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주 메뉴
주 메뉴
사이드바로 이동
숨기기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한국고고학사전
검색
검색
보이기
로그인
개인 도구
로그인
600-0741 문서 원본 보기
문서
토론
한국어
읽기
원본 보기
역사 보기
도구
도구
사이드바로 이동
숨기기
동작
읽기
원본 보기
역사 보기
일반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보이기
사이드바로 이동
숨기기
←
600-0741
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관리자
.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DISPLAYTITLE:돌돈[石貨]}} {{개념정보 | 한글표제어=돌돈 | 이칭별칭=석화 | 시대=청동기 시대 | 관련 지역=한반도 서북 지방 | 관련 유적=남포 태성리 유적, 평양 금탄리 유적, 봉산 신흥동 유적 | 키워드=[[팽이 토기]], [[집자리]], [[석재]], [[교역]], [[편암]], [[화강암]]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집필연도=2019 | 집필자=장호수 }} ==설명== 돌돈(石貨)은 납작한 [[편암|편암]]을 둥글게 원판형으로 다듬고 갈아 만든 것으로 가운데 구멍을 뚫어 놓기도 하였다. [[남포태성리유적|남포 태성리 유적]]에서 나온 것은 [[화강암|화강암]]을 갈아 만든 것도 있다. 지름 40~60㎝ 정도의 것이 대부분이며 두께는 2~3㎝ 정도 된다. 큰 것은 지름 75㎝, 두께 8㎝에 이르는 것도 있다. 우리나라 서북 지방의 [[팽이토기|팽이 토기(角形土器)]]를 특징으로 하는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집자리|집자리]]에서 많이 보인다. [[평양금탄리유적|평양 금탄리 유적]] 2호 집자리에서는 10개, [[봉산신흥동유적|봉산 신흥동 유적]] 2호 집자리에서는 5개가 한 곳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돌돈을 교환의 수단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그러나 함께 출토된 다른 석기들이 돌돈과 같은 [[석재|석재]]로 만든 것들이 많아, 석재 교환용 또는 석기의 재료로서 다른 자원들과 교환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 시대 [[교역활동|교역]]의 증거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이미지== <gallery mode=packed heights=400px> File:연천_삼거리_유적_7호_집자리_출토_돌돈.jpg </gallery> ==참고문헌== * 사회과학원 자료실. (1967). <i>고고민속 3-용어: 돌돈</i>. 사회과학원출판사. * 서국태. (1964). <i>고고민속 3-신흥동 팽이그릇 집자리</i>. 사회과학원출판사.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개념정보
(
원본 보기
)
600-0741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