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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 화덕 자리[新石器時代爐址]

한국고고학사전


신석기 시대 화덕 자리
기본 정보
동의어 노지, 노 시설
시대 신석기 시대
관련 정보
유적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서울 암사동 유적, 양양 용호리 유적, 인천 용유도 남북동 유적
키워드 야외 화덕 자리, 돌더미 유구
사전 정보
수록 사전 한국고고학전문사전(신석기 시대 편)
집필 연도 2024
집필자 홍은경



설명

화덕은 불을 이용하기 위한 시설로, 난방이나 취사 또는 조명 등을 목적으로 집자리 내외에 설치되었다. 화덕 자리는 화덕이 설치되었던 자리를 의미한다. 한국에서 화덕은 신석기 시대부터 흔히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 시대 이후에는 이동이 가능한 화덕인 화로도 등장한다.

신석기 시대의 화덕은 크게는 별다른 시설 없이 구덩이를 파서 만든 것과 진흙이나 돌을 이용하여 일정한 규모의 공간을 확보한 것으로 분류되며, 형태와 구조에 따라 더 세분되기도 한다. 구덩식[竪穴式]은 바닥을 약간 판 다음 별다른 추가 시설 없이 구덩이에 불을 피우는 방식으로, 무시설식으로도 불린다. 지역 및 시기와 상관없이 가장 간단하게 사용된 형태일 것으로 추정된다. 두름식은 화덕 시설 주변을 돌이나 진흙으로 둘러 불이 번지지 않도록 만든 것이며, 대부분은 돌을 이용하여 만들기에 돌두름식[圍石式]이라 부른다. 돌두름식은 구덩이를 파고 돌을 두른 것과 땅을 파지 않은 바닥 면에 바로 돌을 두른 것으로 나뉜다. 돌더미식[集石式]은 바닥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강돌이나 깬 돌을 채워 넣은 것이다.

신석기 시대 집자리 내부에서는 주로 구덩식 화덕과 돌두름식 화덕이 확인되며, 돌더미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평면 형태는 방형, 원형, 장방형, 타원형 등으로 다양하지만, 크기는 비교적 비슷하여 지름 0.3~0.5m 정도인 것이 대부분이다. 지름이 1m 이상인 경우도 있지만, 예외적인 사례이다. 보통은 집자리 가운데에 1개만 설치되지만, 나선 서포항 유적 9호 집자리에서와 같이 하나의 집자리에서 5개가 발견되기도 한다. 또 화덕 자리 2~3개가 겹쳐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동시에 사용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이전에 사용하던 화덕을 폐기하고 인접하여 새로운 화덕을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한편, 야외 화덕 자리는 집자리 외부의 화덕 자리를 총칭한다. 주거 유적의 집자리 밖에 있는 화덕 자리는 물론, 조개더미 유적이나 인천 남북동 유적에서처럼 해안가에 화덕 자리만 군집을 이루고 있는 경우도 이에 포함된다. 야외 화덕 자리는 집자리 내부에서 발견되는 화덕 자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구덩식, 돌두름식, 돌더미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집자리 내부에서 구덩식과 돌두름식이 주로 확인된 것에 비해 야외 화덕 자리는 돌더미식이 가장 흔하다는 차이가 있다. 실험에 따르면, 돌더미식 화덕이 구덩식 화덕이나 돌두름식 화덕보다 더 긴 시간 보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많은 돌이 온도 유지와 통풍 등에 유리하게 작용하여 화덕의 기능성을 높이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화덕 자리의 정확한 기능은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 파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험 고고학, 민족지 자료를 통한 유추, 유구 내 잔존 유기물 분석 등을 통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연구된 바에 의하면 야외 화덕 자리는 주로 음식물의 조리와 가공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야외 화덕 자리에서는 돌더미식 화덕 자리가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돌더미식 화덕 자리는 돌의 배치나 잔존 상태에 따라 그 형식을 세분할 수 있는데, 이러한 차이가 각기 다른 조리 방식을 반영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다른 유구가 확인되지 않으면서 야외 화덕 자리만 발견되는 인천 남북동 유적이나 양양 용호리 유적 등은 특정 식용 자원의 채취와 조리, 섭취 및 가공을 목적으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단기간 점유했던 한정 행위 장소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부 대형 돌더미식 야외 화덕 자리를 토기 가마, 제염(製鹽)과 같이 특수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시설물로 파악하는 연구자도 있으므로 앞으로의 연구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청동기 시대까지 큰 변화가 없던 화덕 자리는 이후 고대 국가 형성기에 이르러 춘천 중도 일대를 비롯한 북한강, 임진강, 한강 일원의 집자리에서 부뚜막 내지는 쪽구들과 공존하다가 점차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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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