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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지역에서 확인되는 야요이(계) 토기는 [[김해내동고인돌군|내동 고인돌]], [[김해봉황동유적|회현리 조개더미(貝塚)]], [[김해흥동유적|흥동 유적]] 등으로 출토량은 적으나 다수에서 확인되고 있다. 국제 교류의 거점으로 알려진 [[사천늑도동유적|사천 늑도 유적]]의 경우 야요이 토기는 전체 토기의 10% 정도이다. 이에 비해 구산동 유적에서는 야요이계 토기의 비중이 90% 이상으로 독특한 현상을 보인다. 즉, 유적은 [[부산동래내성유적|동래 내성 유적]]처럼 규슈 지역 야요이인 계열의 집단이 거주한 마을로 판단되며, 남해안 일대 국제 교류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벽에 붙은 화덕 자리와 바닥의 난방 시설인 도랑(혹은 고래)은 [[야요이문화|야요이 문화]]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중국 동북 지역의 [[공주툰유적|신민(新民) 공주툰(公主屯) 유적]] 등에서 확인된다. 즉, 구산동 유적은 일본과 중국 동북 지역과의 관련성이 모두 확인되어 둥근 덧띠 토기 문화 내 한반도 동남부 지역의 특색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김해 지역에서 확인되는 야요이(계) 토기는 [[김해내동고인돌군|내동 고인돌]], [[김해봉황동유적|회현리 조개더미(貝塚)]], [[김해흥동유적|흥동 유적]] 등으로 출토량은 적으나 다수에서 확인되고 있다. 국제 교류의 거점으로 알려진 [[사천늑도동유적|사천 늑도 유적]]의 경우 야요이 토기는 전체 토기의 10% 정도이다. 이에 비해 구산동 유적에서는 야요이계 토기의 비중이 90% 이상으로 독특한 현상을 보인다. 즉, 유적은 [[부산동래내성유적|동래 내성 유적]]처럼 규슈 지역 야요이인 계열의 집단이 거주한 마을로 판단되며, 남해안 일대 국제 교류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벽에 붙은 화덕 자리와 바닥의 난방 시설인 도랑(혹은 고래)은 [[야요이문화|야요이 문화]]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중국 동북 지역의 [[공주툰유적|신민(新民) 공주툰(公主屯) 유적]] 등에서 확인된다. 즉, 구산동 유적은 일본과 중국 동북 지역과의 관련성이 모두 확인되어 둥근 덧띠 토기 문화 내 한반도 동남부 지역의 특색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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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경남고고학연구소. (2010). <i>김해 구산동 유적 Ⅸ·Ⅹ</i>.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2026년 4월 2일 (목) 12:17 기준 최신판


구산동 1077 유적
기본 정보
동의어 김해 구산동 1077 유적, 김해 구산동 유적Ⅸ
시대 청동기 시대
국가 대한민국
소재지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1077 일대
관련 정보
성격 복합유적
키워드 집자리, 기둥 건물터, 돌널무덤, 돌뚜껑움무덤, 널무덤, 고인돌, 야요이계 토기, 묘역식 고인돌, 송국리식 집자리, 죠노코시식 토기, 스구Ⅰ식 토기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19
집필자 배진성



설명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1077 일대에 위치한다. 김해 구산 지구 도시 개발 사업에 앞서 2006~2008년 조사하여, 집자리 91기, 기둥 건물터(高狀建物址) 2기, 구덩이 28기, 도랑(溝) 2기, 돌널무덤(石棺墓) 8기, 돌뚜껑움무덤(石蓋土壙墓) 2기, 널무덤(木棺墓) 1기, 고인돌 1기가 조사되었다. 유적은 김해 읍성의 외곽이며 북쪽으로 길게 나 있는 계곡부의 입구에 해당한다.

