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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표제어=대천동 유적(大邱 大泉洞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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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대구 대천동 유적, 대천동 현대홈타운 신축 부지 내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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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청동기 시대
| 시대=청동기 시대

2026년 1월 20일 (화) 13:15 판


대천동 유적
기본 정보
동의어 대구 대천동 유적, 대천동 현대홈타운 신축 부지 내 유적
시대 청동기 시대
국가 대한민국
소재지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천동 326-1 일원
관련 정보
성격 복합유적
키워드 돌널무덤, 독무덤, 원형 집자리, 장방형 집자리, 방형 집자리, 슴베 간 돌화촉, 돋을띠무늬 토기, 돌대팻날, 반달 돌칼, 깊은 바리 토기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19
집필자 하진호



설명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천동 326-1 일원에 위치한다. 공동주택 조성에 앞서 영남문화재연구원이 2006~2007년 조사하여(대천동 511-2 유적) 집자리16기, 돌널무덤(石棺墓) 68기, 구덩이 7기, 도랑(溝) 1기가 확인되었다. 이후 한천초등학교 건립에 앞서 대동문화재연구원이 대천동 467 일원을 조사하여 1구역에서 청동기 시대 집자리 1기, 돌널무덤(石棺墓)1기, 독무덤(甕棺墓) 1기, 돌더미(集石) 1기, 초기 철기 시대 집수정(集水井) 1기, 2구역에서 통일 신라 시대 유구를 확인하였다. 유적의 남쪽 앞산(해발 658.7m)과 청룡산(해발 793.1m)의 산자락이 북서쪽으로 내려오면서 펼쳐진 선상지의 선단(扇端)에 해당한다. 대천동 511-2 유적의 남쪽에 인접하여 청동기 시대 유적인 대천동 413 유적, 대천동 497 유적이 위치한다. 두 유적에서 조사된 2기의 도랑은 조사 대상지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서 방향으로 진행하여 유적들을 감싸고 있어 환호(環溝)로 추정된다. 즉, 세 유적은 환호의 북쪽에 위치한 하나의 마을로 생각된다.

집자리는 장방형, 원형이 주를 이루며, 방형도 일부 확인된다. 장방형쪽의 내부 시설로는 화덕 자리, 저장 구덩이, 기둥 구멍이 확인되었다. 기둥 구멍은 정형성이 없으며, 10·14호는 화덕 자리의 양 옆에 1개씩 배치되어 있고, 10·16호는 벽면 가장자리를 따라 기둥 구멍이 배치되었다. 10호에 의해 1/2 이상이 파괴된 16호를 제외한 모든 장방형 집자리에는 구덩식 화덕 자리가 있다. 방형 집자리는 가운데 또는 한쪽 벽으로 약간 치우쳐져 단면 ‘U’자 모양의 구덩식 화덕 자리를 모두 갖추고 있다. 바닥에는 기둥 구멍과 네 벽을 따라 20~30㎝정도 간격을 두고 기반층보다 단단하고 회색을 띤 다져진면(硬化面)이 확인되었다. 원형 집자리는 화덕 자리가 없고 대부분 가운데 길쭉한 원형의 구덩이 양쪽으로 기둥 구멍이 각각 1개씩 있다. 또 중앙 구덩이만 있는 것(7·13호), 중앙 구덩이 외 2개의 기둥 구멍을 갖춘 것(1·3·5·6·9·11호)이 있다. 집자리는 인근의 고인돌 A·B군과는 달리 비교적 평탄한 지역에 축조되었다. 집자리는 돌널무덤군의 서쪽, 북동쪽에 모든 형태가 위치하지만, 돌널무덤군의 남쪽에는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장방형 집자리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천동 467 유적의 집자리는 중앙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원형의 송국리식 집자리로 추정되며, 지름 2.8~3.95m, 깊이 0.1m이다.

