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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평리 유적(淸州 宮坪里遺蹟)

한국고고학사전
(청주궁평리유적에서 넘어옴)


궁평리 유적
기본 정보
동의어 청주 궁평리 유적
시대 청동기 시대
국가 대한민국
소재지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궁평리 315·316-28·319-19 일원
관련 정보
키워드 구덩이, 바리 토기, 송국리식 집자리, 가마터, 한뎃가마, 지상 가옥, 오송 통일 신라 시대 취락 유적, 가락동식 집자리, 화덕 자리, 방형 집자리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19
집필자 이소영



설명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궁평리 315·316-28·319-19 일원에 위치한다. 1993년 충북대학교 선사문화연구소가 경부 고속 철도 구간 발굴 조사로 집자리 6기, 가마터(窯址) 3기, 지상 가옥 1기를 확인하였으며, 이 유적의 양 옆에 해당하는 호남 고속 철도 구간을 2001년 한국고고환경연구소 조사하여 집자리 14기와 구덩이 130기를 확인하였다. 이후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행복 도시~오송역 도로 건설 구간을 2010년 동방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하여 집자리 1기와 구덩이 29기를 확인하였다.

1993년 조사된 집자리는 심하게 파괴되었고 출토 유물이 많지 않아 명확한 성격을 파악할 수 없지만, 크기가 작고 가마터에 인접하고 있어 작업 공간으로 이용된 구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상 가옥은 기둥 구멍 열이 타원형을 이루고 내부에 불피운 자리가 확인된다.

가마는 모두 한뎃가마(露天窯)로 그 가운데 형태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3호의 경우 특별한 바닥 처리없이 원형을 이루고 있고, 한 쪽에 깨진 돌을 깔은 원형의 작은 유구가 부속되어 있다. 가마터 내부에서 채취한 숯 분석 결과 참나무과로 밝혀져 열효율이 좋은 땔감을 선별 벌채하여 사용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출토 유물은 민무늬 토기 편과 붉은 간 토기가 출토되었다. 1호 가마터에서 1855±235 BP와 2500±115 BP, 2호 가마터에서 2570±235 BP, 3호 가마터에서 2795±110 BP 등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값을 얻었다.

2010~2011년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집자리는 장방형 1기, 방형 8기, 원형 5기로 돌 두름식 화덕 자리(圍石式爐址)를 설치한 가락동식의 장방형 1기를 제외한 13기가 송국리식 집자리 또는 원형·방형 평면에 화덕이 시설된 집자리다. 장방형 집자리에서 토기 편 및 돌대팻날(扁平片刃石斧), 석환(石環)이 출토되었고 송국리식 집자리 또는 방형 집자리에서는 바리 토기(鉢形土器)와 붉은 간 토기, 완(碗)을 중심으로 한 토기와 숫돌(砥石), 돌살촉(石鏃), 석환(石環) 등의 석기가 확인되었다.

구덩이는 원형, 방형, 타원형, 부정형을 띠지만 타원형(57%)과 원형(18%)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규모는 1~2.5m 내외로 소형의 비중이 높다. 내부에서 기둥 구멍과 화덕 자리가 확인되기도 한다. 내부에서는 민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편과 함께 돌살촉, 돌검(石劍), 반달 돌칼, 홈자귀(有溝石斧) 등이 출토되었다. 내부 시설 및 출토 유물로 유추해볼 때 이 구덩이들은 폐기장, 저장 구덩이, 야외노지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연대값은 집자리에서 2440±40 BP, 2470±40 BP, 구덩이에서 2490±40 BP 등을 얻어 비슷한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약 100m 떨어진 2010년 조사 유적에서는 인접한 2개의 타원형 화덕이 설치된 장방형 집자리 1기와 구덩이 29기로 바리 토기, 외반 구연 토기(外盤口緣土器), 역사다리꼴 돌칼 등이 조사되었다. 연대값은 집자리에서 2450±22 BP, 6호 구덩이에서 2507±21 BP 을 얻었다.

궁평리 유적은 송국리식 집자리와 화덕 자리가 설치된 방형 집자리가 함께 확인된다는 점과 비교적 늦은 시기에 많이 나타나는 외반 구연 옹의 출토량은 적고 바리 토기가 중심을 이룬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집자리에 수에 비해 구덩이의 수가 다수인 유적이라는 점에서 유구 간의 관계나 기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철도 및 도로 건설 공사로 선형 구간에 대한 제한된 조사만 진행된 점을 감안하더라도 인접한 유적 간의 시기 등을 고려하면 현재 알려진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큰 취락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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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