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600-1118: 두 판 사이의 차이

한국고고학사전
dkamaster 600-1118 자동 업로드 (entry_type=유적)
dkamaster 600-1118 자동 업로드 (entry_type=유적)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하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2번째 줄: 2번째 줄:


{{유적정보
{{유적정보
| 한글표제어=백석동 유적(天安 白石洞遺蹟)
| 한글표제어=백석동 유적
| 이칭별칭=천안 백석동 유적
| 이칭별칭=천안 백석동 유적
| 시대=청동기 시대
| 시대=청동기 시대
48번째 줄: 48번째 줄:


백석동 일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다른 지역에 비해 취락이 입지하는데 최적의 장소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해발이 높은 곳으로 주변 일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시야가 확보되어 비상시 적으로부터 방어에 유리하다. 둘째, 취락 배후에 천안천 유역의 북쪽 분수계(分水界)가 있어 겨울철 한풍(寒風)의 영향을 덜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지리적 이점으로 인하여 백석동 일원의 유적들은 청동기 시대 취락 유구 중 최대 규모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며 청동기 시대 대규모 취락의 생활상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특히 불탄 집자리에서 출토된 콩이나 기장 등의 곡물과 토기 바닥면에 남아 있는 볍씨 자국, 그리고 돌칼(石刀)과 같은 농기구를 통해 활발한 농경 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고 있어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백석동 일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다른 지역에 비해 취락이 입지하는데 최적의 장소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해발이 높은 곳으로 주변 일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시야가 확보되어 비상시 적으로부터 방어에 유리하다. 둘째, 취락 배후에 천안천 유역의 북쪽 분수계(分水界)가 있어 겨울철 한풍(寒風)의 영향을 덜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지리적 이점으로 인하여 백석동 일원의 유적들은 청동기 시대 취락 유구 중 최대 규모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며 청동기 시대 대규모 취락의 생활상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특히 불탄 집자리에서 출토된 콩이나 기장 등의 곡물과 토기 바닥면에 남아 있는 볍씨 자국, 그리고 돌칼(石刀)과 같은 농기구를 통해 활발한 농경 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고 있어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미지==
<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
File:천안_백석동_유적(백석동_고재미골_유적)_II지역_2_26_27호_집자리.jpg
File:천안_백석동_유적(백석동_고재미골_유적)_II지역_집자리_출토_석기.jpg
File:천안_백석동_유적(백석동_고재미골_유적)_II지역_집자리_출토_토기.jpg
</gallery>


==한국고고학저널==
==한국고고학저널==
* "[http://portal.nrich.go.kr/kor/journalUsrDtlView.do?menuIdx=801&idx=3&d_idx=84 청동기시대 전기의 대규모 취락유적]", <i>2007 한국고고학저널</i>.
* "[http://portal.nrich.go.kr/kor/journalUsrDtlView.do?menuIdx=801&idx=3&d_idx=84 청동기시대 전기의 대규모 취락유적]", <i>2007 한국고고학저널</i>.
==참고문헌==
* 공주대학교박물관. (1998). <i>천안 백석동 유적</i>.  https://www.riss.kr/link?id=M7476758
* 공주대학교박물관. (2000). <i>천안 백석·업성동 유적</i>.  https://www.riss.kr/link?id=M7942271
* 충청문화재연구원. (2009). <i>천안 백석동 고재미골 유적</i>.  https://www.riss.kr/link?id=M12385760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2026년 4월 2일 (목) 12:20 기준 최신판


백석동 유적
기본 정보
동의어 천안 백석동 유적
시대 청동기 시대
국가 대한민국
소재지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백석동 706·1071·1141, 성성동 513 일원
관련 정보
성격 복합유적
키워드 집자리, 역삼동 유형, 송국리식 집자리, 송국리 유형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19
집필자 오규진



설명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백석동 706·1071·1141, 성성동 513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은 천안 백석동, 백석·업성동, 천안 백석동 고재미골로 구분되며 동일 지역 내 대단위 청동기 시대 취락(聚落) 유적이다.

