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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고고학사전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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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19:24:35Z</updated>
	<subtitle>사용자 기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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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523&amp;diff=27159</id>
		<title>600-152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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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5:32: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선제리 유적(群山 船堤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선제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군산 선제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옥구읍 선제리 108-16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고인돌]], [[패총]], [[돌무지널무덤]], [[나무널무덤]], [[검파형 청동기]], [[청동 검]], [[청동 도끼]], [[청동 지우개]], [[청동 끌]], [[검은 간 토기]], [[덧띠 토기]]&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김규정&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옥구읍 선제리 108-16 일원에 위치하며 옥구읍 선제리의 북동쪽 해발 17.5m 내외의 독립 구릉상에 입지한다. 유적 주변으로 [[고인돌|고인돌]], 청동기~삼국 시대 [[조개더미|패총]], 유물 산포지, 고분군 등이 분포하고, 주변으로 낮은 구릉과 너른 평지가 펼쳐져 있다. 유적이 형성될 당시에는 유적 가까이까지 바닷물이 유입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제 강점기에 간척 사업으로 대부분 농경지로 변했다. 선제리에서는 [[돌무지널무덤|돌무지널무덤(積石木棺墓)]] 1기와 시대 미상의 구덩이, 조선 시대 [[나무널무덤|나무널무덤(木棺墓)]]이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돌무지나무널무덤(積石木棺墓)의 장축 방향은 등고선과 직교하는 남북 방향에 가깝고, 평면 형태는 말각 장방형이다. 무덤은 생토층인 회백색 및 적갈색 풍화 암반층을 수직에 가깝게 판 후 바닥에 판판한 깬돌(割石)을 깔고 부장품을 넣고 4벽에 판판한 깬돌을 놓은 후 그 위에 장방형 판돌(板石) 여러 매를 이용하여 뚜껑을 덮었다.&lt;br /&gt;
&lt;br /&gt;
