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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표제어=스얼타이잉쯔 유적 | |||
| 이칭별칭=십이대영자 유적(朝陽 十二臺營子遺蹟) | | 이칭별칭=십이대영자 유적(朝陽 十二臺營子遺蹟) | ||
| 시대=청동기 시대 | |||
| 위치=중국 | |||
| 소재지=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시(朝陽市) 차오양현(朝陽縣) 스얼타이잉쯔진(十二臺營子鎭) 스얼타이촌(十二臺村)의 남쪽 대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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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자는 피장자를 동호족으로 보았으며, 연대는 춘추 시대 후기나 전국 시대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피장자를 예맥족에 속하는 사람으로 판단하여 연대 역시 기원전 9~7세기경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외에 초기 고조선이 랴오시 지역 비파형동검 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될 가능성을 나타낸다. | 보고자는 피장자를 동호족으로 보았으며, 연대는 춘추 시대 후기나 전국 시대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피장자를 예맥족에 속하는 사람으로 판단하여 연대 역시 기원전 9~7세기경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외에 초기 고조선이 랴오시 지역 비파형동검 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될 가능성을 나타낸다. | ||
==참고문헌== | |||
* 中国社会科学院考古研究所. (1960). <i>朝阳十二台营子青铜短剑墓</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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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2일 (목) 12:29 기준 최신판
| 기본 정보 | |
|---|---|
| 동의어 | 십이대영자 유적(朝陽 十二臺營子遺蹟) |
| 시대 | 청동기 시대 |
| 국가 | 중국 |
| 소재지 |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시(朝陽市) 차오양현(朝陽縣) 스얼타이잉쯔진(十二臺營子鎭) 스얼타이촌(十二臺村)의 남쪽 대지 |
| 관련 정보 | |
| 성격 | 고분 |
| 키워드 | 돌덧널무덤, 비파형동검, 다뉴뇌문동경, 비파형동검 문화 |
| 사전 정보 | |
| 수록 사전 |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 집필 연도 | 2019 |
| 집필자 | 조진선 |
설명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시(朝陽市) 차오양현(朝陽縣) 스얼타이잉쯔진(十二臺營子鎭) 스얼타이촌(十二臺村)의 남쪽 대지에 위치한다. 스얼타이촌은 다링강(大凌河)과 바이산(柏山) 사이에 형성된 너비 2~3㎞의 대지에 입지한다. 다링강 주변은 넓은 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비파형동검 문화와 관련된 많은 유적들이 분포한다.
1958년 마을 주민이 용수로를 공사하던 중 비파형동검이 부장된 무덤들을 발견하여 둥베이박물관문물공작조(東北博物館文物工作組)가 조사하였다. 발견된 무덤은 3기이지만 1호만 조사되었고, 2·3호 무덤은 공사 중에 파괴되었다. 3기의 무덤은 모두 돌덧널무덤(石槨墓)으로 구조와 출토 유물이 비슷하다.
1호는 3기의 무덤 중 가장 동쪽에 있다. 돌덧널(石槨)은 지표 아래 2m 지점에서 확인되었고, 자연석과 강돌(川石)로 축조하였다. 바닥에는 강돌을 편평하게 깔았으며, 네 모서리 쪽에는 약간 큰 강돌을 놓았다. 바닥보다 7.5㎝ 높아서 주검 받침(屍床)의 나무판자(木板)를 지탱한 것으로 보인다. 동·남·북의 세 벽은 길이 0.3m, 두께 0.2m 정도의 돌을 6단 정도로 쌓았다. 서쪽은 너비 0.6m, 높이 0.7m, 두께 0.09m의 청석판을 세우고 빈틈은 강돌로 막았다. 뚜껑돌(蓋石)은 11개의 판돌(板石)을 두 겹으로 덮었다. 아래층은 길이 1.3m, 너비 1.1m, 두께 0.12m 정도의 판돌 3매로 돌덧널을 덮고 그 위에 그보다 작은 판돌을 덮었다. 돌덧널의 규모는 길이 1.8m, 너비 1m, 높이 1.2m이다. 내부에 머리 방향이 서쪽인 사람 뼈 2구가 확인되었다. 북쪽은 50세 정도의 남성, 남쪽은 40~50세의 여성으로 추정되어 부부 합장묘(夫婦合葬墓)로 판단된다. 사람 뼈는 약간 움직였지만 바로 펴묻기(仰身直肢葬)한 매장 당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주검은 나무판자와 갈대로 만든 삿자리에 놓여 있었다. 나무판자는 강돌이 깔린 무덤의 바닥석 위에 있었으며, 그 위에 다시 삿자리가 있고 시신은 삿자리 위에 안치되었다.
