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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당리 고인돌군[高敞 溪堂里支石墓群]

한국고고학사전
(계당리 고인돌군에서 넘어옴)


계당리 고인돌군
기본 정보
동의어 고창 계당리 고인돌군, 고창 계당리 지석묘군
시대 청동기 시대
국가 대한민국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성송면 계당리 1131·40 일원
관련 정보
성격 고인돌
키워드 고인돌, 바둑판식 고인돌, 송국리 문화, 주형고인돌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19
집필자 김진



설명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성송면 계당리 1131·40 일원에 위치한다. 1984년 ‘선동마을 지석묘군Ⅱ’로 보고된 이후 2012년 고창 선동 지구 지표수 보강 개발 사업에 앞서 조사하였다. 고인돌은 성송면 계당리 선동마을에서 서남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선동저수지와 경지정리 사업이 이루어진 논 사이에 위치한다. 청동기 시대 기둥 모양 받침돌(柱形支石)이 있는 고인돌 1기(1호)를 비롯하여 바둑판식(碁盤式) 고인돌 2기(4·8호)와, 덮개돌(上石) 및 받침돌(支石)로 추정되는 석재 6기 등 총 9기의 고인돌이 확인되었다.

기둥 모양 받침돌(柱形支石)이 있는 고인돌 1기와 바둑판식 고인돌 2기를 제외하면, 나머지 덮개돌 6기는 대부분 선동 저수지와 농경지 조성 등으로 대부분 이동되거나 훼손되어 받침돌이나 매장 주체부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고인돌은 논두렁에 걸쳐 자리하고 있으며, 장축은 고인·돌군 서쪽에 자리한 낮은 산자락의 등고선과 나란한 북동-남서 방향이고, 선동 저수지가 자리한 일대에 하천 방향과 평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덮개돌의 평면 형태는 제형(梯形), 원형, 삼각형, 방형, 부정형(不定形) 등 다양하며, 단면 형태는 대부분 장방형이다. 1호는 길이 6.12m, 너비 2.94m, 두께 0.8m이다. 2호는 길이 4.3m, 너비 1.15m, 두께 0.6m이고, 3호는 길이 3.8m, 너비 2.5m, 두께 0.5~0.8m이다. 5호는 길이 2.4m, 너비 1.9m, 두께 0.25~0.6m, 6호는 길이 2.2m, 너비 1.45m, 두께 0.45m, 7호는 길이 2m, 너비 2m, 두께 0.3~0.6m이다. 8호는 길이 1.9m, 너비 1.9m, 두께 0.55~0.7m이며, 하부에서 받침돌으로 추정되는 석재 1매가 노출되었다. 9호는 길이 5m, 너비 1.42m, 두께 0.45~1.1m이다. 덮개돌의 무게는 3~22톤까지 다양하며 특히 1호와 4호의 무게가 22톤과 17톤이고, 5~7호의 무게가 가장 가볍다. 덮개돌로 사용된 석재는 화강암제로, 유적이 자리한 선동마을 뒤에 위치한 구황산 자락에 화강암반이 발달된 것으로 보아 고인돌의 덮개돌 채석은 이 일대의 암석을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받침돌이 확인된 고인돌은 1·4·8호로, 이 중 1호는 온전하게 받침돌이 남아있는 주형고인돌이고, 4호와 8호의 받침돌은 일부 유실된 바둑판식이다. 1호 받침돌은 4개로 기둥 형태(柱形)이고 육안으로 보아도 비교적 안정적인 장방형의 배치로 덮개돌을 안정적으로 떠받치고 있고, 주형고인돌의 특성상 매장 주체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받침돌의 최대높이는 1.1m 정도이고, 단면 형태는 제형, 삼각형, 사각형으로 다양하다. 받침돌 사이의 거리는 동서 길이 0.43~0.74m, 남북 길이 1.38~1.64m 정도이다. 받침돌은 땅을 원형으로 굴광하여 세운 뒤 작게 깬돌(割石)과 흙을 채웠다. 4호 받침돌은 3기가 남아 있으며 최대 높이 0.5m 정도이고, 남은 3기의 단면 형태는 원형(2개), 방형(1개)에 가깝다. 받침돌 사이의 거리는 동서 길이 2.9m, 남북 길이 1.9m 정도이다. 8호는 원래 위치에서 이동된 것으로 추정되며 받침돌 1개가 남아있는데 단면 형태는 장방형이고, 받침돌의 형태로 보아 바둑판식으로 추정된다. 4호와 8호는 판돌(板石), 깬돌(割石), 강돌(川石) 등을 사용하였다. 2호 덮개돌 아래에서는 묘역 시설이나 매장 주체부 바닥 시설로 추정되는 석렬(石列)이 확인되었는데, 크기 15~20㎝ 내외의 편평한 석재를 사용하였다. 평면 형태는 타원형에 가깝고, 장축은 덮개돌과 같은 북서-남동 방향이며, 잔존 규모는 길이 2.6m, 너비 1.3m 내외이다.

고창 계당리 고인돌에서는 매장 주체부와 출토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는데 이는 고인돌이 지상식으로 조성되어 후대 훼손으로 유실되었을 가능성과 축조 당시부터 매장 주체부를 만들지 않은 것으로 제단 또는 기념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고인돌은 고창 일대와 전남 영광, 장성, 승주, 화순, 곡성, 영암, 무안 등 여러 지역에 분포한다.

고인돌의 축조 시기 역시 출토 유물과 연대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명확하지 않지만, 기둥 모양 받침돌이 있는 고인돌, 바둑판식 고인돌과 매장 주체부가 확인되지 않는 고인돌의 형식 등을 통해 볼 때 청동기 시대 송국리 문화 단계 이후로 추정된다. 또한 일부 덮개돌에는 알 구멍(性穴)을 비롯하여 후대에 음각으로 새겨진 ‘광김천(光金阡)’, ‘을유사 대손윤석(乙酉四代孫允錫)’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특히 명문은 18세기 이후 이 일대가 광산(光山) 김씨 집성촌과 관련되어 후대에 묘표석(墓標石)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고창 계당리 고인돌과 같이 고창군의 기둥 모양 고인돌은 성송면 일대에 집중 분포하며 인근의 계당리 고인돌2, 암치리, 판정리에서도 확인된다. 계당리 고인돌은 발굴 조사 이후 계당리 40 일원으로 옮겨져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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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