |
| 사전 정보 | |
| 수록 사전 |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 집필 연도 | 2019 |
| 집필자 | 조진선 |
설명
사적.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512-1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은 1963년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에서 독무덤(甕棺墓)을 발굴 조사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1992년 국도1호선 개량 공사로 도로가 유적 중심부를 관통하게 되는 상황에서 시작된 시굴 조사를 계기로 최근까지 20여 차례 시·발굴 조사되었다. 그 결과, 독무덤과 저습지(低濕地)를 비롯해서 경작지와 환호, 토기 가마, 도랑(溝) 등이 발굴되었으며, 토기와 목기(木器)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유적은 삼각산에서 흘러내린 해발 25~35m 정도의 구릉과 영산강 및 그 지류가 만든 곡간 충적 대지에 위치한다. 영산강은 유적의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사행하며, 유적 북쪽에 있는 구릉에 막혀 크게 곡류하면서 유적 동쪽으로 흘러간다. 신창동 유적과 영산강은 직선 거리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구릉에서 영산강으로 흘러가는 소하천의 입구부가 영산강 범람원으로 차단되면서 저습지 유적이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1963년에 조사된 독무덤은 신창동 유적의 맨 서쪽에 있는 구릉의 서쪽 사면에 위치하며 53기의 소형 합구식(合口式) 독무덤을 확인하였다. 독널의 크기는 0.15~0.72m이다. 2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합구식인데 그중 1기는 3개의 항아리를 연결한 세독식이다. 부장품은 철편 1점과 편평력 1점뿐이고 외부에서 평저 장경호(平底長頸壺) 등의 토기류와 청동으로 만든 칼자루 끝 장식(劍把頭飾), 돌도끼(蛤刃石斧), 슴베 돌살촉(有莖式石鏃) 등이 출토되었다.
1992년부터 시작된 저습지를 중심으로 하는 발굴 조사에서는 저습지, 독무덤, 토기 가마, 집자리, 경작지, 환호 등이 발견되었으며, 각종 칠기류·무구류·농공구류·칠용기·현악기·베틀 부속구 등 다량의 목제 유물과 민물패류, 사람 뼈를 비롯하여 선사 시대 생활 문화와 관계된 여러 자료, 벼껍질·탄화미·보리 등 곡물류, 오이씨·박씨 등의 채소류가 출토되었다.
집자리는 대부분 원삼국~삼국 시대의 것이지만 2005년에는 송국리식으로 추정되는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1998년 시굴 조사에서는 초기 철기 시대와 원삼국 시대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되는 논이 확인되었다. 환호는 1998년 조사에서 5기가 조사되었는데, 삼각 덧띠 토기(三角形粘土帶土器)로 보아 초기 철기 시대로 추정된다.
저습지 유적의 토층은 3기로 구분된다. Ⅰ기층에서는 토기와 목기가 함께 출토되었으며, Ⅱ기층에서는 토기만 출토되었다. 그러나 Ⅰ기층과 Ⅱ기층은 시간적으로 단절되는 양상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단일 문화의 성격을 띤다. Ⅰ기층은 흑갈색 유기물 부식토층으로 맨 밑바닥은 뻘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Ⅰ기층의 가장 큰 특징은 벼껍질 압착층의 존재이며 그 사이에서 나무와 나뭇잎·각종 씨앗류, 칠기를 비롯한 다양한 목제 유물과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최대 1.55m 두께로 쌓여 있는 벼껍질층은 출토 당시에는 밝은 담황색을 띠었지만, 공기에 노출되면서 산화되어 흑갈색으로 변화되었다. 벼껍질은 정곡(精穀) 과정에서 벗겨진 왕겨가 대부분이지만 낟알이 없는 벼도 상당량 포함되어 있다.
