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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PLAYTITLE:히에·나카 유적(福岡 比恵·那珂遺跡)}} {{유적정보 | 이칭별칭=후쿠오카 히에·나카 유적, 복강 비혜·나가 유적 | 키워드=[[환호]], [[대규모 취락]], [[굴립주 건물군]], [[도랑]], [[제사용 토기]], [[우물]], [[파형동기의 거푸집]], [[주조 철부]], [[철기]], [[교역·교통 거점]] | 시대=청동기 | 위치=일본 | 집필연도=2019 | 집필자=이동관 | 조성 시기=야요이 시대 | 성격=복합유적 | 크기=1,000,000㎡ (면적) | 관련 인물=나카야마 헤이지로 | 가가미야마 다케시 | 모리 테이지로 | 소재지=일본 후쿠오카현(福岡県) 후쿠오카시(福岡市) 하카타구(博多区) 하카타에키미나미4정목(博多駅南4丁目)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설명==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県) 후쿠오카시(福岡市) 하카타구(博多区) 하카타에키미나미4정목(博多駅南4丁目)에 위치한다. 유적은 나카야마 헤이지로(中山平次郎)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1938년 가가미야마 다케시(鏡山猛), 모리 테이지로(森貞次郎) 등이 조사하였다. 1952년 길이 10m의 [[환호|환호]] 취락이 확인되면서 사적 ‘히에환구주거유적(比恵環溝住居遺跡)’으로 지정·정비되었다. 1966년 이후 구제 발굴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히에·나카 유적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야요이시대|야요이 시대]] 종말기~[[고훈시대|고훈 시대]] 전기의 [[도로유구|도로 유구]]도 확인되었다. 나카 유적군은 후쿠오카평야 중앙의 미카사강(御笠川)과 나카강(那珂川)이 합류하는 구릉 북쪽에 입지한다. 이 구릉은 화강암 풍화암반층으로 화산재에 의해 퇴적·형성되었다. 유적의 범위는 구획 정리와 도시화에 의해 삭평이 심하여 유구의 상태는 양호하지 않다. 이를 고려한다면 히에·나카 유적군 구지형의 해발은 약 5~11m 전후이다. 유적의 중심시기인 야요이 시대 중기 말 유적의 범위는 약 100㏊로, 일본 열도 최대급의 규모이다. 야요이 시대 조기부터 중기 전반까지의 유구와 유물은 대지의 주변부에 위치하며, 중기 중엽에는 돌연 대지 중앙부에 밀집하여 [[대규모취락|대규모 취락]]을 형성한다. 후쿠오카평야 중앙부는 중국의 역사서에서 보이는 나코쿠(奴國)의 중심지로 야요이 시대 다수의 중요 유적이 분포한다. 특히 가스가(春日) 구릉에서 히에·나카 유적군의 구릉까지는 야요이 시대 중요 유적이 다수 분포한다. 가스가 구릉에는 [[전한경|전한경(前漢鏡)]]이 30장 이상 출토된 왕묘인 [[스구·오카모토유적|스구오카모토 유적(須玖岡本遺跡)]] [[독무덤|독무덤(甕棺墓)]]을 비롯한 야요이 시대 중기 전반부터 종말기까지의 취락·분묘군·[[청동기|청동기]] [[매납유구|매납 유구]]가 분포하며, 환호와 [[단야공방|단야 공방]]·청동기· 유리 제품의 [[거푸집|거푸집]]도 다수 출토되어 수공업 생산의 중심지로 판단된다. 히에·나카 유적의 주변 유적은 경계가 불명확하며, 환호나 유구의 전개 과정 등으로 볼 때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동일 유적군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히에·나카 유적군은 거대 취락 유적으로, [[청동거울|청동 거울(銅鏡)]]과 청동기가 부장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야요이 시대 정치적 중심지는 아니다. 하지만 히에 유적군 북쪽에 펼쳐지는 [[굴립주건물|굴립주 건물군(堀立柱建物)]]의 존재나 야요이 중기 중엽에서 중기 후반까지 운하적 기능을 가진 종횡의 [[구|도랑(溝)]]의 존재 등으로 볼 때 교역·교통의 거점적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히에 유적의 57차 조사에서는 수은주(水銀朱)의 원료가 되는 다량의 진사(辰砂)가 출토되었다. 또한, 나카 유적의 23차 조사에서는 야요이 시대 중기 말의 초대형 건물과 대형 도랑에서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등 대량의 [[제사토기|제사용 토기]]의 폐기 양상도 나타난다. 하지만 이 또한 히에·나카 유적군의 중심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대형 건물은 취락 내에 복수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히에·나카 유적군의 중심 지구는 히에 유적군의 중앙 동쪽의 환호군이다. 이 지역은 1호 환호를 비롯한 방형의 초대형 환호로, 수장의 거주 시설로 알려져 있다. 또 히에 유적군에서는 [[우물|우물]]의 수가 상당히 많은데, 이는 밀집 거주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또 나카 유적에서는 [[파형동기거푸집|파형 동기(巴形銅器)의 거푸집]]을 비롯하여, 한반도에서 반입된 [[주조철부|주조 철부]]나 이를 재가공한 [[철기|철기]]들도 다수 출토되었다. 히에 유적의 4차 조사에서 소규모의 수전이 발견되었으나 중기 이후에는 폐기된다. 아마도 넓은 충적지를 가진 [[히가시히에유적|히가시히에 유적(東比恵遺跡)]]과 같이 대규모 수전을 개발하고 경영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농공구|농공구]]와 같은 생산 도구의 비율이 낮은 점도 농경을 활용한 생업보다는 주변의 중소 농촌 취락과 유기적으로 관계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상정하게 한다. 야요이 시대 종말기가 되면 스구오카모토의 대규모 유적군은 쇠퇴하고 유구 수는 극감한다. 이에 비하여 히에·나카 유적군의 유구 분포는 약간 증가하여 도로를 이용한 경영을 한 축으로 하는 새로운 취락이 재편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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