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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필연도=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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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덕천리 100에 위치한다. 군부대 예정지로 1992~1993년 구역을 나누어 조사하여, Ⅰ지구에서 [[고인돌|고인돌]] 5기, [[돌덧널무덤|돌덧널무덤(石槨墓)]] 13기, [[돌뚜껑움무덤|돌뚜껑움무덤(石蓋土壙墓)]] 5기, [[구덩이|구덩이]]  2기, Ⅱ지구에서 [[환호|환호(還壕)]] 1기가 확인되었다. 유구는 동서 90m, 남북 230m의 범위에 분포한다.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덕천리 100에 위치한다. 군부대 예정지로 1992~1993년 구역을 나누어 조사하여, Ⅰ지구에서 [[고인돌|고인돌]] 5기, [[돌덧널무덤|돌덧널무덤(石槨墓)]] 13기, [[돌뚜껑움무덤|돌뚜껑움무덤(石蓋土壙墓)]] 5기, [[구덩이|구덩이]]  2기, Ⅱ지구에서 [[환호|환호(還壕)]] 1기가 확인되었다. 유구는 동서 90m, 남북 230m의 범위에 분포한다.


고인돌은 남북 방향의 1열로 배치되어 있다. [[덮개돌|덮개돌(上石)]]로 보이는 [[괴석|괴석(塊石)]] 6개가 있었으나, 3개의 괴석 아래에서는 [[매장주체부|매장 주체부(埋葬主體部)]]가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덮개돌이나 [[묘광|무덤 구덩이(墓壙)]]의 규모에서 차이가 있으나, 단(段)을 지워 구덩이를 파고 그 아래에 돌덧널형의 [[무덤방|무덤방(墓室)]]을 축조한 점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고인돌은 [[뚜껑돌|뚜껑돌(蓋石)]]을 1겹 이상 덮고 뚜껑돌과 뚜껑돌 사이 또는 뚜껑돌 위에 [[돌무지|돌무지(積石)]]를 설치하고, 흙을 덮었다.
고인돌은 남북 방향의 1열로 배치되어 있다. [[덮개돌|덮개돌(上石)]]로 보이는 괴석(塊石) 6개가 있었으나, 3개의 괴석 아래에서는 [[매장주체부|매장 주체부(埋葬主體部)]]가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덮개돌이나 [[묘광|무덤 구덩이(墓壙)]]의 규모에서 차이가 있으나, 단(段)을 지워 구덩이를 파고 그 아래에 돌덧널형의 [[무덤방|무덤방(墓室)]]을 축조한 점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고인돌은 [[뚜껑돌|뚜껑돌(蓋石)]]을 1겹 이상 덮고 뚜껑돌과 뚜껑돌 사이 또는 뚜껑돌 위에 [[돌무지|돌무지(積石)]]를 설치하고, 흙을 덮었다.


1호 고인돌은 길이 8m, 너비 6m, 깊이 4.5m의 무덤 구덩이를 3단으로 파고, [[돌덧널|돌덧널]]을 설치하였다. 그 위에 5매의 뚜껑돌을 덮고 길이 30~50㎝의 돌을 쌓고 다시 12매의 뚜껑돌을 2겹으로 덮은 뒤 무덤 구덩이 어깨선까지 흙을 채웠다. 이후 흙을 봉토처럼 덮은 뒤 받침돌을 놓고 덮개돌을 올렸다. 무덤방은 길이 2.8m, 너비 0.8m, 깊이 1.2m이며, 바닥에는 [[판돌|판돌(板石)]]을 깔고 네 벽은 [[깬돌|깬돌(割石)]]으로 가로 쌓기(橫平積)하였다. 2􄞻5호의 매장 주체부는 1호와 유사하지만, 받침돌이 확인되지 않고 장축이 동서 방향으로 차이가 있다.
1호 고인돌은 길이 8m, 너비 6m, 깊이 4.5m의 무덤 구덩이를 3단으로 파고, [[돌덧널|돌덧널]]을 설치하였다. 그 위에 5매의 뚜껑돌을 덮고 길이 30~50㎝의 돌을 쌓고 다시 12매의 뚜껑돌을 2겹으로 덮은 뒤 무덤 구덩이 어깨선까지 흙을 채웠다. 이후 흙을 봉토처럼 덮은 뒤 받침돌을 놓고 덮개돌을 올렸다. 무덤방은 길이 2.8m, 너비 0.8m, 깊이 1.2m이며, 바닥에는 판돌(板石)을 깔고 네 벽은 깬돌(割石)으로 가로 쌓기(橫平積)하였다. 2􄞻5호의 매장 주체부는 1호와 유사하지만, 받침돌이 확인되지 않고 장축이 동서 방향으로 차이가 있다.