신창동 유적과 관련된 벼는 자포니카로 확인되었다. 유적에서 확인된 다량의 탄화미(炭火米)와 벼 껍질 등은 인근에서 벼가 재배되어 수확된 것을 보여준다. Ⅱ기층은 홍수 퇴적물과 목탄 및 불탄 흙 등 토기 제작의 부산물이 함유된 점성이 강한 진흙층이 중심을 이룬다. 출토 유물은 덧띠 토기가 주류를 이루지만 야요이(彌生)계나 낙랑(樂浪)계 등의 외래계 토기 편들이 출토되기도 해서 대외 교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Ⅲ기층은 유적 최상부로 퇴적과 경작 등으로 인해 형성된 교란층이다. 조선 시대 옹기, 자기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덧띠 토기가 주종을 이루며 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 검은 간 토기(黑陶長頸壺)를 비롯한 마연 토기(磨硏壺)류, 독 모양 토기(甕形土器), 바리 토기(鉢形土器), 사발 모양 토기(盌形土器), 시루, 굽다리 토기(臺附土器), 굽다리 접시(高杯), 접시류, 뚜껑류, 주구 토기(注口土器), 작은 토기 등과 함께 외래계 토기도 확인된다. 덧띠 토기는 층위상 둥근 덧띠 토기에서 삼각 덧띠 토기로 변화된다. 항아리 모양 토기는 목(頸部)과 몸통(胴體部) 부분이 분명하게 구분되며, 몸통이 긴 것이 특징적이다. 바리 토기는 바닥이 깊고 몸통의 바라짐이 상대적으로 약하며 직선화된 기벽(器壁)을 가졌다. 간 토기류는 그릇 표면을 의도적으로 마연하여 기벽 강화 및 광택을 유도한 토기이다. 굽다리 토기는 상대적으로 높은 굽이나 다리(臺脚)를 부착한 것이다. 대각의 길이에 따라 장각(長脚), 중각(中脚), 단각(短脚)으로 구분된다. 주구 토기는 아가리 한 쪽을 눌러 도드라지게 처리하여 액체를 안정적으로 따르도록 한 토기이다. 뚜껑과 접시는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손잡이(把部)와 바닥 굽의 차이, 몸통(身部)의 기울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시루는 증기로 음식을 찌는데 사용한 토기로 바닥에 구멍을 뚫려 있다. 작은 토기는 5~10㎝ 정도의 작은 토기들로 대부분이며 다른 그릇들을 축소하여 모방하였다. 실용성보다는 모방적인 성격이 강해서 장난감이나 제사용 토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 외래계 토기로는 야요이계와 낙랑계 토기가 있다. 이 밖에도 가락바퀴, 원판 모양 토제품, 흙구슬, 흙방울, 형상(形狀) 토제품 등이 있다.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목기는 무기류, 제의 구, 농공구, 용기류, 생활 용구 등으로 다양하다. 농공구류와 건축 부재는 단단한 참나무류를 주로 사용하였고, 칼자루(劍把)·칼자루 끝 장식·칼집(劍鞘)은 벚나무, 수레바퀴테는 느릅나무속이나 느티나무속의 나무를 주로 사용하였다. 무기류로는 목검과 검 부속구(附屬具)가 대표적인데, 칼집과 목검, 칼자루, 칼자루 반부(盤部), 칼자루 끝 장식, 검·칼 모양 목제품, 칼자루형 목제품 등이 있다. 칼집은 목심칠초(木心漆鞘)가 주를 이룬다. 목검(木劍)은 검 몸(劍身)과 자루를 한 번에 만들었는데, 반부와 칼자루 끝 장식을 결합할 수 있는 것과 검 몸만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 칼자루는 중앙에 굵은 마디가 있어 청동 검의 칼자루와 동일한 형태이다. 칼자루에 연결되는 반부는 장타원형의 판 모양(板狀)으로 중앙에 장방형의 촉 삽입공이 있다. 활은 흑칠(黑漆)을 한 직궁(直弓)인데, 길이 180㎝ 정도인 장궁(長弓)이다. 활은 한 나무로 만든 단순 구조로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도 흑칠직궁(黑漆直弓)이 출토되어 기원 전후에 직궁이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의구도 다양하다. 파문 원형 동기(巴文圓形銅器)는 기능적으로 청동 거울과 같은 의기적(儀器的) 성격의 유물로 생각된다. 새 모양 목제품은 새의 머리와 몸통, 꼬리를 얇은 판상으로 만들었다. 머리 쪽에 작은 구멍이 뚫린 것으로 보아 다른 목제에 결합해서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농공구류는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한 벌채 도구(伐採道具), 작물의 경작과 수확을 위한 기경구(起耕具)와 수확구, 이러한 도구의 가공 제작에 사용되는 공구류와 운반구, 조리구, 저장 용구 등이 있다.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목제 농구류로는 괭이와 괭이 자루, 낫자루, 절굿공이 등이 있다. 낫자루는 비교적 많이 출토되었는데 자루의 구멍으로 보아 쇠낫(鐵鎌)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구류로는 도끼와 자귀의 자루, 나무 망치 등이 있다. 용기류로는 완, 국자 모양 목기, 원통형의 통형 칠기(筒形漆器), 배 모양 옹기, 사각 용기, 파수부 사각 용기, 목칠제 뚜껑, 소형 목합(木盒) 등이 있다. 생활 용구로는 불을 일으키는 데 사용된 발화구(發火具), 가죽신이나 짚신을 제작할 때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넣은 신발골, 부채 자루, 볏짚이나 대마로 만든 각종 끈, 목제 괭이 등의 자루를 고정시키기 위한 부재나 절단된 목제의 분할에 이용된 쐐기 등이 있다. 다양한 건축 부재들도 확인된다.