돌널무덤은 단독묘(3기)와 A·B군으로 구분된다. A군(53기)은 유적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지역에 위치하고, B군(12기)은 A군 동쪽으로 50m 정도 떨어져 위치한다. 단독묘 1호는 B군의 동편 50m 정도 떨어져 있다. 무덤은 1.8m 이상의 대형, 1.8~0.9m 사이의 중형, 0.9m 이하의 소형으로 구분된다. 축조 방식은 냇돌(川石)만을 이용하여 누워쌓기(平積)한 석축형(石築形), 냇돌과 판돌을 섞은 혼축형(混築形), 판돌만을 이용한 돌상자무덤(石箱墓), 벽석을 쌓지 않고 굴착한 그대로 사용한 구덩이형(土壙形)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바닥 시설은 다양한 형식이 확인되었다. 바닥 굴착면을 그대로 사용한 것, 냇돌과 판돌 몇 매를 이용하여 무덤의 장축 방향과 직교되게 옆으로 같은 간격을 이루는 형태, 바닥 전체를 점판암(粘板岩)의 판돌을 이용한 것, 냇돌을 이용하여 바닥 전체를 깐 형태, 냇돌을 바닥 전면에 깐 후 그 위에 다시 30㎝ 정도 크기의 비교적 큰 깬돌(割石)을 깔아 놓은 혼합형 등이 있다. 뚜껑돌은 없는 것이 있고, 1~2겹, 3~4겹, 뚜껑돌이 2겹 이상이면서 무덤 구덩이(墓壙)아래에 위치한 것 등이 있다.

단독묘는 무덤간 50m 내외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조성되었는데 A·B군보다 해발고도가 약 2m 높다. A군은 무덤의 밀집도가 B군보다 높고 여러 매의 뚜껑돌이 있는 돌널무덤은 모두 A군에 있다. 출토 유물이나 무덤의 축조 양상에서 보아도 A군이 B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무덤으로 판단되어 집단 내 계서화(階序化)가 이루어졌던 사회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은 장방형 집자리에서 돋을띠무늬 토기(突帶文土器), 돌대팻날(片刃石斧), 방형 집자리에서는 반달 돌칼, 깊은 바리 토기(深鉢形土器), 원형 집자리에서는 슴베 간 돌화촉(有莖式石鏃), 손잡이 달린 바리(把手附鉢) 등이 확인되었다. 대천동 467 유적 집자리에서는 붉은 간 토기와 사용흔(使用痕)이 확인되는 대형의 숫돌砥石이 확인되어 집자리 내에서 석기 제작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돌널무덤에서는 붉은 간 토기, 홈 자루 간 돌검(二段柄式石劍), 슴베 간 돌화촉(有莖式石鏃)이 확인 되었다.

유적은 조사된 집자리의 중복 관계나 출토 유물로 볼 때 장방형→방형→원형의 순으로 시기차를 가진다. 또한, 방형 집자리 시기에 돌널 무덤군이 축조되기 시작하여 원형 집자리 단계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고 판단된다. 유적의 연대는 장방형 집자리인 10호 3030±50 BP(보정 연대 기원전 1270년), 16호 집자리 3000±50 BP(보정 연대 기원전 1230년)로 확인되었다.

원형 집자리 단계의 대천동 유적은 인접한 대천동 413·497 유적과 동일한 마을로, 둥근 도랑에 의해 일정 공간에 대규모 무덤 구역과 집자리가 함께 위치한다.

같은 시기 대구의 다른 마을과 무덤군은 마을 주변에 무덤군이 10여 기씩 무리를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천동 유적의 경우 조사된 무덤이 68기이며, 조사 경계 밖으로 무덤군이 확대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같은 시기로 추정되는 집자리는 12기로 한정되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 무덤군은 대천동 유적 원형 집자리 마을에만 국한되지 않고 주변 마을과 연계한 공동체 전체를 위한 무덤군일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회가 단순히 평면적이고 나열적인 구조가 아니라 좀 더 복잡한 사회 구조를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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