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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PLAYTITLE:팔달동 유적(大邱 八達洞遺蹟)}} {{유적정보 | 한글표제어=팔달동 유적 | 이칭별칭=대구 팔달동 유적 | 시대=청동기 시대 | 위치=대한민국 | 소재지=대구광역시 북구 팔달동 145 일대 | 성격=복합유적 | 키워드=[[집자리]], [[널무덤]], [[움무덤]], [[덧널무덤]], [[독무덤]], [[돌덧널무덤]], [[화덕 자리]], [[벽 도랑]], [[도랑]], [[간 돌검]], [[돌칼]], [[숫돌]], [[갈판]], [[그물추]], [[구멍무늬 토기]], [[역삼동 유형]], [[가락동 유형]], [[검단리 유형]]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집필연도=2019 | 집필자=유병록 }} ==설명== 대구광역시 북구 팔달동 145 일대에 위치한다. 금호강의 지류인 팔계천(八溪川)이 금호강과 합류되는 지점의 해발 38~50m의 구릉에 입지한다. 유적은 1980년 처음 알려진 이후 여러 차례 조사 보고를 통해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부터 [[삼국시대|삼국 시대]]의 유구가 폭넓게 분포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 아파트 건설에 앞서 1996년부터 1997년까지 발굴 조사하였다. 청동기 시대 장방형 [[집자리|집자리]] 19기를 비롯해 [[원삼국시대|원삼국 시대]] [[널무덤|널무덤(木棺墓)]] 및 [[움무덤|움무덤(土壙墓)]] 102기, [[덧널무덤|덧널무덤(木槨墓)]] 1기, [[독무덤|독무덤(甕棺墓)]] 139기, 삼국 시대 덧널무덤 22기, [[돌덧널무덤|돌덧널무덤(石槨墓)]] 32기 등과 [[조선시대|조선시대]] 널무덤 146기가 조사되었다. 청동기 시대 집자리는 구릉 북쪽 사면에 있는 방형 4호를 제외하고, 구릉 정상부에 3기가 밀집하고 나머지 15기는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집자리는 분포를 통해 3개의 무리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무리는 유적 내 가장 높은 구릉 정상부에 밀집된 3기의 집자리이다. 1호는 길이 16.5m, 복원 너비 4m로 규모가 가장 큰 장방형 집자리로, [[화덕자리|화덕 자리]]가 길이 방향을 따라 2개 확인되었다. 입지나 규모를 통해 일반적인 주거용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2·3호 집자리는 내부에 화덕 자리가 없다는 점에서 1호의 부속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1호의 출토 유물은 토기류보다 석기류가 다수 확인되었다. 수리한 [[간돌검|간 돌검]] 1점 및 미완성의 [[돌칼|돌칼(石刀)]]과 20여 점과 석기를 가공하는데 사용하는 [[숫돌|숫돌(砥石)]]과 [[갈판|갈판(碾石)]] 등도 여러 점 출토되었다. 가장 높은 곳에 입지한 1·2호에서만 [[그물추|그물추]]가 여러 점 출토되어 특징적이다. 이를 통해 1호 집자리는 공동의 작업장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2·3호는 마을안에서 권위를 가진 사람의 거주지일 가능성도 있다. 두 번째 무리는 1호 집자리군에서 약 35m 떨어져 유적 서쪽의 등고선 방향으로 2열 배치된 집자리 9기로, 동시에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나머지 집자리 무리는 유적 동쪽 경사면을 따라 대략 3열로 배치가 다소 불규칙한 6기의 집자리 무리이다. 이 2개의 집자리 무리는 내부에 [[벽도랑|벽 도랑(壁溝)]]을 갖추고 있으며, 8기에서는 화덕 자리가 확인되었다. 화덕 자리는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竪穴式)]]으로 집자리 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으나, 13·14호는 방형의 [[돌두름식화덕|돌 두름식(圍石式) 화덕]]이 확인되었다. 5·13호는 집자리 바깥 위쪽에 [[구|도랑(溝)]]이 돌려져 있고, 13호에서는 벽 도랑이 외부로 길게 이어지게 만들어져 있다. 출토 유물 중 토기류는 무늬가 있는 [[구멍무늬토기|구멍무늬 토기(孔列土器)]]가 대부분이다. 이외에 [[골아가리|골아가리(口脣刻目文)]]와 [[흔적만남은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흔적만 남은 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退化二重口緣短斜線文)]]가 소량 출토되었다. 석기류는 [[슴베없는돌살촉|슴베 없는 돌살촉]]이 대부분이고, 돌칼, [[돌도끼|돌도끼]], [[돌창|돌창(石槍)]] 등도 출토되었다. 토기류보다 석기류의 출토량이 많은데 특히, 유적 서쪽의 13호는 내부에 채워진 퇴적토 내에서 다량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토기는 대부분이 깨어진 것으로 집자리 폐기 이후에 이곳을 폐기장으로 바꾸어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구멍무늬바리토기|구멍무늬 바리 토기]]가 출토된 14호는 2개의 돌 두름식(圍石式) 화덕 자리가 있어 [[역삼동유형|역삼동 유형]]과 [[가락동유형|가락동 유형]]의 요소를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검단리유형|검단리 유형]]권의 요소인 벽 도랑과 (추정)외부 돌출구 가 확인되어 여러 문화상이 혼재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집자리이다. 팔달동 유적은 그 입지적 우월성이나 위치상으로 대구 지역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의 특별한 성격의 마을 유적으로 판단된다. 또한, 토기류보다는 석기류가 많다는 점에서 수렵, 채집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돌도끼 중 [[합인석부|조갯날 돌도끼(蛤刃石斧)]]보다는 [[외날돌도끼|외날 돌도끼(片刃石斧)]]와 [[돌끌|돌끌(石鑿)]]이 더 많다는 점에서 당시 일부이지만 화전(火田) 중심의 농사에서 계곡이나 평지로의 농경지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유적일 가능성도 있다. ==이미지== <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 File:대구_팔달동_유적_10_13_14호_집자리.jpg File:대구_팔달동_유적_출토_석기.jpg </gallery> ==조사정보== {|class="listtable" ! class="col-type"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 |- | 발굴조사 || 1996년 8월 16일 ~ 1997년 5월 31일 || 대구 팔달동유적Ⅰ || 2000 || 영남문화재연구원 |- | 시굴조사 || 1996년 3월 12일 ~ 1996년 5월 15일 || 대구 팔달동유적Ⅰ || 2000 || 영남문화재연구원 |} ==참고문헌==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0). <i>대구 팔달동유적Ⅰ</i>. https://www.riss.kr/link?id=M9881218 * 영남문화재연구원. (2015). <i>대구 팔달동유적Ⅱ</i>. https://www.riss.kr/link?id=M14083238 * 유병록. (1998). 대구 팔달동 청동기시대 주거유적에 대하여. <i>제8회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회</i>.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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