껴묻거리는 함몰토에서 발견된 석기 2점과 토기 2점, 바닥에서 수습된 석제 검파두식(劍把頭飾)을 제외하면 모두 청동기이다. 비파형 동검과 석제 검파두식이 각각 2점씩 출토되었다. 비파형동검 2점은 남성 뼈의 허리쯤에 있었고, 석제 검파두식은 남성 뼈의 왼쪽 어깨 쪽에서 출토되어 서로 약간 떨어져 있다. 동경(銅鏡) 2점은 남성 뼈의 머리와 발쪽에 세워져 있었다. 앞면 가장자리에는 대칭 삼각무늬와 대칭 ‘ᄂ’자 무늬가 조합을 이루어 표현되어 있고, 뒷면에는 뉴(鈕) 4개가 짝을 이루어 대칭되게 배치되어 있다. ‘Y’자 모양 동구(銅具) 1점은 남성 뼈의 오른쪽 어깨 쪽에서 출토되었으며, 말 얼굴 장식(當盧)으로 판단된다. 선형 동부(扇形銅斧) 1점은 남성 뼈의 오른쪽 다리 부분에서 출토되었다. 대칭 삼각무늬 같은 기하학문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촉 2점은 남성 뼈의 왼쪽 정강이뼈 근처에서 출토되었다. 동도(銅刀)는 2점이 출토되었는데, 1점은 돌덧널 동벽 상부에서 출토되었고, 다른 1점은 여성의 엉덩이 뼈 옆에서 출토되었다. 동착(銅鑿) 1점, 동추(銅錐) 3점, 인면형 동패(人面形銅牌) 6점, 수면형 동패(獸面形銅牌) 3점, 동어구(銅魚鉤) 3점, 청동 마표(靑銅馬鑣) 6점, 동구(銅扣) 6점, 청동 절약(靑銅節約) 12점, 관상 동식(管狀銅飾) 59점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밖에도 유공 지석(有孔砥石) 1점, 석제 어망추 1점 등의 석기류와 마노(瑪瑙)로 만든 옥장식품, 토제 방추차(紡錘車) 1점, 토기 편 등이 확인되었다.
2호 무덤은 정식으로 조사된 것은 아니지만 껴묻거리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1호 무덤과 남북으로 약 5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두 무덤이 평행하게 분포해서 2호 무덤의 서쪽 벽은 1호 무덤의 동쪽 벽과 직선을 이룬다. 돌덧널의 구조는 1호 무덤과 비슷하다. 돌덧널의 크기는 길이 약 2.3m, 너비 약 1m, 높이 0.7m이다. 내부에는 머리 방향이 서쪽인 사람 뼈 2구가 있었다.
껴묻거리에는 비파형동검과 석제 검파두식 각 2점, 동촉 14점, 동경 2점, 선형 동부 1점, 동도 1점, 말 얼굴 장식으로 판단되는 ‘Y’자 모양 동구 2점, 수레 고삐 걸개로 판단되는 ‘W’자 모양 쌍훼규결동구(雙虺糾結銅具) 1점, 청동 마표 5점, 장판상동구(長板狀銅具) 2점, 장관상동구(長管狀銅具) 5점, 십자형의 청동 절약 12점, 원형의 청동 절약 20점, 청동과구 7점, 동구 10점, 동추 1점 등이 있다.
3호 무덤은 2호 무덤에서 서쪽으로 약 10m 떨어져있다. 출토 유물에는 다뉴뇌문동경(多鈕雷文銅鏡) 1점과 석제 검파두식 1점이 남아 있다.
스얼타이잉쯔 유적에서는 비파형동검과 다뉴뇌문동경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전까지 확인된 다뉴뇌문동경은 대부분 수집품이었으며, 조사에서 출토된 것은 동반 관계를 알 수 없어 계통적인 연구를 진행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유적에서 비파형동검과 다뉴뇌문동경이 출토되어 비파형동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또한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의 선후 관계를 규명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무덤의 구조와 형식도 구체적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스얼타이잉쯔 문화의 무덤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하다. 유적에서 출토된 껴묻거리가 대부분 청동기라는 점에서 당시 청동기를 보편적으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청동기는 무기와 생산 용구뿐 아니라 생활 용구와 거마구로도 사용되었다.
보고자는 피장자를 동호족으로 보았으며, 연대는 춘추 시대 후기나 전국 시대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피장자를 예맥족에 속하는 사람으로 판단하여 연대 역시 기원전 9~7세기경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외에 초기 고조선이 랴오시 지역 비파형동검 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될 가능성을 나타낸다.
참고문헌
- 中国社会科学院考古研究所. (1960). 朝阳十二台营子青铜短剑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