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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PLAYTITLE:봉산리 유적(昌原 鳳山里遺蹟)}} {{유적정보 | 이칭별칭=창원 봉산리 유적 | 키워드=[[고인돌]], [[돌널무덤]], [[붉은 간 토기]], [[슴베 간 돌살촉]], [[자루 간 돌검]], [[돌도끼]], [[민무늬 토기]], [[송국리 문화]] | 시대=청동기 | 위치=대한민국 | 집필연도=2019 | 집필자=김현식 | 조성 시기=청동기 | 성격=고분 | 소재지=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봉산리 342 일원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설명==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봉산리 342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의 성격 규명과 정비를 위해 2007~2009년 3차례 조사하여, [[고인돌|고인돌]] 1기, [[돌널무덤|돌널무넘(石棺墓)]] 3기를 확인하였다. 유적은 정병산(해발 566m)의 북쪽 자락 말단 해발 약 35m 지점에 입지한다. 고인돌은 [[덮개돌|덮개돌(上石)]]과 [[매장주체부|매장 주체부(埋葬主體部)]]로 구분된다. [[묘광|무덤 구덩이(墓壙)]]는 깊이 약 3.5m로 3단으로 굴착하였다. 규모는 길이 8m, 너비 5m이며, 최하단은 길이 6.2m, 너비 5m이다. 매장 주체부는 길이 3.2m, 너비 1.1m, 깊이 1.3m의 돌널무덤으로, 판돌(板石)을 눕혀 10단 정도 쌓아 벽석을 만들었다. 벽석과 무덤 구덩이 사이는 돌을 채워 벽석을 견고하게 하였으며, 바닥에는 잔돌을 깔아 [[시상|시상(屍床)]]을 조성하였다. 매장 주체부와 덮개돌 사이에는 판돌과 강돌(川石)을 번갈아 3겹으로 조성하였다. 유물은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1점, [[슴베간돌살촉|슴베 간 돌살촉(有莖式磨製石鏃)]] 9점이 출토되었다. 돌널무덤 3기는 후대의 교란으로, 뚜껑돌(蓋石)과 벽석이 유실되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남아 있는 벽석을 통해 판돌을 눕혀 쌓아 벽석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껴묻거리|껴묻거리]]는 대부분 도굴 또는 유실된 것으로 판단되며, [[자루간돌검|자루 간 돌검]]의 손잡이, [[돌도끼|돌도끼(石斧)]] 편,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바닥 편 등이 무덤 내부 또는 주변에서 확인되었다. 유적의 시기는 [[송국리문화|송국리 문화]]에서도 늦은 단계에 해당하는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조사정보== {|class="listtable"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 |- | 발굴조사 || 2007년 07월 18일~2007년 09월 14일 || 창원 봉산리유적 || 2010 || 국립김해박물관 |- | 발굴조사 || 2008년 11월 18일~2008년 12월 30일 || 창원 봉산리유적 || 2010 || 국립김해박물관 |- | 발굴조사 || 2009년 03월 02일~2009년 05월 09일 || 창원 봉산리유적 || 2010 || 국립김해박물관 |}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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