가장 먼저 조사된 백석동·성성동 유적은 천안 제 3공단 건설 공사에 따라 1994~1996년에 걸쳐 3차례 발굴 조사되었다. 유적은 남북으로 길게 흘러 내려가는 곡교천(曲橋川) 수계와 중간 지점에 형성된 낮은 구릉성 산지에 입지한다. 유적의 동쪽은 노태산, 서쪽으로는 금마산이 자리하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 집자리 86기, 백제 시대 토성 등이 확인되었다. 청동기 시대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장방형·방형으로 구분되며, 세장방형의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능선의 중상단부의 급경사면에는 주로 장방형과 방형의 집자리가 분포하며, 능선 중단의 해발 40m 내외의 완만한 경사 지역에는 세장방형의 비율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

집자리 내부에는 기둥 구멍(柱穴), 화덕 자리, 저장 구덩이 등 다양한 시설 등이 확인된다. 기둥 구멍은 별다른 시설없이 바닥면을 원형으로 굴광하여 조성하였다. 화덕 자리는 중앙 장축을 따라 설치되어 있으며, 구조는 모두 구덩식 화덕 자리(竪穴式爐址)이다. 개수는 집자리 규모에 따라 1~5개까지 다양하다. 저장 구덩이는 짧은 벽이나 긴 벽의 중앙에 3~5개씩 밀집되어 있으며, 내부에서 대형 토기(大形土器)가 반듯하게 세워진 채 확인되기도 한다.

출토 유물은 크게 토기류와 석기류로 구분된다. 토기류는 구멍무늬 토기(孔列土器)·골아가리 토기(口脣刻目文土器)·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골아가리 구멍무늬 토기(口脣刻目孔列土器)·골아가리(口脣刻目)+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구멍무늬孔列文+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대부호(臺附壺)·붉은 간 토기·굽다리 접시(高杯) 등이 있다.

석기류는 간 돌검(石劍)·돌칼(石刀)·돌살촉(石鏃)·돌끌(石鑿)·돌도끼(石斧)·가락바퀴·그물추·숫돌(砥石)·갈판(碾石) 등이 확인되었다.

백석동 유적은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백석동 1144 일원에 위치한다. ‘새천안번영로’ 건설에 앞서 1996년 조사하였으며 세장방형 집자리 11기와 소형 유구 7기가 확인되었다. 세장방형·장방형 집자리는 1994~1996년에 조사된 집자리의 양상과 동일하다. 또한 기존 백석동 유적의 분포 범위가 확대된다는 점을 비롯하여 토기 문화와 관련한 다양한 자료가 확보되었다.

백석동 고재미골 유적은 천안시 서북구 백석동 1071에 위치한다. 1996년에 조사된 백석동 유적과 인접하며, 천안 유통 단지 조성에 따라 2006~2008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 집자리 111기와 구덩이 54기가 확인되었다. 유적은 동서 방향으로 발달해 있는 노태산의 서쪽 능선을 기준으로 하여 북쪽에 위치한 지역을 Ⅰ지역, 남쪽에 위치한 지역을 Ⅱ~Ⅳ지역으로 구분하였다.

청동기 시대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원형·방형·말각 방형·장방형·세장방형 등으로 다양한데 장방형과 세장방형 집자리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7기의 집자리가 화재로 폐기되어 집자리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용이하다. Ⅰ-2호 집자리에서는 가구 시설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탄화목재가 노출되었고 한 쪽에서 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가 벽체를 따라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여러 집자리에서도 확인되었다. 벽면을 따라 벽체 시설이 확인되는데 청동기 시대 집자리의 가옥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Ⅱ-7·8·11·12호 집자리는 최대 1.7m 깊이로 벽체의 잔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또한 집자리 내부의 저장 구덩이에서는 대형의 항아리들이 반듯하게 놓이거나 파손된 채 출토되었다. 이러한 저장 구덩이들은 벽 모서리에 배치되거나 긴 벽 중앙의 화덕 자리가 설치되지 않은 공간의 벽면을 따라 조성되어 있다.