무덤 구덩이의 규모는 길이 2.19m, 너비 0.54~0.64m, 깊이 0.3~0.54m이다. 뚜껑돌과 바닥 면에 깔려 있는 돌 사이의 공간은 0.1m 정도로 토층상에서 나무널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무덤구덩이|무덤 구덩이]] 가장자리를 따라 판판한 깬돌이 놓여 있고 상부에 석재들이 전체적으로 중앙부로 함몰된 것으로 보아 나무널(木棺)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벽 가장자리에 돌들이 놓여있는 상태에서 종단면이 ‘U’자 모양을 띠어, 통나무로 만든 널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바닥 면에 깔린 판판한 깬돌 위에는 일부 유기물 흔적이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부장품은 대부분 바닥에서 출토되었는데 [[검파형청동기|검파형 청동기(劍把形銅器)]] 3점, [[청동검|청동 검(靑銅劍)]] 8점, [[청동도끼|청동 도끼(銅斧)]] 1점, [[청동지우개|청동 지우개(銅釶)]] 1점, [[청동끌|청동 끌(銅鑿)]] 1점, 미상 청동기 1점 등의 청동기류와 [[검은간토기|검은 간 토기(黑色磨硏土器)]] 1점, [[덧띠토기|덧띠 토기(粘土帶土器)]] 1점 등의 토기류, 천하석제 [[환옥|구슬(丸玉)]] 113점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검파형 청동기는 중앙부와 서쪽 긴 벽에 인접하여 출토되었는데 가운데가 절단된 상태로 출토되었으며, 청동 검은 검파형 청동기가 출토된 중앙부에 집중적으로 놓여 있었으며, 일부 청동 검은 일부러 파쇄하여 매납하였다. 또한 벽석 해체 과정에 서쪽 긴 벽석과 무덤 구덩이면 사이에서 청동 검 편 1점이 수습되었다. 청동 도끼와 청동 지우개는 검은 간 토기와 덧띠 토기가 껴묻어진 북쪽 짧은 벽에 인접하여 출토되었다. 청동 지우개의 경우 흩어져서 편으로 출토되어 의도적으로 파쇄하여 부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구슬은 바닥 면에 전체적으로 깔려서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검파형 청동기는 부식이 심하게 진행되어 전체적으로 청동녹혹이 남아 있으며, 잔존 상태가 좋지 않다. 길이 24.5㎝, 중앙부 너비(상단5.9㎝, 하단 5.7㎝), 마디 복원 너비 7.7㎝, 상단부 복원 길이 15.3㎝, 너비 2.2㎝, 하단부 복원 길이 11.5㎝, 너비 2㎝, 전면 꼭지 길이 1.8㎝, 꼭지 너비 1㎝, 꼭지 높이 1~2.7㎝, 꼭지 고리 지름 2.7㎝, 내면 꼭지 길이 0.9~1.1㎝, 꼭지 너비 0.5~0.7㎝, 꼭지 높이 0.7㎝이다. 잔존 상태가 양호한 검파형 청동기는 중앙에 마디가 형성되어 있으며 마디를 경계로 상·하단으로 구분된다. 마디 부분은 약간 돌출되어 있으며 상·하단 중앙부가 최소 너비가 형성되어 있고, 양쪽 가장자리는 나팔상으로 벌어져 있다. 상·하단 양쪽 가장자리는 초승달 모양 에 가깝다. 중앙의 마디를 중심으로 상·하단에 각각 주연의 윤곽과 병행하게 내구와 외구로 나누어 2조의 선문대를 돌리고 각 선문대에는 다시 외구와 내구로 나누어 [[빗금무늬|빗금무늬(斜線文)]]와 삼열점선문이 새겨져 있다. 상단부와 하단부 문양은 외구와 내구에 동일하게 밖에는 단사집선문, 안쪽에는 삼열 점선문이 표현되어 있다. 단사집선문대에는 좌·우 대칭하여 ‘Z’자 문양대로 구획되었고, 상·하단에도 ‘Z’자 문양이 반복적으로 구획되었다. 상·하 양단 중앙에서 약간 위쪽으로 치우쳐 반원형 꼭지가 부착되어 있다. 꼭지는 반원형이고 상·하단 모두 꼭지의 표면에 수평의 집선문이 있다. 꼭지에는 새끼를 꼬아 만든 것같은 원형 고리가 달려 있는데 상단은 대부분 결실되었으나, 하단은 완벽하게 남아 있다. 상단에 부착된 꼭지를 중심으로 ‘Y’자 문양대가 형성되었고, 꼭지 위쪽에는 2열 방형의 점열문, 꼭지 아래쪽은 2조의 2열 방형 점열문이, 꼭지 표면에는 수평의 집선문이 새겨져 있다. 하단부에도 꼭지를 중심으로 아래쪽에 하단이 넓은 ‘I’자 문양대가 있으며 위쪽은 수평의 2열의 방형점열문, 아래는 4열의 이등변 삼각형 무늬가 하단으로 가면서 넓어지게 새겨져 있다. 내면은 주연부를 따라 4조 선문이 확인되며 안쪽은 비교적 매끄럽지만, 마연흔이 확인되지 않는다. 내면에는 상단 2개, 하단 1개의 반원형 꼭지가 부착되어 있다. 내면의 꼭지는 전면에 부착된 꼭지에 비해 소형이며 문양은 없다.&lt;br /&gt;
