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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PLAYTITLE:거석문화(巨石文化)}} {{개념정보 | 한글표제어=거석문화(巨石文化) | 이칭별칭=거석 기념물 | 시대=청동기 시대 | 관련 유적=태천 학봉리 유적 | 키워드=[[선돌]], [[환상열석]], [[열석]], [[석상]], [[고인돌]], [[돌무지]], [[돌널무덤]]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 집필연도=2019 | 집필자=김범철 }} ==설명== 큰 돌(巨石)로 구조물을 만들어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활용하는 상징·의례·기술적 행위와 관념의 총체(總體). ‘거석(megalith)’이라는 용어는 1849년 영국의 고물 애호가 허버트(Algernon Herbert)가 [[스톤헨지|스톤헨지(Stonehenge)]]를 묘사하면서 등장하는데, 대체로 큰 돌을 활용하되 회(灰) 등의 접착제를 이용하지 않는 선사 시대 축조물만을 한정적으로 지칭한다. 전통적으로 대서양에 면한 유럽, 지중해 연안, 인도, 동남·동북아시아 등 지역이 주목 받아왔지만, 선사 시대 문화 현상으로서 거석 기념물(megalithic monument)의 축조 행위는 거의 세계 모든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 맥락과 방식은 차이가 있지만 형태는 유사한 것들이 적지 않아, 몇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우선, 사용된 돌의 개수에 따라 단일 거석과 다중 거석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단일 거석 구조물에는 [[선돌|선돌(立石)]], [[환상열석|환상열석(環狀列石)]], [[열석|열석(列石)]], [[석상|석상(石像)]] 등이, 다중 거석 구조물에는 [[고인돌|고인돌(支石墓)]], [[돌무지|돌무지(積石)]],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등이 포함된다. 선돌은 길쭉한 하나의 돌을 세워 놓은 형태를 띤다. 구대륙은 물론 신대륙에서도 흔하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남근(男根) 숭배나 묘표(墓標), 수호(守護), 이정표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선돌이 연속되는 경우, 직선으로 하나 또는 여러 열을 이루면 열석이, 원을 이루면 환상 열석이 된다. 열석의 경우, 유럽 특히 프랑스 브르타뉴(Bretagne) 지방의 사례가 대표적인데, ‘알리뉴망(alignement)’이라는 프랑스어 명칭이 널리 쓰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브르타뉴 지방은 열석 외에도 고인돌, 선돌, 돌무지 등이 유럽에서 가장 밀도 높게 발견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방에서도 가장 주목 받아온 [[카르낙열석유적|카르낙(Carnac)의 열석 유적]]에는 작은 것이 0.6m, 가장 큰 것이 6m나 되는 선돌이 3,000여 개 이상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약 4㎞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다. 대체로 기원전 4500~3500년경의 선-켈트(pre-Celtic) 주민이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모나 구성하는 개별 선돌의 크기가 다양한 환상 열석이 유럽, 중동, 호주, 일본 등 세계 곳곳에서 확인되지만, 가장 현저한 사례는 유럽에 있다. 영국과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서만도 1,000여 개소가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영국의 스톤헨지이다. 스톤헨지에는 하나하나가 높이 약 4m, 폭 약 2m, 무게 25~30톤 정도의 선돌 30여 개를 둥글게 세우고 그 위에 무게 6~10톤의 길쭉한 판석을 얹어 연결하고 그 안에는 선돌 두 개 위에 길쭉한 판석을 얹어 놓은 [[삼석탑|삼석탑(三石塔, trilithon)]] 5개가 말굽 모양으로 배치되어있다. 바깥 열석 원(stonecircle) 주위로 길이 1.3㎞의 도랑과 둑이 돌려져 있다. 이러한 환상 열석은 기원전 3000년대 이후 1500년 동안 대여섯 차례의 증개축이 있었으며, 첫 번째 축조 시점부터 매장 행위나 [[분묘|분묘]]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선사 시대 석상은 세계 곳곳에서 그 사례가 알려져 있는데, 크기나 형태가 다양하다. 