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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PLAYTITLE:귀일리 고인돌군[平壤 貴逸里支石墓群]}} {{유적정보 | 한글표제어=귀일리 고인돌군 | 이칭별칭=평양 귀일리 고인돌군, 평양 귀일리 지석묘군 | 시대=청동기 시대 | 위치=북한 | 소재지=평양직할시 상원군 귀일리 | 성격=고인돌 | 키워드=[[고인돌]], [[오덕형 고인돌]], [[사람 뼈]], [[민무늬 토기]], [[침촌형 고인돌]], [[조가비 팔찌]], [[곱은옥]], [[돌창]]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집필연도=2019 | 집필자=장호수 }} ==설명== 평양직할시 상원군 귀일리에 위치한다. 1995년 6월에 발굴 조사되었다. 상원읍에서 남쪽으로 12㎞에 있는 하무산 동남쪽 기슭의 밭 가운데 [[고인돌|고인돌]] 4기가 1열로 나란히 놓여 있는데 원래 이 곳에는 10여 기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귀일리 2호 고인돌은 [[탁자식고인돌|오덕형 고인돌]]이며 그 아래 집합식(集合式) 무덤방(墓室)의 형식을 보여준다. 뚜껑돌(上石)은 길이 3.6m, 너비 2.5m, 두께 0.3m이며, 판돌(板石)을 동서로 마주 세워 받침돌(支石)로 하고 양 끝에 막음돌(閉塞石)을 막아 무덤방을 만들었다. 남쪽 막음돌은 출입문으로서 기능을 한다. 무덤방은 길이 1.9m, 너비 0.8m, 높이 0.7~8m이며, 내부에 다시 판돌을 세워 주검(屍身)을 묻는 공간을 4칸으로 구획하였다. 북쪽으로부터 1~4호 순이며 2호가 다른 무덤방에 비해 조금 넓은 편이다. 무덤방은 납작한 강돌을 깔았는데 2호는 다른 무덤방보다 0.05m 높다. 무덤방마다 불탄 [[사람뼈|사람 뼈]]와 [[껴묻거리|껴묻거리]]들이 나왔는데, 2호에서는 한 사람분의 뼈가 들어 있었고 나머지에는 3~4명분의 뼈들이 들어 있었다. 껴묻거리로는 2호에서 흰 돌구슬, [[조개팔찌|조가비 팔찌(貝釧)]], [[곱은옥|곱은옥(曲玉)]]을 비롯해 [[돌창|돌창(石槍)]] 끝,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편이 나왔고 나머지 무덤방에서는 민무늬 토기 편만 보인다. 귀일리 2호 고인돌은 무덤 구조와 껴묻거리 출토 상황으로 보아 사회 계급에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함께 묻힌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유사한 형식의 고인돌은 [[연탄오덕리유적송신동20·22·31호고인돌|연탄 오덕 지구의 송신동 20·22·31호 고인돌]]이 있다. 또한 [[성천룡산리고인돌군|성천 룡산리 무덤]]은 [[침촌형고인돌|침촌형 고인돌]] 형식으로 개별 무덤방이 있으나, 가운데의 것이 주인공 무덤방으로 규모가 크고 바닥을 높게 한 형식 등 여러 특징에서 유사하여 고인돌 사회를 파악하는데 비교 자료가 된다. 무덤에서 나온 토기를 이용하여 [[핵분열손상연대측정법|핵분열 흔적법(fisson-track)]]을 통한 절대 연대 측정 결과, 4611±724년 전으로 나왔다고 한다. ==참고문헌== * 차달만. (1996). 상원군 귀일리 2호고인돌무덤에 대하여. <i>조선고고연구, 3</i>.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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