집자리는 구릉의 높은 곳에서 낮은 곳까지 분포하며, 장방형이 가장 많고, 방형, 세장방형, 타원형도 일부 있다. 화덕 자리는 바닥면을 얕게 판 형태이며 벽에 연접하거나 벽선 바깥으로 돌출되어 있다. 화덕 자리 내에는 불탄 면이 전체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부분적으로 원형으로 확인되는 점에서 원통의 관(管)과 같은 구조물이 삽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에는 여러 갈래와 구획을 이루는 도랑이 형성되어 있는데, 온돌의 고래와 같은 것으로 난방을 위한 시설이 설치된 흔적으로 추정된다. 장방형 집자리에는 한쪽 모서리에 맨 땅을 깎아 계단을 만든 것(122·131·211·1623호), 계단면에 회색 점토가 깔린 것(1297호), 계단은 없지만 회색 점토 면이 있는 것(73·1799·2363호)이 확인되어 출입구가 마련되었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798호에는 벽선 바깥에서 계단이 확인되었다. 반면, 방형 집자리에는 출입 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 또 내부에서는 깬돌(割石)이 다량으로 확인되는 경우가 많아 흙과 깬돌을 섞어서 축조한 벽체가 무너진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석괴(自然石塊)가 벽면을 따라 위치한 경우도 있는데, 이는 집자리를 축조할 때 이것을 벽체의 일부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의 집자리에서 기둥 구멍이 보이지 않는 점은 기둥이 아닌 이러한 벽체가 지붕을 지탱하였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기둥 건물터는 세장방형은 2×1칸으로 길이 3.6m, 너비 1.2m, 방형은 1×1칸, 길이·너비 3.5m이다. 구덩이는 말각 방형, 장방형, 원형, 타원형, 부정형 등으로 일률적이지 않고 규모도 다양하다. 도랑은 구릉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등고선에 직교하며, 다른 유구와의 중복 관계로 보아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장기간 존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자리와 구덩이 등에서 출토된 유물은 각종의 야요이계 토기(彌生系土器)를 비롯하여 덧띠 토기(粘土帶土器), 굽다리 토기(豆形土器), 토기 뚜껑(蓋), 쇠뿔 손잡이(牛角形把手), 간 돌살촉(石鏃), 반달 돌칼, 돌낫(石鎌), 돌대팻날(扁平片刃石斧), 미완성 석기, 가락바퀴, 역석(礫石), 숫돌(砥石), 주조 철부(鑄造鐵斧), 쇠칼(鐵刀), 철판(鐵板) 등이 있다. 수량은 토기가 가장 많으며, 그 중에서 대부분이 야요이계 토기로 야요이 시대 전기 후반~중기 전반에 속하며 덧띠 토기와 공반된다. 토기는 바닥과 몸통(胴體部)을 각각 따로 만들어 어느정도 건조시킨 후 결합하였던 흔적이 관찰된다. 반달 돌칼과 돌낫은 송국리 단계의 것에 비해 두께가 매우 얇다.

무덤은 1단 무덤 구덩이(墓壙)와 2단 무덤 구덩이가 모두 확인되며, 뚜껑돌(蓋石)은 한 매의 큰 판돌(板石)을 이용한 것도 있고, 이중으로 덮고 그 위에 깬돌이나 암반석으로 채운 것도 있다. 바닥에는 판돌 또는 깬돌을 깐 것과 암반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있으며, 벽석과 무덤 구덩이 사이에는 돌과 흙으로 채웠다. 유물 중 붉은 간 토기 항아리는 긴 벽과 짧은 벽 사이의 모서리, 긴 벽 중앙의 바닥 부근, 충전석 옆에서 출토되었다. 간 돌칼, 슴베 간 돌살촉(有莖式磨製石鏃), 둥근옥(丸玉)은 긴 벽 쪽에서 출토되었다.