칠레 [[이스터섬모아이|이스터섬(EasterIsland)의 모아이(Moai)]]는 그 대표적 사례이다. 모아이는 대체로 72㎞ 가량의 섬 가장자리를 따라 세워졌는데, 원래 1,000여 기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큰 것으로는 길이가 21m, 무게가 160~180톤에 달하는 미완성품이 있기는 하지만 평균적으로는 길이 4m, 아래 지름 1.6m, 무게 13.8톤 정도이다. 고인돌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빈도가 높은 거석 기념물인데, 대부분 무덤이지만 (공동) 무덤을 표시하는 [[묘표석|묘표석(墓標石)]]이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제단(祭壇)]]으로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거석 무덤으로서 고인돌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탁자식고인돌|탁자식(卓子式)]]은 공통된다. 원래 고인돌의 영문 명칭인 ‘돌멘(dolmen)’ 자체가 ‘돌로 된 탁자’를 일컫는 프랑스 브르타뉴(Bretagne)의 고어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은바, 말뜻대로라면 탁자식만이 고인돌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말뜻에 나타난 대로, 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하나의 무덤방에 하나의 [[덮개돌|덮개돌]]이 있는 것이 주된 반면, 서유럽에서는 [[받침돌|받침돌(支石)]]을 몇 개 연이어 세우고 그 위에 여러 개의 덮개돌이 덮인 터널 형태를 이루기도 한다. 터널 형태의 서유럽 고인돌 위에 봉토(封土)가 씌워지면, [[세장봉토분|세장 봉토분(細長封土墳, long barrow)]]이 된다. 한쪽 벽을 이루는 받침돌에 구멍이 뚫린 고인돌도 인도에서 서유럽까지 종종 나타난다. 한편 형태 외에 지역에 따라 매장 방식도 차이가 있다. 대체로 개인 무덤(個人墓)이지만 유럽의 고인돌에는 한 무덤방에 수십 구의 주검(屍身)을 묻는 경우도 있어, 여러 세대에 걸친 공동체의 집단 무덤(集團墓)의 형태도 공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선사 시대 돌널은 유럽과 중동 지역을 비롯하여 구대륙 곳곳에서 확인된다. 원칙적으로 6매의 편평한 돌(板石)로 네 벽과 바닥, 뚜껑을 만들어 상자처럼 매장용 ‘관棺’을 만드는 것이어서 다른 거석 기념물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다. ‘거석’이란 이름을 붙이기는 어렵다. 다만, 유럽에서 보듯 세장 봉토분이나 돌무지와 연관되어, 거석 구조물에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사 시대 돌무지는 구대륙은 물론 신대륙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석상 주위에 소량의 돌이 둘러진 것부터 자그마한 언덕을 이룬 것까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을 포괄하여, 그 정의가 모호하다. 돌무지의 영어 명칭인 ‘케언(cairn)’은 ‘돌의 더미’를 일컫는 스코틀랜드의 고어에서 왔고, 산 정상부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주로 이정표였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실제로는 무덤의 [[봉분|봉분]] 역할을 하는 것도 있다. 이러한 여러 종류의 거석 구조물 중 우리나라 선사 시대에 관련된 것은 고인돌, 돌널, 선돌 정도이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고인돌이다. 개별 고인돌은 탁자식, [[기반식고인돌|바둑판식(碁盤式)]], [[개석식고인돌|덮개식(蓋石式)]], [[돌두름식고인돌|돌 두름식(圍石式)]] 등 몇 가지 형태로 구분이 가능한데, 이 모두를 합치면 한반도는 수와 밀도에서 세계 최대 분포 지역이다. 