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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PLAYTITLE:충효동 고인돌군[光州 忠孝洞支石墓群]}} {{유적정보 | 한글표제어=충효동 고인돌군[光州 忠孝洞支石墓群] | 이칭별칭=광주 충효동 고인돌군 | 시대=청동기 시대 | 위치=대한민국 | 소재지=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807-1 일원 | 성격=고인돌 | 키워드=[[고인돌]], [[간 돌살촉]], [[숫돌]], [[민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묘표석 고인돌]], [[덮개식 고인돌]]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집필연도=2019 | 집필자=이영문 }} ==설명==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807-1 일원에 위치한다. 영산강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된 4개의 댐 중 광주댐 수몰 지구로 1977년에 7기 중 6기를 전남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다. 광주와 담양군 남면과 경계를 이루는 창계천 주변에 형성된 퇴적평지에 하천과 나란하게 7기가 동서 방향으로 열을 이루고 있었다. [[고인돌|고인돌]]은 대체로 동남 방향으로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덮개돌(上石)의 장축 방향은 그 아래 있는 무덤방(墓室)의 장축 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무덤방은 가장 긴 것이 1.7m이나, 대게 1m 내외이다. 축조 방법은 [[묘광|무덤 구덩이(墓壙)]]를 파고 그 주위에 강돌(川石)이나 깬돌(割石)로 만든 조잡한 돌덧널형(石槨形)이며 주위에 받침돌(支石)을 놓고 그 위에 덮개돌을 덮었다. 2호 무덤방은 받침돌 4매와 그 사이에 돌로 채운 돌 두름형(圍石形)인데, 그 주위에 납작한 돌을 깔아 원래 원형의 [[묘역시설|묘역시설(墓域施設)]]을 한 것으로 생각되나 4분의 1정도의 부채꼴 모양으로 남은 묘역만 확인되었다. 7호의 경우 하나의 덮개돌 아래 두 기의 무덤방을 둔 하부 구조가 나타나 주목된다. 피장자는 적어도 거의 동시에 죽은 부부이거나 이와 유사한 혈연 관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예로는 [[나주판촌리고인돌군|나주 판촌리 고인돌]]에서도 보이고 있고, [[대구진천동고인돌|대구 진천동 고인돌]]에서도 모자(母子) 관계에 있는 무덤방이 한 덮개돌 아래 놓여 있어 당시의 고인돌 사회가 혈연 관계를 기반으로 한 사회이며, 고인돌의 축조 등의 경제·사회적 성격으로 보아 계급사회의 발생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물은 [[간돌살촉|간 돌살촉]] 편 1점, [[숫돌|숫돌(砥石)]] 2점과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편,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편들로 매우 빈약한 편이다. 이중 민무늬 토기 편은 무덤방 바닥이 아니라 그 위에 쌓였던 점토층에서 출토되므로 무덤방을 만들고 뚜껑을 덮은 뒤 뚜껑 위에 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충효동 고인돌은 한쪽에 치우친 2호처럼 4매의 받침돌 위에 거대한 덮개돌이 올려진 [[묘표석고인돌|묘표석 고인돌]]과 무덤방이 있는 [[개석식고인돌|덮개식 고인돌]]이 공존한 대표적 사례이다. 2호 고인돌 하부구조만 전남대학교로 이전·복원되었고, 나머지는 고인돌 조사 후 댐 건설로 수몰되었지만 현재 식영정 건너 편 하천변에 줄지은 고인돌은 볼 수 있다.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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