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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PLAYTITLE:남양리 유적(長水 南陽里遺蹟)}} {{유적정보 | 이칭별칭=장수 남양리 유적 | 키워드=[[고인돌]], [[돌덧널무덤]], [[돌무지 나무널무덤]], [[청동 거울]], [[청동 검]], [[청동 투겁창]], [[쇠도끼]], [[쇠끌]], [[쇠지우개]] | 시대=청동기 | 위치=대한민국 | 집필연도=2019 | 집필자=이종철 | 조성 시기=청동기 | 성격=복합유적 | 소재지=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천천면 남양리 1396(나지구)·1478(가지구) 일원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설명== 전라북도 장수군 천천면 남양리 1396(나지구)·1478(가지구)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은 금강의 최상류로서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하천변 충적대지에 해당한다. 특히 금강으로 유입하는 실개천변의 야트막한 강자갈층에 매장 영역을 마련하였다. 남원농지개량조합이 1996년 말부터 대대적으로 실시하던 천천면 남양리 일대의 경지 정리 작업 과정에서 [[신석기시대|신석기 시대]]와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1997년 3월에 1차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초기철기시대|초기 철기 시대]]의 무덤 3기(2·3·4호)가 떼를 이루어 확인되었다. 나지구는 1989년 1월에 [[청동기|청동기]]와 [[철기|철기]] 유물이 일괄로 발견·신고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긴급조사를 실시(1호)했던 곳이다. 1997년 12월에는 1차 발굴 조사가 실시되지 못한 나지구 일부와 남쪽 주변지역에 대한 2차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때 1차 조사 지구 쪽에서 무덤 1기(5호)가 새롭게 조사되고, 남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곳(가지구)에서 [[고인돌|고인돌]]로 추정되는 6기의 유구와 신석기 시대의 토기 조각들이 집중적으로 확인되었다. 고인돌은 모두 이동되었고 하부 구조는 확인되지 않았다. 초기 철기 시대의 무덤은 모두 5기가 조사되었다. 각각 5~10m 내외 거리를 두고 축조되었으며, 무덤의 장축은 모두 북서-남동 방향으로 일관되게 조성되었다. 보고자는 출토 유물의 정황을 통해 하천을 향하는 남동쪽을 머리 방향(頭向)으로 파악하였다. 1호는 조사 당시 대부분 교란되어 무덤 구조나 형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발견자의 증언에 따르면, 유물이 출토된 곳의 주변으로 냇돌(川石)들이 분포해 있었고, [[청동검|청동 검]]과 [[청동투겁창|청동 투겁창]]이 먼저 나오고 0.2~0.3m 아래에서 [[청동거울|청동 거울]]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1호 무덤과 관련된 유물로는 청동 검(銅劍), [[칼자루끝장식|칼자루 끝 장식(劍把頭飾)]], 청동 투겁창(銅鉾), 청동 거울(銅鏡), [[쇠도끼|쇠도끼(鐵斧)]], [[쇠끌|쇠끌(鐵鑿)]], [[석도|돌칼(石刀)]], [[돌살촉|돌살촉]],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등이다. 2호는 냇돌을 이용하여 측벽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긴 벽과 짧은 벽이 정연하게 축조되지 않았다. 길이 2.15m, 너비 0.53m, 깊이 0.52m이다. 보고자는 돌덧널(石槨)을 쌓은 후 나무관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다시 깔고 껴묻거리를 놓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구연부에 돌기가 있는 [[둥근덧띠토기|둥근 덧띠 토기]]와 [[쇠지우개|쇠지우개(鐵鉈)]]가 북서쪽 짧은 벽의 상부에서, 청녹색을 띠는 대롱옥 4점이 남동쪽 짧은 벽의 바닥면에서 출토되었다. 3호는 냇돌로 측벽을 조성하였는데 길이 2m, 너비 0.47m, 깊이 0.55m이다. 무덤의 상부층에서 쇠도끼, 쇠지우개 조각이, 바닥면에서 청동 검과 칼자루 끝 장식이 출토되었다. 청동 검의 하단부 등대에는 새발(鳥足)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청동 검과 칼자루 끝 장식은 북동쪽 긴 벽에 치우쳐 출토되었는데, 칼자루 끝 장식은 남동쪽 짧은 벽을 향해 있다. 4호는 냇돌로 축조하였으나 정연하지는 않으며, 길이 2.38m, 너비 0.53m이다. 무덤의 상부층에서 청동 투겁창·청동 끌(銅鑿)·쇠끌·쇠지우개 조각·[[숫돌|숫돌]]이, 매장 주체부의 바닥에서 청동 검·칼자루 끝 장식·청동 투겁창·[[대롱옥|대롱옥]]이 출토되었다. 특히 청동 거울은 측벽석에 걸쳐져 있었고, 그 조각이 30㎝ 정도 떨어진 곳에서 확인됨에 따라 무덤의 상부층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았다. 5호는 냇돌로 축조하였으나 측벽의 상태는 정연하지 않다. 길이 2m, 너비 0.52m, 깊이 0.56m이다. 북서쪽 짧은 벽 근처의 바닥면에서 [[긴목검은간토기|긴 목 검은 간 토기]]가 출토되었다. 남양리 유적에서 조사된 5기의 무덤은 온전한 형태의 [[돌널무덤|돌널무덤]]이나 [[돌덧널무덤|돌덧널무덤]]으로 볼 수 없다. 대부분 하천변에서 구할 수 있는 냇돌을 활용하여 축조하였지만, 넓적한 돌의 비중은 낮은 편이다. 따라서 측벽의 상태와 구조로만 본다면, 돌널무덤보다는 돌덧널무덤에 가깝다. 특히 5기의 무덤이 일정한 지구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고, 그 가운데 4기가 북서-남동 방향의 장축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남양리 집단은 온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돌덧널무덤 형태의 무덤에 시신(목관일 가능성이 높음)을 안치하고, 매장 주체부 안과 밖에 각각 껴묻거리를 놓거나 일부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무덤 상부에 나무로 된 별도의 덮개를 덮고 흑갈색토와 냇돌을 쌓아 무덤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고자는 남양리의 무덤들을 [[적석목관묘|돌무지 나무널무덤(積石木棺墓)]]으로 분류하였다. 그동안 청동 거울과 청동 검 등 청동 유물들이 출토되는 무덤이 단독으로 조사되었던 것과 달리 떼를 지어 조사되었다는 점, 청동기와 철기의 완벽한 공반 관계가 확인된 점, 새발 무늬가 새겨진 청동 검이 출토된 점, 관외 및 관내 부장을 확인한 점은 의미 있는 고고학적 성과로 평가된다. 보고자는 출토 유물의 비교를 통해 유적의 연대를 기원전 2세기말~1세기 전반을 전후하는 시기로 보았다. 그러나 이후 조사 성과를 통해 기원전 1세기대까지 내려오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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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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