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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홍성 신경리 자경동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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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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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필연도=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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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필자=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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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자리의 형태와 내부 구조, 그리고 지역·지점별로 집자리 내부에서 채취한 시료 분석(Ⅱ-B: 1·2·4·6호, Ⅱ-C: 2~5·9·13·15·16호, Ⅲ-A: 1~3호, Ⅲ-C: 1·4호)에 의한 연대 측정 결과로 볼 때, 신경리 자경동 유적은 청동기 시대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집자리의 형태와 내부 구조, 그리고 지역·지점별로 집자리 내부에서 채취한 시료 분석(Ⅱ-B: 1·2·4·6호, Ⅱ-C: 2~5·9·13·15·16호, Ⅲ-A: 1~3호, Ⅲ-C: 1·4호)에 의한 연대 측정 결과로 볼 때, 신경리 자경동 유적은 청동기 시대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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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백제문화재연구원. (2012). <i>홍성 신경리 자경동 유적</i>.  https://www.riss.kr/link?id=M14897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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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2026년 4월 2일 (목) 12:22 기준 최신판


신경리 자경동 유적
기본 정보
동의어 홍성 신경리 자경동 유적
시대 청동기 시대
국가 대한민국
소재지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 신경리 945 일원
관련 정보
성격 복합유적
키워드 집자리, 저장 구덩이, 구덩이, 역삼동 유형, 흔암리 유형, 송국리 유형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19
집필자 이창호



설명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 신경리 945 일원에 위치한다. 2010년 충남도청 이전 신도시(3구역 1~4지점) 조성에 앞서 발굴 조사되었다. 청동기 시대 집자리 49기, 저장 구덩이 5기와 삼국~조선 시대에 이르는 생활 유적과 무덤 등 394기가 조사되었다. 유적은 해발 50~60m 정도의 구릉성 산지에 자리한다.

집자리는 정상부에서 사면 중·하단부에 이르기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다. 집자리는 ‘역삼동·흔암리 유형’과 ‘송국리 유형’으로 구분된다. 50기 중 43기는 역삼동·흔암리 유형이며, 나머지 7기는 송국리 유형이다. 역삼동·흔암리 유형은 대부분 등고선과 평행하며, 평면 형태는 장방형·세장방형이다. 면적은 소형에서 대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내부 시설을 살펴보면, 벽 도랑, 화덕 자리, 저장 구덩이, 기둥 구멍 등의 시설이 있다. 벽 도랑은 주로 지형이 높은 쪽의 벽면에서 확인되는데 내부에는 기둥 구멍 흔적이 있어 벽 도랑을 따라 벽체 또는 기둥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화덕 자리는 대체로 무시설식으로 중앙과 한 쪽에 치우쳐 1~2개 정도 설치되어 있다. 강한 소결흔이 남아 있어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저장 구덩이는 대개 벽면과 접하여 1~8개 이내로 확인되었는데 집자리의 규모와 성격에 따라 수량의 차이가 있다. 평면은 대개 원형이고 단면은 완만한 ‘∪’자 모양이 많다. Ⅲ-A-1호는 내부에 토기를 안치하여 사용하였다. 바닥 면은 대개 생토면을 그대로 사용하였지만 일부에서는 점토를 깔아 다지거나 불로 다져 바닥을 견고하게 조성한 것도 확인된다.

다음으로 송국리식 집자리는 모두 7기로 방형계(Ⅱ-B: 7·8호, Ⅲ-C: 2호)와 원형계(Ⅱ-B: 1·2호, Ⅱ-B 수습 1호, Ⅲ-C: 수습 1호)로 구분된다. 역삼동·흔암리 유형 집자리와 혼재하며 분포한다. 타원형 구덩이 내부에 기둥 구멍이 2개씩 배치된 것과 타원형 구덩이 외곽 4곳에 2개씩의 기둥 구멍이 있는 구조가 확인된다.

구덩이는 Ⅱ-C지점에서 2기만이 확인되었다. 1기는 평면 원형으로 내부에 단을 두어 민무늬 토기를 올려 두었다. 나머지 1기는 Ⅱ-C지점 16호 집자리가 폐기된 이후에 조성되었다.

출토 유물은 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 골아가리 토기(口脣刻目土器), 검은 간 긴 목 항아리(黑陶長頸壺), 깊은 바리 토기(深鉢形土器), 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 대형의 독 모양 토기(甕形土器) 등 다양한 생활 용기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직물과 관련한 토·석제 가락바퀴가 소량 확인되었으며, 곡식 수확구로 사용한 반달 돌칼, 목재 가공용 또는 수렵용으로 활용될 수 있는 돌도끼(石斧), 돌살촉(石鏃) 등 다양한 형태의 석기류가 출토되었다.

집자리의 형태와 내부 구조, 그리고 지역·지점별로 집자리 내부에서 채취한 시료 분석(Ⅱ-B: 1·2·4·6호, Ⅱ-C: 2~5·9·13·15·16호, Ⅲ-A: 1~3호, Ⅲ-C: 1·4호)에 의한 연대 측정 결과로 볼 때, 신경리 자경동 유적은 청동기 시대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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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