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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PLAYTITLE:도계리 유적(慶州 道溪里遺蹟)}} {{유적정보 | 이칭별칭=경주 도계리 유적 | 키워드=[[집자리]], [[깐 돌 유구]], [[도랑]], [[고인돌]], [[민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반달 돌칼]], [[송국리식]], [[검단리식]] | 시대=청동기 | 위치=대한민국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시대편) | 집필연도=2019 | 집필자=윤형규 | 조성 시기=기원전 8~7세기 | 소재지=경주 도계리 유적 | 성격=복합유적 }} ==설명== 경상북도 경주시 서면 도계리 464-5, 733-2, 778-1 일원에 위치한다. 경부고속 도로 언양-영천간 확장 공사에 따라 2012~2018년 34개의 유적을 조사하였고, 그 중 도계리 유적은 중마을 유적Ⅰ(778-1), 중마을 유적Ⅱ(733-2), 도계리 고인돌군Ⅱ(464-5)에 해당한다. 중마을 유적Ⅰ에서는 [[집자리|집자리]] 10기, [[깐돌유구|깐 돌 유구(敷石遺構)]] 7기, [[구|도랑(溝)]] 1기, 중마을 유적Ⅱ에서는 집자리 2기, [[구덩이|구덩이]] 3기, 도랑 2기, 도계리 고인돌군Ⅱ에서는 집자리 7기, [[고인돌|고인돌]] 6기, [[덮개돌|덮개돌(上石)]] 5기, [[묘역식고인돌|묘역식 고인돌]] 50기, 야외 [[화덕자리|화덕 자리]] 1기, 깐 돌 유구 1기, 구덩이 1기 등이 조사되었다. 유적은 [[오봉산|오봉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가지 능선들 사이에 좁게 형성된 작은 선상지에 입지한다.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은 ‘도계’마을 앞의 선정(扇頂) 일대에는 대규모의 무덤군이 축조되어 있으며, 지대가 낮은 북쪽 선단(扇端) 일대에는 주거 공간으로 활용하여 입지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하여 마을이 조영되어 있다. 묘역식 고인돌은 장방형 22기, 원형 22기, 부정형 6기이며, 크기는 다양하다. 상대적으로 큰 무덤을 중앙에 두고 작은 무덤을 덧붙여 조성하면서 하나의 무덤군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호는 장방형이며, 길이 11.2m, 너비 6.2m로 묘역 시설 가장자리에는 [[냇돌|냇돌(川石)]]또는 [[깬돌|깬돌(割石)]]을 이용해 최대 3단까지 [[둘레돌|둘레돌(護石)]]을 쌓았다. 내부에는 자갈과 흙을 채운 후 잔자갈을 한 벌 가량 깔아서 편평하게 다졌다. 그리고 동쪽 경계에 덧붙여 [[딸린무덤|딸린무덤(陪墓)]] 3기를 배치하였다. 10호는 1호와 같은 구조로, 북쪽 둘레돌에 덧붙여 딸린무덤 2기를 나란하게 배치하였다. 원형의 [[묘역|묘역]] 시설을 가진 13호는 지름 9.5m 내외이며, 축조 방법은 1호와 같다. 둘레돌의 가장자리를 따라 동일한 형태의 딸린무덤 13기를 덧붙였다. [[매장주체부|매장 주체부(埋葬主體部)]]는 1호의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1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움무덤|움무덤(土壙墓)]]이다. 특히 7호 내부에는 [[자루간돌검|자루 간 돌검(有柄式石劍)]] 1점이 주검의 허리 부분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무덤 바닥에는 불탄 흔적이 확인되어 화장(火葬)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자루 간 돌검과 [[슴베간돌살촉|슴베 간 돌살촉(有莖式磨製石鏃)]] 등이 확인되었으나 대부분 잔 편(殘片)으로 무덤에 비해 출토 유물은 빈약하다. 묘역식 고인돌은 [[경주전촌리유적|경주 전촌리]], [[김해율하리유적|김해 율하리 유적]] 등을 비롯하여, 랴오둥 반도의 [[다롄강상돌무지무덤|강상(崗上)]]·[[다롄러우싸앙유적|러우상(樓上) 유적]]과 비슷한 구조이지만 축조 방법 및 매장 방식은 다른 특징을 나타낸다. 무덤에서 수습된 목탄 시료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1호는 2590±30 BP, 12-2호는 2540±30 BP로 기원전 8~7세기에 해당한다. 고인돌은 묘역 시설 주변에 분포하며, 4호는 길이 4.95m, 너비 2.72m, 높이 2.28m, 무게 48톤으로 가장 크다. 하부에는 [[받침돌|받침돌(支石)]]이 놓여져 있으나 별도의 매장 시설은 갖추지 않았다. 이러한 구조는 [[경산평기리유적|경산 평기리]], 삼성리, [[영덕우곡리유적|영덕 우곡리]], [[밀양전사포리유적|밀양 전사포리 유적]] 등에서도 다수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대부분 장방형으로 크기는 다양하며, 중마을 유적Ⅰ의 Ⅱ-3호는 길이 11m로 가장 크다. 내부에서는 화덕 자리와 [[벽도랑|벽 도랑(壁溝)]] 이 일부 확인되며, 바닥은 불로 다진 흔적도 확인되었다. Ⅳ-9호에서는 사용 이후에 각종 석재와 잔자갈을 함께 쌓아 길이 1.5m, 너비 0.5m의 돌무지(積石)로 폐기한 예도 있다. 유물은 [[골아가리|골아가리]]·[[구멍무늬|구멍무늬(孔列文)]]·횡방향의 [[낟알무늬|낟알무늬]]가 새겨진 [[항아리|항아리(壺)]]와 [[바리|바리(鉢)]] 등을 비롯해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가락바퀴|가락바퀴]], [[반달돌칼|반달 돌칼]], [[양날돌도끼|양날 돌도끼(兩刃石斧)]] 등이 출토되었다. 유적은 무덤과 집자리에서 보이는 다양한 축조 방법과 출토 유물 등을 통해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검단리식집자리|검단리식]]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특징이 모두 확인된다. 이를 통해 무덤의 변천과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경주 지역의 소국 형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국고고학저널== * "[http://portal.nrich.go.kr/kor/journalUsrDtlView.do?menuIdx=801&idx=15&d_idx=380 경주 지역에서 대규모 묘역지석묘 유적이 처음으로 조사되다]", <i>2015 한국고고학저널</i>. [[분류:한국고고학사전]]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시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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