역삼동 유형의 집자리에서 출토된 토기는 깊은 바리 토기, 바리 토기(鉢形土器), 큰 항아리, 작은 항아리, 굽 달린 작은 항아리(臺附小壺), 컵 모양 토기, 굽달린 바리 등의 기종이 있으며, 붉은 간 토기도 있다. 아가리에는 구멍무늬(孔列文), 골아가리(口脣刻目), 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二重口緣短斜線文), 골아가리 구멍무늬(口脣刻目孔列文), 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二重口緣短斜線文) 등이 시문되어 있다. 출토된 석기류는 갈판과 돌칼을 비롯하여 돌검(石劍), 조갯날 돌도끼(蛤刃石斧), 돌살촉(石鏃), 돌창(石槍), 돌끌(石鑿), 가락바퀴 등 다양하다.

이외에도 집자리 중앙부에 타원형 구덩이와 구덩이 내외부 양쪽에 기둥을 설치한 송국리식 집자리도 조사되었다. 부분적으로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가 설치되지 않은 집자리도 확인된다.

출토 유물상에서 홈자귀(有溝石斧)가 보이며, 구멍무늬(孔列文) 및 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二重口緣短斜線文)가 완전히 소멸되는 양상으로 볼 때 백석동 고재미골 유적은 역삼동 유형부터 송국리 유형까지 오랜 시간 취락이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안 백석동 집자리, 천안 백석동 유적, 천안 백석동 고재미골 유적에서 총 203기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이들 집자리들은 해발 62~103m에 걸쳐서 분포하며, 평균 해발은 83m이다. 이들 취락과 용수 하천 거리와 용수 하상 비고를 검토하면, 용수 하천 거리는 약 2,350~3,725m로서 평균 3,038m이고, 용수 하상 비고는 44~48m로서 평균 46m이다.

분석 결과, 상기 취락으로 용수 공급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장재천·천안천·성환천·매곡천의 각 지점까지의 거리는 약 2.5~3.7㎞ 정도이다. 만약 장재천 유역만을 이용했다고 가정하면, 약 3.1~3.3㎞, 천안천 전체 유역을 이용했다고 가정하면 3.1~3.7㎞이다. 그리고 인접한 성환천과 매곡천을 이용했을 경우에도 장재천 및 천안천의 용수 하천 거리와 유사하다.

한편, 당시 백석동·업성동 일대 취락에서는 물을 구하기 위해 하천이 아닌 저수(貯水)를 이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백석동 고재미골 유적의 지형 분석과 퇴적물 분석에 의하면, 장재천의 수원(水源)이 시작되는 최상류에 속하는 곡저면의 하부에 저습지가 매몰된 상태로 존재 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저습지 내에서 인위적으로 물을 저장하기 위한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현 단계에서 집자리 입지 선정에 있어 영향을 미쳤을 용수 확보(用水確保)에 관해서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물을 구하기 위해 하천이 아닌 저수조(貯水造)와 같은 인위적인 시설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고, 하천이나 저수 둘 다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추후 청동기 시대 원지형이 복원되고, 보다 수준 높은 지형 분석과 퇴적물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백석동 일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다른 지역에 비해 취락이 입지하는데 최적의 장소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해발이 높은 곳으로 주변 일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시야가 확보되어 비상시 적으로부터 방어에 유리하다. 둘째, 취락 배후에 천안천 유역의 북쪽 분수계(分水界)가 있어 겨울철 한풍(寒風)의 영향을 덜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지리적 이점으로 인하여 백석동 일원의 유적들은 청동기 시대 취락 유구 중 최대 규모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며 청동기 시대 대규모 취락의 생활상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특히 불탄 집자리에서 출토된 콩이나 기장 등의 곡물과 토기 바닥면에 남아 있는 볍씨 자국, 그리고 돌칼(石刀)과 같은 농기구를 통해 활발한 농경 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고 있어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미지

한국고고학저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