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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PLAYTITLE:밭[田]}} {{개념정보 | 한글표제어=밭 | 시대=청동기 시대 | 관련 유적=하남 미사리 유적, 천안 백석동 유적, 울산 옥현 유적, 진주 대평리 유적, 진주 평거동 유적, 마산 진동리 유적, 밀양 살내 유적, 밀양 신안 유적, 진주 대평리 어은 유적, 진주 대평리 옥방 유적, 산청 묵곡리 유적 | 키워드=[[논]], [[집자리]], [[석기]], [[반달 돌칼]], [[돌도끼]], [[돌낫]], [[야외 노지]], [[토기]], [[탄화미]], [[농공구]], [[가래]], [[괭이]]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집필연도=2019 | 집필자=윤호필 }} ==설명==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밭은 전시기에 걸쳐 확인되지만, 대규모 경작지로 확인되는 것은 주로 청동기 시대 늦은 시기에 속한다. 밭의 지형적 입지를 보면 충적지, 구릉 정상부, 개석곡저(開析谷底) 등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배치 형태는 [[집자리|집자리]]와 인접해 배치되거나 별도의 공간에 경작지가 조성된다. 농경지의 규모는 대규모 경작지가 확인되며 생산량은 자급 자족 및 잉여물 생산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밭에서 출토되는 곡물은 쌀, 조, 기장, 보리, 밀, 팥, 복숭아, 박, 오이, 대마 등 다양하게 확인된다. 주요 유적은 [[하남미사리유적|하남 미사리]], [[천안백석동유적|천안 백석동]], [[울산옥현유적|울산 옥현]], [[진주대평리유적|진주 대평리]](어은 1·2지구, 옥방 1-9지구), [[진주평거동유적|진주 평거동]] 3-1지구 평거동 4-1지구, [[진주이곡리유적|진주 이곡리]], [[마산진동리유적|마산 진동]], [[밀양살내유적|밀양 살내]], [[밀양신안유적|밀양 신안]] 등 많은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진주대평리어은유적|진주 대평리 어은동]] 구역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밭이 2,000평 정도 이랑 채로 발견되었으며, [[진주대평리옥방유적|대평리 옥방]] 지역에서도 1800평이 이랑 채로 발견되었다. 또 옥방 지구에서 100평, 어은 지구에서 123평, [[산청묵곡리유적|산청 묵곡]] 지구에서 200평, 옥방 4지구에서 500평, 옥방 2, 3지구에서 740평의 밭이 발견되었다. 대평면 대평리 어은 1지구에서는 길이 120m, 너비 50m 규모(대략 2,000평)의 기원전 5세기경 청동기 시대 밭 터가 발견되었는데 밭고랑의 가장 긴 부분은 30m, 고랑 너비는 0.35m, 두둑 너비는 0.5m이다. 이 밭 터에서 [[반달돌칼|반달 돌칼]], [[돌도끼|돌도끼]], [[돌낫|돌낫]], 등 경작용 [[석기|석기]] 수백 점이 출토됐으며 조로 추정 되는 탄화 곡물이 나왔고 [[야외노지|야외 노지]]도 발견되었다. 밭은 주거 바로 곁에 있어서 능률적인 토지 이용을 하고 있었다. 대평면 상촌리 지구의 밭 터에서는 반달 돌칼, [[토기|토기]] 편이 소량으로 나왔고 [[탄화미|탄화미]], 종류를 알 수 없는 [[구근류|구근류]], 깨, 수수, 조 등이 탄화된 채로 발견되었다. 또 옥방 2·5지구에서도 청동기 시대 밭 유구가 확인되었고 [[농공구|농공구]] 흔적으로 볼 때 목재로 만든 [[가래|가래]], [[괭이|괭이]] 등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남강댐 수몰 지구에서 조사된 이러한 밭 터들은 경작 생활을 입증하는 직접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충적지에 입지한 밭은 집자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지만, 구릉지에 입지한 밭은 집자리와 인접하여 자리한다. 집자리와 인접한 밭은 개별적인 것으로 집자리에서 벗어난 밭은 마을 공동으로 재배와 관리를 하는 밭으로 보기도 한다. 청동기 시대 늦은 시기가 되면 밭은 농경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재배 작물의 종류 또한 이른 시기에 비해 늘어나며 다양해진다. 특히 팥이 보편화되는 것이 특징이다. 밭의 대규모화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밭 경작의 특수성으로 인한 것이다. 밭은 [[논|논]]에 비해 비교적 쉽게 경작지를 조성할 수 있으며, 토양 조건이 까다롭지 않다. 또한, 재배 기술이 비교적 단순하여 쉽게 경작할 수 있다. 둘째 생물학적 특수성으로 재배 기간이 짧고 다양한 작물을 동시에 경작할 수 있다. 셋째 인구 증가와 함께 식량 확보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취락의 입지는 이른 시기와 큰 차이는 없지만, 중심 취락이 본격화되는 후기에는 충적 지형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이는 취락의 입지 선정에서 넓은 공간과 취수, 경작 활동, 교통로 등이 유리한 곳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충적 지형은 지형적으로 범람과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하여 방어가 불리한 곳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리한 조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적 지형을 중심 마을로 확대해 나가는 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식량 확보 및 나머지 곡물의 생산을 위한 대규모 경작지의 확보가 중요한 요소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대규모 밭은 충적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면서 밭 경작은 충적 지위 세부 지형이나 토양에 맞게 경작된다. 따라서 충적 지위 자연 환경적 요소와 밭 경작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충적지는 기본적으로 자연 제방과 배후 습지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밭은 두둑과 고랑의 비율은 약 1:1 정도로 비슷하면 두둑의 규모는 너비 0.3~0.4m, 높이 0.15m 내외이다. 이랑의 방향은 평탄면에서는 다양한 방향으로 나타나지만, 경사면에서는 등고선과 직교하는 특징이 있다. 밭과 밭은 경계 도랑이나 경계 둑으로 구획되어 있어 일정한 구획을 가지고 경작한 것으로 보인다.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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