그 중에서도 덮개식이 가장 많은데, 한반도 고인돌의 2/3 이상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돌멘’의 원 뜻과도 다소 다르고, 무덤방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 많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선돌과 대비되는 ‘뉜 돌capstone-only’처럼 표현되기도 하는바, 단순히 무덤으로만 다루기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신석기시대|신석기 시대]] 축조설’도 있지만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주요 무덤 양식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으로 그 축조는 청동기 시대 전 기간에 골고루 이루어졌다기보다는 길지 않은 특정 시기에 집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돌널은 시베리아에서 중국 동북 지방, 한반도, 일본 열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포를 보이는 대표적인 청동기 시대 무덤 양식이다. 무덤 구덩이, 뚜껑돌, 바닥처리는 물론, 무덤 벽의 축조에서 변이를 보인다. 4매의 편평한 돌로 벽을 만드는 원래 뜻과는 다소 다르지만 덧널 형식의 벽을 가진 무덤도 돌널에 포함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의 것도 있지만 대다수는 중반 무렵, [[돌뚜껑움무덤|돌뚜껑움무덤(石蓋土壙墓)]], [[독무덤|독무덤(甕棺墓)]] 등과 묘역을 이루며 한반도 중·남부로 확산된다. 수는 적지만 다른 거석 기념물과 마찬가지로 선돌도 한반도 전체에서 확인된다. [[태천학봉리유적|태천 학봉리]], [[보령삼계리유적|보령 삼계리]], [[대전교촌동유적|대전 교촌동]], [[청양지곡리유적|청양 지곡리]], [[제천황석리고인돌군|제천 황석리]], [[대구진천동470-38유적|대구 진천동]], [[순천입석리유적|순천 입석리]], [[구례금내리유적|구례 금내리]] 등지에서 확인되는 선돌이 대표적이다. 다만 다른 분묘와의 관계가 분명치 않고, 후대에 민간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여, 정확한 축조 시기를 확신하기는 어려운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 선사 시대 거석 기념물과 관련하여 돌무지는 그다지 활발하게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 등지에서 돌널이 돌무지 아래서 발견되는 경우, [[돌무지돌널무덤|돌무지돌널무덤(積石石棺墓)]]이 되는 점을 감안하면, [[다롄유적|다롄(大連)]], [[강상유적|강상(崗上)]], [[러우상유적|러우상(樓上)]] 등 중국 동북 지방의 돌무지무덤(積石墓), 한반도 남부의 (묘역식) 고인돌의 깐 돌(敷石) 또는 돌무지 부분도 같은 맥락에서 다뤄지기에 충분하다. 거석 문화에는 거석 구조물 자체 외에도 그것이 축조된 사회적 맥락과 역할이 중요하게 자리한다. 제방, 수로, 건물 등과는 달리 실용성이 없지만, 현시성(顯示性)과 내구성이 현저한 거대한 구조물 축조에 막대한 사회적 동력(動力)을 투자한다는 점이 사회적 맥락과 기능을 이해하는 출발이 된다. ‘거석’의 외형상 특징, 웅장함은 단순히 대중의 주목을 끄는 것은 물론, 그것이 없었을 때에 비해 새로워진 경관(景觀, landscape)을 인식하게 한다. 그에 더하여 재질의 내구성은 그러한 인식을 오래 전달하고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 지점이 의미 있는 ‘장소(場所)’가 될 수 있게 해준다. 그러한 장소는 조상을 숭배하고, 여러 의례를 집행하기도 하며, 천문을 관찰하거나 영역을 표시·확인하는 용도로 활용될 수 있다. 현재까지도 선사 시대 거석 기념물이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어 연례적으로 재방문 되고 있음을 보면 장소화의 의미가 충분히 짐작된다. 한편, 이러한 현시성은 [[고고학|고고학]]이 근대 학문으로 성립되기 이전부터 일반 또는 단순 고물 애호가의 관심을 받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라뚜르 도베르뉴(Théophile Malo Corret de la Tour d'Auvergne)의 저작이 돌멘이나 멘히르(menhir)라는 용어가 고고학에 도입된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유럽에서 거석 기념물에 대한 저작은 근대 고고학의 성립 이전 고물 애호가들의 기행문식 기록으로 남은 것들이 적지 않다. [[고려시대|고려 시대]] 이규보(李奎報)의 전라도 금마(金馬) 지역 고인돌에 대한 기록도 그 일례이다. 역설적으로 현시성과 웅장함은 경작 등에 장애로 작동하여 훼손되거나 후대에 석재로 재활용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영국 선사 시대 및 로마 지배기 거석 기념물들이, 수백 개소가 넘는 중세 초기(5~8세기) 무덤 유적들에서 부재(部材)로 사용되거나 중국 동북 지방에서 거대한 스펑(石棚)이 현재에도 세시(歲時)의 기원 장소로 사용되는 등은 널리 알려진 사례이다. 