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0792: 두 판 사이의 차이
dkamaster 600-0792 자동 업로드 (entry_type=유적) |
편집 요약 없음 |
||
|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2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 2번째 줄: | 2번째 줄: | ||
{{유적정보 | {{유적정보 | ||
| 한글표제어=동천동 유적 | | 한글표제어=동천동 유적 | ||
| 이칭별칭=대구 동천동 유적 | | 이칭별칭=대구 동천동 유적 | ||
| 시대=청동기 시대 | | 시대=청동기 시대 | ||
| 17번째 줄: | 17번째 줄: | ||
대구광역시 북구 동천동 926-1 일원에 위치한다. 칠곡 3택지 개발에 앞서 1996년 영남문화재연구원이 시굴 조사하여 4개소에서 유적을 확인하여, 1·4구역은 영남문화재연구원, 2·3구역은 한국문화재재단이 조사하였다. 이 중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은 1구역으로 1997~1999년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은 금호강의 북쪽 지류인 팔계천(八溪川) 동쪽 충적지대에 입지하며, 남쪽으로 약 500m 떨어져 칠곡 택지2 유적이 위치한다. | 대구광역시 북구 동천동 926-1 일원에 위치한다. 칠곡 3택지 개발에 앞서 1996년 영남문화재연구원이 시굴 조사하여 4개소에서 유적을 확인하여, 1·4구역은 영남문화재연구원, 2·3구역은 한국문화재재단이 조사하였다. 이 중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은 1구역으로 1997~1999년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은 금호강의 북쪽 지류인 팔계천(八溪川) 동쪽 충적지대에 입지하며, 남쪽으로 약 500m 떨어져 칠곡 택지2 유적이 위치한다. | ||
칠곡 택지2 | '''칠곡 택지2 유적'''에서는 [[집자리|집자리]] 4기가 조사되었다. 모두 장방형이며 4호는 길이 10m, 너비 3.8m이며, 바닥 가운데 두 개의 [[기둥구멍|기둥 구멍]] 사이에 작은 납작 깬돌(割石)로 방형의 [[돌두름식화덕자리|돌 두름식(圍石式) 화덕 자리]]를 설치하였다. 동쪽 모서리 부분에는 ‘ㄴ’자 모양의 얕게 판 [[돌두름식화덕자리|돌 두름식(圍石式) 화덕 자리]]이 있으며 사다리꼴(梯形) [[반달돌칼|반달 돌칼]], 소형 [[돌대팻날|돌대팻날(扁平片刃石斧)]] 등이 출토되었다. 4호와 7m 거리 내에 있는 다른 집자리는 화덕이 없고 면적도 상대적으로 적어 4호와 관련된 집자리로 판단된다. 출토 유물은 [[홈자귀|홈자귀(有溝石斧)]], 돌대팻날,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등이 있다. | ||
칠곡 3택지 | '''칠곡 3택지 유적'''은 집자리 60기, [[고상가옥|고상 가옥(高床家屋)]] 20기,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6기, [[우물|우물(井)]] 4기, [[구덩이|구덩이(竪穴)]], [[야외노지|야외 화덕 자리(野外爐址)]], 집수장(集水場) 2기, 구획된 경작지, [[환호|환호]] 등 200여 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 ||
집자리의 경우, 47기는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으로 원형, 말각방형이며, 3호(원형)은 길이 3.75m, 너비 3.35m, 깊이 0.43m이고, 8호(말각 방형)는 길이 3.6m, 너비 3.25m, 깊이 0.43m이다. 바닥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와 그 양 끝 바깥쪽에 기둥 구멍이 있는 형태, 타원형 구덩이가 없는 형태, 타원형 구덩이만 있는 형태, 타원형 구덩이가 기둥 구멍보다 작은 형태 등 다양하다. 집자리들은 중앙 구덩이와 기둥 구멍과의 연결선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시기적인 차이는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나머지 13기의 집자리는 장방형과 방형으로, 50호(장방형)는 길이 3.1m, 너비 7.25m, 깊이 0.15m이고 38호(방형)는 길이 4.4m, 너비 3.2m, 깊이 0.25m이다. 화덕을 갖추고 있으며 중복 관계로 보아 송국리식 집자리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이다. | 집자리의 경우, 47기는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으로 원형, 말각방형이며, 3호(원형)은 길이 3.75m, 너비 3.35m, 깊이 0.43m이고, 8호(말각 방형)는 길이 3.6m, 너비 3.25m, 깊이 0.43m이다. 바닥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와 그 양 끝 바깥쪽에 기둥 구멍이 있는 형태, 타원형 구덩이가 없는 형태, 타원형 구덩이만 있는 형태, 타원형 구덩이가 기둥 구멍보다 작은 형태 등 다양하다. 집자리들은 중앙 구덩이와 기둥 구멍과의 연결선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시기적인 차이는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나머지 13기의 집자리는 장방형과 방형으로, 50호(장방형)는 길이 3.1m, 너비 7.25m, 깊이 0.15m이고 38호(방형)는 길이 4.4m, 너비 3.2m, 깊이 0.25m이다. 화덕을 갖추고 있으며 중복 관계로 보아 송국리식 집자리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이다. | ||