악기류는 줄을 걸어 뜯어 소리를 내는 현악기와 골무늬(刻目)가 새겨진 거치봉(鋸齒棒)을 마찰해서 소리를 내게 하는 찰음 악기(擦音樂器)가 있다. 현악기는 벚나무 재질로 제작되었는데, 내부가 파인 나무 구유 모양(木槽狀) 위에 10줄의 현을 걸어 만들었다. 방직구(紡織具)는 천을 생산하는 도구로 천의 재료인 실(原絲)을 꼬아 만드는 가락바퀴와 실감개(糸卷), 바디 등이 출토되었다. 거여구(車輿具)는 한반도 남부에서 최초로 출토되었는데, 차축두(車軸頭), 차축(車軸), 바퀴살, 바퀴테, 차형 등이다. 차축두는 지름 9㎝ 내외이고 안쪽에 차축을 꽂을 수 있는 지름 5㎝ 정도의 원통형 구멍이 뚫려 있다. 바퀴살은 22개이며, 바퀴의 복원 지름은 156㎝ 정도이다. 이러한 거여구들은 한반도 남부의 삼한(三韓) 지역에 마차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는 칠(漆) 관련 유물도 다수 출토되었다. 대부분 목기에서 확인되지만, 토기에서도 소량 발견된다. 목기류 중에는 유공 칠기(有孔漆器), 통형 칠기, 칠기 절판(漆器折坂), 저판(底板) 등의 용기류에서 발견된다. 그밖에 칠 처리가 된 목제품으로는 파문 원형 칠기, 칼집, 칼자루, 검의 반부, 수레 부속구, 바디, 국자, 빗 등이 있다. 토기류에서 외면에 칠을 한 것으로는 흑색마연호(黑陶壺)와 굽다리 접시(高杯)가 있으며, 내면에 칠을 한 것으로는 바리 토기, 대형 토기 바닥 편, 토기 바닥 편, 작은 토기, 주구 토기, 독무덤 편 등이 있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철경 동촉(鐵莖銅鏃), 쇠검(鐵劍)과 청동으로 만든 검심(劍鐔)도 출토되었다. 이밖에 다양한 종류의 식물 유체와 동물 유체도 확인되었다. 식물 유체로는 벼, 조, 밀, 들깨, 오이, 삼 같은 경작물뿐 아니라 돌피, 명아주속 등 다양한 종류의 잡초류, 참나무속의 견과류 등이 확인되었다. 동물 유체로는 굴·재첩류·작은 말조개 같은 패류(貝類), 소 같은 가축, 사슴·멧돼지·수달같은 야생동물, 꿩·오리류·기러기류·백조류·까마귀 등의 조류, 잉어·가물치·참돔·가오리·숭어·넙치류 같은 어류, 거북이·자라 같은 파충류 등이 있다. 이와 더불어 거의 완전한 모습을 지닌 사람 뼈 1개체가 발굴되었다. 사람 뼈는 50대 이후의 어른 여자이며, 키는 163~169㎝ 정도로 추정된다.
신창동 유적은 초기 철기 시대에 해당하는 유적과 유물들이 다량으로 발굴되고 출토되었다. 특히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 출토된 목기들은 지금까지 그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우리나라 초기 철기 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와 더불어 초기 철기 시대 농경과 관련된 각종 도구와 두꺼운 벼 껍질층이 발굴됨으로써 당시 농경 문화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기도 하다.
신창동 유적의 연대는 고고학적으로 보면,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기원후 1세기대가 중심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10여 건의 방사성 탄소 연대는 2076~2348 BP여서 이보다 약간 이른 시기로 측정되었다.
조사정보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 |
|---|---|---|---|---|
| 발굴조사 | 1963년 | 신창리옹관묘지 | 1964 |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
| 발굴조사 | 1992년 06월 26일~1992년 07월 25일 | 신창리 유적 – 제1차 발굴조사 개보 | 1993 | 국립광주박물관 |
| 시굴조사 | 1998년 10월 21일~1998년 12월 09일 | 광주신창동유적주변시굴조사보고서 | 2000 | 국립광주박물관 |
| 조사 | 2011년 07월 28일~2011년 12월 25일 | 광주 신창동 유적 –2005년, I5 grid 남서 지점- | 2007 | 국립광주박물관 |
지정정보
| 구분 | 지정 종목 | 지정 명칭 | 자세히 보기 |
|---|---|---|---|
| 국가유산 | 사적 | 광주 신창동 유적 (光州 新昌洞 遺蹟)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