유물은 1호에서 [[슴베간돌살촉|슴베 간 돌살촉(有莖式磨製石鏃)]] 22점, [[대롱옥|대롱옥(管玉)]] 6점, 목제품 2점 등이 출토되었다. 보고자는 목제품을 통해 [[나무널|나무널(木棺)]]이 사용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2호에서는 대롱옥 165점,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1점과 칠편(漆片)이 출토되었고, 널로 사용된 나무 조각이 확인되었다. 이외에 돌덧널무덤, 돌뚜껑움무덤에서도 고인돌과 같은 시기의 붉은 간 토기 9점, [[자루간돌검|자루 간 돌검(有柄式磨製石劍)]] 3점, [[돌살촉|돌살촉]] 36점, [[돌끌|돌끌(石鑿)]] 1점, 재가공한 [[비파형동검|비파형동검]] 1점,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즉, 고인돌 및 무덤이 모두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유물은 1호에서 [[슴베간돌살촉|슴베 간 돌살촉(有莖式磨製石鏃)]] 22점, [[대롱옥|대롱옥(管玉)]] 6점, 목제품 2점 등이 출토되었다. 보고자는 목제품을 통해 [[나무널|나무널(木棺)]]이 사용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2호에서는 대롱옥 165점,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1점과 칠편(漆片)이 출토되었고, 널로 사용된 나무 조각이 확인되었다. 이외에 돌덧널무덤, 돌뚜껑움무덤에서도 고인돌과 같은 시기의 붉은 간 토기 9점, [[자루간돌검|자루 간 돌검(有柄式磨製石劍)]] 3점, [[돌살촉|돌살촉]] 36점, [[돌끌|돌끌(石鑿)]] 1점, 재가공한 [[비파형동검|비파형동검]] 1점,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즉, 고인돌 및 무덤이 모두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1호의 외곽을 둘러싸며 [[묘역|묘역(墓域)]]을 구획한 석축 시설이 확인된다. 석축은 남북 56.2m, 동서 17.5m로, 처음의 규모는 이보다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 석축은 [[치석|치석(治石)]]한 석재로 가로 쌓기를 하였는데, [[기단부|기단부(基壇部)]]의 최하단석은 앞으로 조금 튀어나와 있다. 환호는 고인돌에서 북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구릉과 골짜기에 위치한다. 단면은 ‘V’자 모양이며, 환호와 관련된 집자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구릉상에 입지하는 등 [[창원덕천리고인돌|덕천리 고인돌]] 집단과 관계된 생산 유적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1호의 외곽을 둘러싸며 [[묘역|묘역(墓域)]]을 구획한 석축 시설이 확인된다. 석축은 남북 56.2m, 동서 17.5m로, 처음의 규모는 이보다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 석축은 치석(治石)한 석재로 가로 쌓기를 하였는데, 기단부(基壇部)의 최하단석은 앞으로 조금 튀어나와 있다. 환호는 고인돌에서 북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구릉과 골짜기에 위치한다. 단면은 ‘V’자 모양이며, 환호와 관련된 집자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구릉상에 입지하는 등 [[창원덕천리고인돌|덕천리 고인돌]] 집단과 관계된 생산 유적일 가능성이 높다.
 
덕천리 고인돌은 독립적으로 구획된 대규모 묘역과 규모를 통해 [[피장자|피장자(被葬者)]]의 신분차를 나타내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고인돌 구조의 지역적 특이성과 함께 확인되는 석축의 축조 기술 및 나무널과 칠기가 확인되는 등 청동기 시대 무덤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1호 고인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 내부에서 다량의 민무늬 토기와 돌끌, 숫돌 등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장송의례|장송(葬送)과 관련된 의례(儀禮)]]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청동기 시대 송국리 문화 단계의 가장 늦은 시점에서 [[둥근덧띠토기|둥근 덧띠 토기(圓形粘土帶土器)]] 단계로 넘어가는 시기로 판단된다. 연대는 종래에 기원전 4~3세기로 추정되어 왔는데, 최근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치를 통해 둥근 덧띠 토기를 기원전 6~5세기로 올려보는 연구도 있어, 현재로서 어느 한 쪽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덕천리 고인돌은 독립적으로 구획된 대규모 묘역과 규모를 통해 [[피장자|피장자(被葬者)]]의 신분차를 나타내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고인돌 구조의 지역적 특이성과 함께 확인되는 석축의 축조 기술 및 나무널과 칠기가 확인되는 등 청동기 시대 무덤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1호 고인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 내부에서 다량의 민무늬 토기와 돌끌, 숫돌 등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장송의례|장송(葬送)과 관련된 의례(儀禮)]]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청동기 시대 [[송국리문화단계|송국리 문화 단계]]의 가장 늦은 시점에서 [[둥근덧띠토기단계|둥근 덧띠 토기(圓形粘土帶土器) 단계]]로 넘어가는 시기로 판단된다. 연대는 종래에 기원전 4~3세기로 추정되어 왔는데, 최근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치를 통해 둥근 덧띠 토기를 기원전 6~5세기로 올려보는 연구도 있어, 현재로서 어느 한 쪽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참고문헌==
* 경남대학교박물관. (2013). <i>덕천리</i>. https://www.riss.kr/link?id=M13194083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2026년 4월 2일 (목) 12:18 기준 최신판