고인돌은 덮개돌(上石) 주위에 넓은 묘역이 있는 이른바 ‘구획묘(區劃墓)’ 혹은 ‘묘역식(墓域式) 고인돌’로 불리는 것이다. 덮개돌은 길이 10m, 너비 4.5m, 높이 3.5m, 무게 약 350톤이다. 덮개돌의 이동 자체에 어려움이 많고 파손의 위험도 높아서 그 위치에 그대로 보존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아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매장 주체부에 대한 조사는 진행되지 못하였다. 묘역은 남북 방향으로 세장방형이며, 확인된 규모는 길이 85m 이상, 너비 19m이다. 후대의 유실과 한정된 조사구역으로 인해 남북쪽 묘역의 끝은 확인되지 않았다. 남아있는 상태가 좋은 서쪽의 구획석은 1~4단 정도 남아있으며, 동쪽의 구획석은 상대적으로 파괴가 심한 편이다. 구획석 안쪽에 깔린 부석(敷石)은 납작한 깬돌을 이용하여 1벌 정도 깔렸으며, 상당 부분 파괴되었지만 원래는 묘역 전체에 깔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덮개돌 주위는 다른 곳보다 더 치밀하게 깔렸고, 덮개돌에서 멀어질수록 다소 무질서하게 깔았다. 묘역의 동쪽과 남쪽은 북쪽과 서쪽에 비해 저지대로 돌을 2~3중으로 쌓아서 높이를 맞추었다. 서쪽 구획석 바깥에서는 너비 2m 내외의 도랑이 확인되었다.

고인돌의 묘역 아래에서는 송국리식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대형의 묘역 시설이 있는 고인돌의 하한(下限)이 둥근 덧띠 토기 단계까지 내려간다는 연구도 있는 점을 고려하면, 구산동 고인돌 역시 동일할 가능성이 있다.

집자리의 시기는 86기가 덧띠 토기 단계에 해당한다. 송국리 단계는 5기 뿐이며 그 가운데 송국리식 집자리의 특징을 보이는 것은 3기이다. 집자리의 분포는 자연도랑을 경계로 위쪽(A1-가구역)은 대부분 장방형 집자리, 아래쪽(A1-나구역)은 방형 집자리가 분포한다. 중복 관계에서 방형이 장방형을 파괴한 예가 많고, A1-가구역에 야요이 시대 이른 시기의 죠노코시식 토기(城ノ越式土器), A1-나구역에는 이보다는 늦은 스구Ⅰ식 토기(須玖Ⅰ式土器)가 집중하는 경향을 통해 분포상의 차이는 시간 차이를 반영한다고 판단된다. 야요이계 토기가 출토된 집자리(321호)의 방사성 탄소 연대는 2460±50 BP(보정 연대 기원전 590년), 송국리식 집자리(A2-2호)는 2590±50 BP(보정 연대 기원전 790~620년)로 확인되었다.

김해 지역에서 확인되는 야요이(계) 토기는 내동 고인돌, 회현리 조개더미(貝塚), 흥동 유적 등으로 출토량은 적으나 다수에서 확인되고 있다. 국제 교류의 거점으로 알려진 사천 늑도 유적의 경우 야요이 토기는 전체 토기의 10% 정도이다. 이에 비해 구산동 유적에서는 야요이계 토기의 비중이 90% 이상으로 독특한 현상을 보인다. 즉, 유적은 동래 내성 유적처럼 규슈 지역 야요이인 계열의 집단이 거주한 마을로 판단되며, 남해안 일대 국제 교류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벽에 붙은 화덕 자리와 바닥의 난방 시설인 도랑(혹은 고래)은 야요이 문화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중국 동북 지역의 신민(新民) 공주툰(公主屯) 유적 등에서 확인된다. 즉, 구산동 유적은 일본과 중국 동북 지역과의 관련성이 모두 확인되어 둥근 덧띠 토기 문화 내 한반도 동남부 지역의 특색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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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경남고고학연구소. (2010). 김해 구산동 유적 Ⅸ·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