| 32번째 줄: | 32번째 줄: | ||
유적은 칠곡 분지 일대에서는 가장 큰 [[거점취락|거점취락(據點聚落)]]으로, 밀집된 집자리와 고상 가옥 외곽으로 우물과 제사 시설, 돌널무덤 등의 2차적 주거 시설들을 만들고, 그 외곽에 다시 경작지나 환호로서 마을의 경계를 삼는 등 당시 마을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유적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통해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 집자리]]인 20호는 2570±40 BP(보정 연대 기원전 790년), 50호(장방형)가 2650±200 BP(보정 연대 기원전 800년)라는 결과를 얻었다. | 유적은 칠곡 분지 일대에서는 가장 큰 [[거점취락|거점취락(據點聚落)]]으로, 밀집된 집자리와 고상 가옥 외곽으로 우물과 제사 시설, 돌널무덤 등의 2차적 주거 시설들을 만들고, 그 외곽에 다시 경작지나 환호로서 마을의 경계를 삼는 등 당시 마을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유적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통해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 집자리]]인 20호는 2570±40 BP(보정 연대 기원전 790년), 50호(장방형)가 2650±200 BP(보정 연대 기원전 800년)라는 결과를 얻었다. | ||
==조사정보== | |||
{|class="listtable" | |||
! class="col-type"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 | |||
|- | |||
| 지표조사 || 1991년 || 칠곡택지(2)지구 문화유적기초조사보고서 || 1993 || | |||
|- | |||
| 시굴조사 || 1993년~1994년 || 대구 칠곡 3택지개발지구 문화재 시굴조사 보고서 || 2001 || 영남문화재연구원 | |||
|- | |||
| 발굴조사 || 1997년 7월 10일 ~ 1999년 2월 28일 || 대구 동천동 취락유적 || 2002 || 영남문화재연구원 | |||
|} | |||
==참고문헌== | |||
* 대구시사편찬위원회. (1995). 청동기시대. <i>대구시사</i>. https://www.riss.kr/link?id=M11708053 | |||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2). <i>대구 동천동 취락유적</i>. https://www.riss.kr/link?id=M13495122 | |||
[[분류:한국고고학사전]] | [[분류:한국고고학사전]] | ||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
2026년 5월 4일 (월) 16:48 기준 최신판
| 기본 정보 | |
|---|---|
| 동의어 | 대구 동천동 유적 |
| 시대 | 청동기 시대 |
| 국가 | 대한민국 |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북구 동천동 926-1 일원 |
| 관련 정보 | |
| 성격 | 복합유적 |
| 키워드 | 집자리, 돌대팻날, 붉은 간 토기, 바리 토기, 거점취락, 환호, 도랑, 송국리식 집자리 |
| 사전 정보 | |
| 수록 사전 |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 집필 연도 | 2019 |
| 집필자 | 유병록 |
설명
대구광역시 북구 동천동 926-1 일원에 위치한다. 칠곡 3택지 개발에 앞서 1996년 영남문화재연구원이 시굴 조사하여 4개소에서 유적을 확인하여, 1·4구역은 영남문화재연구원, 2·3구역은 한국문화재재단이 조사하였다. 이 중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은 1구역으로 1997~1999년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은 금호강의 북쪽 지류인 팔계천(八溪川) 동쪽 충적지대에 입지하며, 남쪽으로 약 500m 떨어져 칠곡 택지2 유적이 위치한다.
칠곡 택지2 유적에서는 집자리 4기가 조사되었다. 모두 장방형이며 4호는 길이 10m, 너비 3.8m이며, 바닥 가운데 두 개의 기둥 구멍 사이에 작은 납작 깬돌(割石)로 방형의 돌 두름식(圍石式) 화덕 자리를 설치하였다. 동쪽 모서리 부분에는 ‘ㄴ’자 모양의 얕게 판 돌 두름식(圍石式) 화덕 자리이 있으며 사다리꼴(梯形) 반달 돌칼, 소형 돌대팻날(扁平片刃石斧) 등이 출토되었다. 4호와 7m 거리 내에 있는 다른 집자리는 화덕이 없고 면적도 상대적으로 적어 4호와 관련된 집자리로 판단된다. 출토 유물은 홈자귀(有溝石斧), 돌대팻날, 붉은 간 토기 등이 있다.