덕천리 유적
기본 정보
동의어 창원 덕천리 유적
시대 청동기 시대
국가 대한민국
소재지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덕천리 100
관련 정보
성격 복합유적
키워드 고인돌, 돌덧널무덤, 돌뚜껑움무덤, 환호, 슴베 간 돌살촉, 대롱옥, 붉은 간 토기, 자루 간 돌검, 돌살촉, 돌끌, 비파형동검, 민무늬 토기, 둥근 덧띠 토기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19
집필자 이상길



설명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덕천리 100에 위치한다. 군부대 예정지로 1992~1993년 구역을 나누어 조사하여, Ⅰ지구에서 고인돌 5기, 돌덧널무덤(石槨墓) 13기, 돌뚜껑움무덤(石蓋土壙墓) 5기, 구덩이 2기, Ⅱ지구에서 환호(還壕) 1기가 확인되었다. 유구는 동서 90m, 남북 230m의 범위에 분포한다.

고인돌은 남북 방향의 1열로 배치되어 있다. 덮개돌(上石)로 보이는 괴석(塊石) 6개가 있었으나, 3개의 괴석 아래에서는 매장 주체부(埋葬主體部)가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덮개돌이나 무덤 구덩이(墓壙)의 규모에서 차이가 있으나, 단(段)을 지워 구덩이를 파고 그 아래에 돌덧널형의 무덤방(墓室)을 축조한 점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고인돌은 뚜껑돌(蓋石)을 1겹 이상 덮고 뚜껑돌과 뚜껑돌 사이 또는 뚜껑돌 위에 돌무지(積石)를 설치하고, 흙을 덮었다.

1호 고인돌은 길이 8m, 너비 6m, 깊이 4.5m의 무덤 구덩이를 3단으로 파고, 돌덧널을 설치하였다. 그 위에 5매의 뚜껑돌을 덮고 길이 30~50㎝의 돌을 쌓고 다시 12매의 뚜껑돌을 2겹으로 덮은 뒤 무덤 구덩이 어깨선까지 흙을 채웠다. 이후 흙을 봉토처럼 덮은 뒤 받침돌을 놓고 덮개돌을 올렸다. 무덤방은 길이 2.8m, 너비 0.8m, 깊이 1.2m이며, 바닥에는 판돌(板石)을 깔고 네 벽은 깬돌(割石)으로 가로 쌓기(橫平積)하였다. 2􄞻5호의 매장 주체부는 1호와 유사하지만, 받침돌이 확인되지 않고 장축이 동서 방향으로 차이가 있다.

유물은 1호에서 슴베 간 돌살촉(有莖式磨製石鏃) 22점, 대롱옥(管玉) 6점, 목제품 2점 등이 출토되었다. 보고자는 목제품을 통해 나무널(木棺)이 사용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2호에서는 대롱옥 165점, 붉은 간 토기 1점과 칠편(漆片)이 출토되었고, 널로 사용된 나무 조각이 확인되었다. 이외에 돌덧널무덤, 돌뚜껑움무덤에서도 고인돌과 같은 시기의 붉은 간 토기 9점, 자루 간 돌검(有柄式磨製石劍) 3점, 돌살촉 36점, 돌끌(石鑿) 1점, 재가공한 비파형동검 1점, 민무늬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즉, 고인돌 및 무덤이 모두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1호의 외곽을 둘러싸며 묘역(墓域)을 구획한 석축 시설이 확인된다. 석축은 남북 56.2m, 동서 17.5m로, 처음의 규모는 이보다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 석축은 치석(治石)한 석재로 가로 쌓기를 하였는데, 기단부(基壇部)의 최하단석은 앞으로 조금 튀어나와 있다. 환호는 고인돌에서 북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구릉과 골짜기에 위치한다. 단면은 ‘V’자 모양이며, 환호와 관련된 집자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구릉상에 입지하는 등 덕천리 고인돌 집단과 관계된 생산 유적일 가능성이 높다.

덕천리 고인돌은 독립적으로 구획된 대규모 묘역과 규모를 통해 피장자(被葬者)의 신분차를 나타내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고인돌 구조의 지역적 특이성과 함께 확인되는 석축의 축조 기술 및 나무널과 칠기가 확인되는 등 청동기 시대 무덤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1호 고인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 내부에서 다량의 민무늬 토기와 돌끌, 숫돌 등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장송(葬送)과 관련된 의례(儀禮)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청동기 시대 송국리 문화 단계의 가장 늦은 시점에서 둥근 덧띠 토기(圓形粘土帶土器) 단계로 넘어가는 시기로 판단된다. 연대는 종래에 기원전 4~3세기로 추정되어 왔는데, 최근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치를 통해 둥근 덧띠 토기를 기원전 6~5세기로 올려보는 연구도 있어, 현재로서 어느 한 쪽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