현시성과 더불어 물리적 중량(重量)은 거석 기념물의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기초가 되는데, 거석의 운반에 관련된 노동력 규모와 동원 방식, 축조 기술에 대한 복원이 그 중심에 있다. 수십·수백 톤에 이르는 거석을 운반·건립하기 위해서는 수백 명도 넘는 인력이 소요되었을 수 있는데, 당시의 일반적 취락 규모를 감안하면 여러 취락으로부터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적 기제(機制, mechanism)가 필요하다. 그러한 기제로 신앙·관례에 따른 자발적 참여나 강제적 동원이 대비적으로 상정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념 조작을 통해 두 가지 모두가 하나의 과정에 모두 포함될 수 있다. 다만 축조 당시의 사회·경제적 환경을 보면, 다양한 기제의 상대적 영향력을 추론할 수 있다. 터키 [[괴베클리테페유적|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 유적]]처럼 기원전 9000년보다 이른 [[중석기시대|중석기 시대]] 또는 선 토기(先土器) 신석기 시대 초기에 [[수렵활동|수렵]] [[채집활동|채집]] 경제를 영위하던 집단에 의해 처음 축조된 거석 구조물도 있고 유목 집단도 거석 무덤을 남기는 사례가 적지 않지만, 적어도 거석 기념물의 축조 빈도가 현저해지는 것은 유럽의 신석기 시대나 우리의 청동기 시대처럼 [[농경|농경]] 사회가 정착해가는 시기이다. 그런 맥락에 주목하여 ‘농경 사회의 영역 표시물(territorial marker)’에 관련된 주장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기존 농업 생산 기술의 집약화의 과정에서 (거석) 기념물의 축조가 활발해지는 것은 영역 표시와 같은 기존의 문화적 기제가 강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 복합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은 집단에서도 거석 기념물의 축조는 이루어지고 있지만 트리거(Bruce Trigger)의 지적대로, 개인 간 사회적 불평등과 우두머리에 의해 통제되는 광역(廣域)의 정치체(政治體)를 특징으로 하는 [[복합사회|복합 사회(複合社會, complex society)]]로 진입할 무렵, 거석 기념물의 축조가 활발해진다는 점은 그 사회 정치적 역할의 일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거석의 운반과 축조에 관련된 기술도 거석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기술적 수준을 바탕으로 소요되는 인력 규모를 축소할 수 있다면, 노동력 동원의 기제와 체제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여러 곳에서 축조 실험, 특히 운반 실험이 간헐적이나마 계속 수행되어왔고 그 결과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건이 서로 다르고 실제 운반 거리가 불분명하여 보편적으로 통용되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실험 결과들을 참고하는 정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거석의 채취·운반·건립과 관련된 실험이 행해졌던 모아이의 사례를 보면, 1)슈라(修羅), 나무 썰매와 같은 기구에 눕혀 직접 끄는 방법 2)기중 기구(起重機具)를 활용하여 석상이 놓인 나무 썰매의 운반을 다소 용이하게 하는 방법 3)‘걷는 석상(walking giant)’이라는 구전을 따라 석상 세운 채 아래와 위를 묶어 앞뒤에서 비틀 듯이 운반하는 방법 4)석상을 나무 썰매에 세워 고정한 뒤, 그 아래 통나무를 선로처럼 깔아 끄는 방법 5)석상을 세운 채, 머리만을 세 갈래로 묶어 비틀듯이 운반하는 방법 등을 상정할 수 있다. 다만, 거석 기념물의 범주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구조물의 크기가 천차만별인 만큼, 거석 기념물의 종류, 활용된 축조 기술의 형태, 노동력 동원의 방식, 사회의 성격과 구조 등을 도식적으로 연결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기술의 도움이 없는 상태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구조물의 크기나 수의 현저한 변화는 분명히 중요한 사회 문화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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