칠곡 3택지 유적은 집자리 60기, 고상 가옥(高床家屋) 20기, 돌널무덤(石棺墓) 6기, 우물(井) 4기, 구덩이(竪穴), 야외 화덕 자리(野外爐址), 집수장(集水場) 2기, 구획된 경작지, 환호 등 200여 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집자리의 경우, 47기는 송국리식으로 원형, 말각방형이며, 3호(원형)은 길이 3.75m, 너비 3.35m, 깊이 0.43m이고, 8호(말각 방형)는 길이 3.6m, 너비 3.25m, 깊이 0.43m이다. 바닥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와 그 양 끝 바깥쪽에 기둥 구멍이 있는 형태, 타원형 구덩이가 없는 형태, 타원형 구덩이만 있는 형태, 타원형 구덩이가 기둥 구멍보다 작은 형태 등 다양하다. 집자리들은 중앙 구덩이와 기둥 구멍과의 연결선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시기적인 차이는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나머지 13기의 집자리는 장방형과 방형으로, 50호(장방형)는 길이 3.1m, 너비 7.25m, 깊이 0.15m이고 38호(방형)는 길이 4.4m, 너비 3.2m, 깊이 0.25m이다. 화덕을 갖추고 있으며 중복 관계로 보아 송국리식 집자리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이다.
기둥 건물터는 규모가 최고 10칸×2칸에서 최소 1×1칸까지 다양하여 그 기능에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은 바리 토기(鉢形土器), 붉은 간 토기, 짧은 배 모양(短舟形), 사다리꼴(梯形) 반달 돌칼, 홈자귀, 슴베 간 돌살촉(有莖式磨製石鏃)등이 있다.
구덩이는 가장 많은 수가 조사되었는데 기능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평면 형태나 내부 상태로 보아 움무덤(土壙墓)으로 추정되는 16기, 내부에 화덕 자리를 가진 것 5기, 불탄 흙이나 목탄이 집중된 야외 화덕 자리형이 8기, 제의(祭儀)적인 성격으로 보이는 것 11기, 작업 시설로 보이는 것 4기 등이 있는데 각기 성격에 따라 그 분포 양상에서도 차이가 있다. 특히 물 모으는 시설 주변에 입지한 3호나 옛 하천변의 4·9·10호는 그 형태의 특이성이나 입지상으로 보아 수변 제사(水邊祭祀) 시설로 추정된다. 그 외에 석기 제작장의 1호나 폐기장(廢棄場)으로 판단되는 5호에서는 토기류와 석기류 등의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우물은 2기씩이 짝을 이루어 4기가 조사되었는데 돌로 쌓아 돌린 형태로 단면은 아래가 좁고 위쪽으로 벌어지는 깔때기 형태를 하고 있다. 돌더미 대부분도 물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돌널무덤은 집자리 분포 지역을 둘러싸고 남쪽과 동쪽에서 6기가 확인된다. 가장 큰 2호의 경우 대형의 납작 깬돌 4장으로 길이 0.9m, 너비 0.4m의 돌널을 만들고 다시 그 주변으로 돌덧널(石槨)을 돌렸는데 그 사이에 붉은 간 토기를 껴묻기(副葬)하기도 하였다. 돌널무덤은 장축 방향이나 축조 방식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 마을의 주거 구역을 의식하여 그 외곽에 만들었을 것이다.
주거 구역의 남쪽으로는 경작지를 구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방형, 장방형, 부정형 등으로 구획된 도랑(溝)가 넓게 펼쳐지고, 서쪽으로는 너비 250m, 잔존 깊이 0.7m인 환호가 남북으로 조성되어 있어 주거 구역을 감싸고 있다. 구획된 도랑의 남쪽으로는 다시 문화층이 낮아지면서 물을 모아 다시 내보내는 시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변에 당시 논(水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은 칠곡 분지 일대에서는 가장 큰 거점취락(據點聚落)으로, 밀집된 집자리와 고상 가옥 외곽으로 우물과 제사 시설, 돌널무덤 등의 2차적 주거 시설들을 만들고, 그 외곽에 다시 경작지나 환호로서 마을의 경계를 삼는 등 당시 마을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유적의 연대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통해 송국리식 집자리인 20호는 2570±40 BP(보정 연대 기원전 790년), 50호(장방형)가 2650±200 BP(보정 연대 기원전 800년)라는 결과를 얻었다.
조사정보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 |
|---|---|---|---|---|
| 지표조사 | 1991년 | 칠곡택지(2)지구 문화유적기초조사보고서 | 1993 | |
| 시굴조사 | 1993년~1994년 | 대구 칠곡 3택지개발지구 문화재 시굴조사 보고서 | 2001 | 영남문화재연구원 |
| 발굴조사 | 1997년 7월 10일 ~ 1999년 2월 28일 | 대구 동천동 취락유적 | 2002 | 영남문화재연구원 |
참고문헌
- 대구시사편찬위원회. (1995). 청동기시대. 대구시사. https://www.riss.kr/link?id=M11708053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2). 대구 동천동 취락유적. https://www.riss.kr/link?id=M13495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