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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정보 | {{유적정보 | ||
| 한글표제어=충효동 고인돌군 | |||
| 이칭별칭=광주 충효동 고인돌군 | | 이칭별칭=광주 충효동 고인돌군 | ||
| 시대=청동기 시대 | |||
| 위치=대한민국 | |||
| 소재지=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807-1 일원 | |||
| 성격=고인돌 | |||
| 키워드=[[고인돌]], [[간 돌살촉]], [[숫돌]], [[민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묘표석 고인돌]], [[덮개식 고인돌]] | | 키워드=[[고인돌]], [[간 돌살촉]], [[숫돌]], [[민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묘표석 고인돌]], [[덮개식 고인돌]] | ||
| |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
| 집필연도=2019 | | 집필연도=2019 | ||
| 집필자=이영문 | | 집필자=이영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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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은 [[간돌살촉|간 돌살촉]] 편 1점, [[숫돌|숫돌(砥石)]] 2점과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편,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편들로 매우 빈약한 편이다. 이중 민무늬 토기 편은 무덤방 바닥이 아니라 그 위에 쌓였던 점토층에서 출토되므로 무덤방을 만들고 뚜껑을 덮은 뒤 뚜껑 위에 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충효동 고인돌은 한쪽에 치우친 2호처럼 4매의 받침돌 위에 거대한 덮개돌이 올려진 [[묘표석고인돌|묘표석 고인돌]]과 무덤방이 있는 [[개석식고인돌|덮개식 고인돌]]이 공존한 대표적 사례이다. 2호 고인돌 하부구조만 전남대학교로 이전·복원되었고, 나머지는 고인돌 조사 후 댐 건설로 수몰되었지만 현재 식영정 건너 편 하천변에 줄지은 고인돌은 볼 수 있다. | 유물은 [[간돌살촉|간 돌살촉]] 편 1점, [[숫돌|숫돌(砥石)]] 2점과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편,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편들로 매우 빈약한 편이다. 이중 민무늬 토기 편은 무덤방 바닥이 아니라 그 위에 쌓였던 점토층에서 출토되므로 무덤방을 만들고 뚜껑을 덮은 뒤 뚜껑 위에 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충효동 고인돌은 한쪽에 치우친 2호처럼 4매의 받침돌 위에 거대한 덮개돌이 올려진 [[묘표석고인돌|묘표석 고인돌]]과 무덤방이 있는 [[개석식고인돌|덮개식 고인돌]]이 공존한 대표적 사례이다. 2호 고인돌 하부구조만 전남대학교로 이전·복원되었고, 나머지는 고인돌 조사 후 댐 건설로 수몰되었지만 현재 식영정 건너 편 하천변에 줄지은 고인돌은 볼 수 있다. | ||
==참고문헌== | |||
* 전남대학교박물관. (1979). <i>광주 송암동주거지·충효동지석묘</i>. https://www.riss.kr/link?id=M118914 | |||
[[분류:한국고고학사전]] | [[분류:한국고고학사전]] | ||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
2026년 4월 2일 (목) 12:26 기준 최신판
| 기본 정보 | |
|---|---|
| 동의어 | 광주 충효동 고인돌군 |
| 시대 | 청동기 시대 |
| 국가 | 대한민국 |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807-1 일원 |
| 관련 정보 | |
| 성격 | 고인돌 |
| 키워드 | 고인돌, 간 돌살촉, 숫돌, 민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묘표석 고인돌, 덮개식 고인돌 |
| 사전 정보 | |
| 수록 사전 |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 집필 연도 | 2019 |
| 집필자 | 이영문 |
설명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807-1 일원에 위치한다. 영산강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된 4개의 댐 중 광주댐 수몰 지구로 1977년에 7기 중 6기를 전남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다. 광주와 담양군 남면과 경계를 이루는 창계천 주변에 형성된 퇴적평지에 하천과 나란하게 7기가 동서 방향으로 열을 이루고 있었다.
고인돌은 대체로 동남 방향으로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덮개돌(上石)의 장축 방향은 그 아래 있는 무덤방(墓室)의 장축 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무덤방은 가장 긴 것이 1.7m이나, 대게 1m 내외이다. 축조 방법은 무덤 구덩이(墓壙)를 파고 그 주위에 강돌(川石)이나 깬돌(割石)로 만든 조잡한 돌덧널형(石槨形)이며 주위에 받침돌(支石)을 놓고 그 위에 덮개돌을 덮었다. 2호 무덤방은 받침돌 4매와 그 사이에 돌로 채운 돌 두름형(圍石形)인데, 그 주위에 납작한 돌을 깔아 원래 원형의 묘역시설(墓域施設)을 한 것으로 생각되나 4분의 1정도의 부채꼴 모양으로 남은 묘역만 확인되었다. 7호의 경우 하나의 덮개돌 아래 두 기의 무덤방을 둔 하부 구조가 나타나 주목된다. 피장자는 적어도 거의 동시에 죽은 부부이거나 이와 유사한 혈연 관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예로는 나주 판촌리 고인돌에서도 보이고 있고, 대구 진천동 고인돌에서도 모자(母子) 관계에 있는 무덤방이 한 덮개돌 아래 놓여 있어 당시의 고인돌 사회가 혈연 관계를 기반으로 한 사회이며, 고인돌의 축조 등의 경제·사회적 성격으로 보아 계급사회의 발생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물은 간 돌살촉 편 1점, 숫돌(砥石) 2점과 민무늬 토기 편, 붉은 간 토기 편들로 매우 빈약한 편이다. 이중 민무늬 토기 편은 무덤방 바닥이 아니라 그 위에 쌓였던 점토층에서 출토되므로 무덤방을 만들고 뚜껑을 덮은 뒤 뚜껑 위에 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충효동 고인돌은 한쪽에 치우친 2호처럼 4매의 받침돌 위에 거대한 덮개돌이 올려진 묘표석 고인돌과 무덤방이 있는 덮개식 고인돌이 공존한 대표적 사례이다. 2호 고인돌 하부구조만 전남대학교로 이전·복원되었고, 나머지는 고인돌 조사 후 댐 건설로 수몰되었지만 현재 식영정 건너 편 하천변에 줄지은 고인돌은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전남대학교박물관. (1979). 광주 송암동주거지·충효동지석묘. https://www.riss.kr/link?id=M118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