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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카쭤 베이둥춘 유적, 객좌 북동촌 유적(喀左 北洞村遺蹟) | | 이칭별칭=카쭤 베이둥춘 유적, 객좌 북동촌 유적(喀左 北洞村遺蹟) | ||
| 시대=청동기 시대 | | 시대=청동기 시대 | ||
2026년 1월 20일 (화) 13:26 판
| 기본 정보 | |
|---|---|
| 동의어 | 카쭤 베이둥춘 유적, 객좌 북동촌 유적(喀左 北洞村遺蹟) |
| 시대 | 청동기 시대 |
| 국가 | 중국 |
| 소재지 |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시(朝陽市) 카라친쭤이 몽고족 자치현(喀喇沁左翼蒙古族自治縣) 핑팡쯔진(平房子鎭) 베이둥촌(北洞村) |
| 관련 정보 | |
| 성격 | 기타유적 |
| 키워드 | 구덩이, 중위안계의 청동 예기, 청동 항아리, 은허 문화기, 웨이잉쯔 문화, 뢰, 방정, 부신정 |
| 사전 정보 | |
| 수록 사전 |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 집필 연도 | 2019 |
| 집필자 | 김정열 |
설명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시(朝陽市) 카라친쭤이 몽고족 자치현(喀喇沁左翼蒙古族自治縣) 핑팡쯔진(平房子鎭) 베이둥촌(北洞村)에 위치한다. 카라친쭤이 몽고족 자치현 남쪽 17.5㎞지점, 다링강(大凌河) 동쪽 기슭의 비자산(筆架山)이라 불리는 구릉의 정상부에 입지한다. 1973년 주민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서주 시대 전·중기, 즉 기원전 11~9세기경의 구덩이(窖藏坑) 유적이다. 확인된 구덩이는 총 2기로 1호 구덩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2호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1호 구덩이는 장방형으로 길이 1.35m, 너비 1.1m이다. 동부(銅瓿) 1점, 동뢰(銅罍) 5점이 출토되었다. 2호 구덩이는 1호 구덩이에서 동북쪽으로 약 3.5m 떨어져 위치한다. 규모는 길이 약 2.5m, 너비 1.2m이다. 구덩이의 상부를 불규칙한 형태의 돌판으로 덮고(封閉) 내부는 다량의 작은 돌(石片)로 채워 넣었다. 출토 유물은 방정(方鼎) 1점, 원정(圓鼎) 2점, 뢰, 방좌궤(方座簋), 발형기(鉢形器) 각 1점 등 모두 6점의 청동기가 확인되었다. 1·2호 구덩이 내부에 매장된 청동기는 세워져 있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2호 구덩이에서 출토된 발형기 1점을 제외한 유물은 모두 중위안계의 청동 예기이다. 1호 구덩이 출토 청동 항아리는 은허 문화기(殷墟文化期) 중기에 해당하며, 시기는 기원전 12세기경까지 소급될 수 있다. 1호 구덩이 출토 뢰 5점은 은허 문화기 후기, 즉 기원전 11세기경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2호 구덩이의 출토품 가운데 방정과 부신정(父辛鼎)은 은허 문화기 후기로 볼 수 있으나, 뢰와 방좌궤 등은 서주 전기인 기원전 11세기~10세기경의 유물이다. 따라서 1호 구덩이가 축조된 시기는 은허 문화기 후기가 상한이고, 2호 구덩이는 서주 전기를 상한으로 하여, 두 구덩이의 조영 시점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1·2호 구덩이가 인접하여 위치하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조영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랴오시 다링강 일대에서는 기원전 1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조영된 중위안계 청동 예기 매장 유적이 다수 발견된다. 이들의 조영한 주체는 웨이잉쯔 문화(魏營子文化)를 배경으로 한 집단으로 추정된다.
유적은 웨이잉쯔 문화 권역에서 출토되는 중위안계 청동 예기는 상(商)말~주초 랴오시 지역과 중위안 지역의 관계 또는 랴오시 지역에 대한 중위안 지역의 정치적 영향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청동 예기의 매장 유적에 대해서 중위안계 이주민의 진출로 부장된 것인지, 토착민이 중위안계 청동 예기를 입수하여 매장한 것인가를 둘러싼 이견이 있다. 후자의 경우 중위안계 청동 예기는 중위안 지역의 정치 세력이 랴오시 지역의 수장들에게 교부하여 준 것인지 토착민이 약탈 등의 방법으로 획득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양하다. 전자의 경우에는 중위안의 정치 세력이 이 지역을 직접 지배했다는 설로 연결되며, 후자의 경우라면 이 지역은 간접 통치를 받았다거나 또는 중위안 지역의 정치 세력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한편 베이둥춘 유적 1호 구덩이 출토 뢰의 명문(銘文)을 ‘부정고죽아미(父丁孤竹亞微)’로, 2호 구덩이 출토 방정의 명문을 기후(㠱侯亞疑)로 읽고 이를 각각 중국 고대 문헌에 출현하는 고죽국 및 기자와 연계하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으나 해당 명문의 해석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어 판단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