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슴베찌르개[剝片尖頭器]

한국고고학사전
(박편첨두기에서 넘어옴)


슴베찌르개
기본 정보
동의어 유경 첨두기, 박편 첨두기
시대 구석기 시대
관련 정보
유적 단양 수양개 구석기유적, 대전 용산동 구석기 유적, 대전 용호동 유적, 밀양 고례리 유적, 진안 진그늘 유적
키워드 슴베 석기, 찌르개, 수렵 도구, 돌날 기법, 격지, 수렵 활동, 가공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구석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23
집필자 장용준



설명

슴베는 칼, 호미, 낫 따위에서 자루 속에 틀어박히는 뾰족한 부분을 뜻하는 우리말이며, 찌르개는 창끝에 매달아 수렵 도구로 사용하는 부속품이다. 즉, 슴베찌르개는 자루에 끼우거나 묶을 수 있는 슴베가 있으면서 끝이 뾰족하고 날이 날카로운 찌르개를 말한다. 슴베찌르개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고 있으나, 박편 첨두기, 유경(有莖) 첨두기로도 불린다. 슴베찌르개의 예비 소재는 돌날이나 긴 격지다. 석기의 선단부는 뾰족하게 조정하고, 날과 슴베는 60~80°로 배면에서 등면 쪽으로 조정하여 만들었다. 이등변삼각형에 슴베가 달린 형태며, 좌우대칭이 되도록 만들었다. 예비 소재의 타면 부위가 주로 슴베가 되고, 말단부를 선단부로 정해 작업한 사례가 우세하다. 후기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수렵 도구로 자루에 끼워서 사용했는데,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특특한 형식의 찌르개다. 돌날 기법으로 생산한 모양이 좋은 돌날이나 너비보다 길이가 긴 격지를 활용해서 만들었다. 슴베찌르개는 측면의 날을 칼로 사용하거나 톱니날을 가공구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는 1960년 히라조라(平澤良) 유적 조사에서 처음으로 박편 첨두기가 출토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슴베찌르개가 발견된 유적은 1970년대 초 발굴된 공주 석장리 유적이다. 당시에는 ‘슴베찌르개’가 아니라 ‘뚜르개’로 보고되었다. 그 후 슴베찌르개에 대해 별다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다가, 1980년대 중반 단양 수양개 유적에서 출토된 슴베찌르개 49점이 슴베찌르개 연구의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이후 슴베찌르개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주요 석기로서 주목받았고, ‘슴베찌르개’라는 명칭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북한을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슴베찌르개가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1990년대에 밀양 고례리, 대전 용호동 유적, 2000년대에 순천 월평, 진안 진그늘, 포천 화대리 쉼터, 남양주 호평동, 대전 용산동, 장흥 신북, 청원 노산리, 임실 하가, 단양 수양개(Ⅵ지구), 고양 도내동 유적 등 약 30여 곳에서 슴베찌르개가 출토되었으며, 그 수량은 300여 점이 넘는다. 슴베찌르개를 만드는 데는 이암, 유문암, 혈암, 반암, 응회암 등의 규질제 돌감을 사용했다. 이러한 돌감은 후기 구석기 시대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대부분 유적 주변에서 구할 수 있었다. 좀돌날이 출현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흑요석으로 만든 광주 삼리 유적 출토 찌르개는 돌날을 소재로 하지 않았으며, 전통적인 슴베찌르개와는 차이가 있었다. 흑요석은 슴베찌르개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유적 주변에서 구하기 힘든 돌감이었기 때문이다.

슴베찌르개는 후기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석기로 4만 년 전 이후부터 출현한다. 고양 도내동 출토 슴베찌르개와 대전 용호동 출토 슴베찌르개를 근거로 중기 구석기 시대부터 슴베찌르개를 사용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슴베찌르개가 출현한 시기의 유적으로는 대전 용호동, 단양 수양개(Ⅵ지구), 전주 봉곡 유적이 있다. 대전 용호동 유적에서는 슴베찌르개 2점이 출토되었다. 한창균은 Ⅲ문화층(38,500±1,000 BP보다 아래 지점)에서 출토된 슴베찌르개를 중기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보고하였다. 하지만 슴베찌르개를 만든 돌날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전주 봉곡 유적의 자료를 참조하면 중기 구석기 시대로까지 소급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대전 용호동 유적 출토 슴베찌르개 2점은 4만 년 전에서 3만 년 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된다. 단양 수양개 유적(Ⅵ지구)의 4문화층에서는 돌날과 더불어 슴베찌르개 73점이 출토되었는데, 4문화층은 41,874~41,254cal BP로 보고되었다. 3문화층에서도 돌날과 슴베찌르개 13점이 출토되었다. 4문화층과 3문화층에서는 돌날 기법으로 돌날을 생산했고, 4문화층의 돌날 기법은 능조정 방식을 활용했다. 전주 재경들 유적에서는 슴베찌르개 1점이 출토되었다.

슴베찌르개는 어느 부위에 조정이 이루어졌는지와 축 방향에 따라 형식을 분류할 수 있다. 손질 부위에 따라 슴베만 조정한 것, 슴베와 끝부분을 조정한 것, 슴베와 한쪽 가장자리를 조정한 것, 모든 가장자리를 조정한 것으로 나뉜다. 예비 소재의 축이 틀어지면서 도구 축이 휘어져 경사 축으로 만들어진 사례도 있다. 슴베찌르개의 예비 소재 대부분이 돌날이나 긴 격지인 점을 감안하면, 슴베찌르개는 돌날 기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모양이 좋은 돌날은 대칭성이 우수한 수렵 도구를 만들 수 있게 해 준다. 슴베찌르개를 제작할 소재 격지는 일반적으로 길이 10cm 내외이며 두께 5~10mm 내외인 돌날로 아주 얇고 측면에서 봤을 때 직선적인 것을 대체로 선호했으나 휘어진 사례도 있다. 단양 수양개 유적(Ⅰ지구)의 사례를 참조하면 돌날은 길이와 너비의 비율이 2:1~3:1이었고, 길이는 40~80mm, 너비는 10~30mm인데, 슴베찌르개의 크기도 이와 양상이 비슷하다.

슴베찌르개는 유적 내에서 완성품으로 출토되기도 하지만 몸체가 부러진 상태로 출토되거나 슴베만 출토되는 사례도 있다. 진안 진그늘 유적과 단양 수양개 유적(Ⅰ·Ⅵ지구)에서는 슴베찌르개를 대량으로 제작했으며, 밀양 고례리 유적과 대전 용산동 유적에서는 슴베찌르개를 제작했으나 돌날의 출토량과 슴베찌르개의 파손 상태를 보면 폐기품이 함께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슴베찌르개는 일본 규슈(九州)지역을 중심으로 주로 발견되는 박편 첨두기의 기원이 되었다. 약 2만 5천 년 전에서 2만 년 전 사이에는 해수면이 하강하여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대한 해협을 도보로 건널 수 있었다. 이 때 한반도의 현생 인류는 슴베찌르개를 지니고 일본 열도로 이동했다. 밀양 고례리 유적의 슴베찌르개와 규슈 오이타(大分)현 이와토(岩戸) D 유적의 박편 첨두기는 아주 흡사하다. 일본의 박편 첨두기는 현지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반도의 출토품보다 더 크고 무겁게 만들어졌다.

슴베찌르개는 동북아시아 지역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석기다. 돌날 기법과 더불어 현생 인류의 등장과 깊이 관련된다. 이러한 정형화된 형식이 환동해안 지역에 걸쳐 넓은 범위에 분포한다는 점에서 당시 집단 간에 공통적인 석기 제작 기술을 보유하는 현상이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구석기 시대의 슴베찌르개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유한 석기 형식이자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교류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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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