&lt;br /&gt;
청동 검은 모두 8점이 출토되었는데 부식이 심하여 상태가 좋지 않다. 동검은 결입부와 절대가 형성되어 있다. 잘 남아 있는 동검은 길이 30.3~31.7㎝로 대체로 30㎝ 내외로 추정된다. 청동 도끼는 길이 4.6㎝, 견부 너비 3.5㎝, 신부 너비 2.55㎝, 신부 두께 0.8㎝, 공부 너비 3㎝, 공부 두께 1.4㎝, 인부 너비 0.4㎝로 소형이다. 날刃部은 반달 모양을 이루고 있다. 공부에는 3조의 돌선으로 만들어진 돌대부로 마무리하였다. 돌대부와 경부 사이가 최소 너비가 형성되어 있다. 날은 한쪽에만 날을 세웠으며 공부와 신부 측면은 합범 흔이 잘 남아 있다. 청동 지우개는 신부 일부만 남아 있으며 신부의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으로 추정된다. 중앙부는 등날이 돌출되어 있으며 양 측면에 인부가 형성되어 있다. 단면은 등면이 볼록하고 뒷면은 직선을 이룬다. 청동 끌은 공부와 인부가 결실되었다. 전체적으로 부식이 심하게 진행되어 잔존 상태가 좋지 않다. 신부 측면은 합범흔이 잘 남아 있다. 관상형 청동기는 한쪽 부분이 결실되고 전체적으로 부식이 심하게 진행되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지만, 중앙부가 넓고 양쪽 가장자리로 가면서 좁아져 있고. 평면 형태는 원통형이며 단면 형태는 원형이다. 천하석제 환옥은 모두 131점이 출토되었다. 크기는 길이 0.4~0.7㎝, 지름 0.1~0.65㎝이다. 가운데 원공은 한 쪽에서 뚫은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양쪽에서 투공하였으며 크기에 비해 구멍이 넓다.&lt;br /&gt;
&lt;br /&gt;
검은 간 토기는 아가리가 약간 결실되었다. 저부는 평저로 약하게 굽이 형성되었고 곡선을 그리며 벌어져 올라가 몸통 하위에서 최대 지름을 이룬다. 몸통는 완만한 곡선으로 내만하여 올라가 직립된 아가리와 연결된다. 몸통와 아가리가 연결되는 부분은 약하게 홈이 돌아간다. 아가리는 직립되어 올라가 밖으로 살짝 바라진다. 전체적으로 검게 마연하였으나 대부분 박락되었다. 태토는 세사립이 포함된 점토이다. 잔존 높이 13.1㎝, 경부 지름 7.8㎝, 바닥 지름 7.5㎝, 몸통의 최대 지름 13.8㎝이다.&lt;br /&gt;
&lt;br /&gt;
덧띠 토기는 바닥은 편평하고 약하게 굽이 형성되었다.  약간 사선으로 벌어져 올라가 몸통 아래쪽에서 가장 넓고 거의 수직에 직립에 가깝게 완만하게 내만하여 올라가 그대로 아가리를 형성한다. 아가리에 둥근 덧띠를 부착하였으나 덧띠 두께는 일정하지 않다. 높이 14.5㎝, 구경 10.3㎝, 바닥 지름 6.8㎝, 몸통의 최대 지름 11.8㎝이다.&lt;br /&gt;
&lt;br /&gt;
선제리 돌무지나무널무덤은 기존에 조사된 [[아산남성리유적|아산 남성리]], [[예산동서리유적|예산 동서리]], [[대전괴정동유적|대전 괴정동]] 돌무지나무널무덤들과는 달리 규모가 소형에 속한다. 특히 선제리에서 출토된 검파형 청동기는 지금까지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대전 괴정동 등 3개 유적에서만 각 3점씩 출토되었을 뿐이다. 위의 세 유적은 모두 무덤이 파괴된 상태로 신고되어 수습 조사되었지만, 선제리는 정식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으로 무덤의 구조와 [[껴묻거리|꺼묻거리]]의 출토 상태가 명확하게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lt;br /&gt;
&lt;br /&gt;
군산 지역 초기 철기 시대 유적으로는 선제리 외에 나무널무덤이 확인된 [[군산나운동유적|군산 나운동]]과 매납 유구가 조사된 관원리가 있있다. 선제리 유적이 돌무지나무널무덤인데 비해, 금강과 만경강 일대에서 조사된 이 시기의 무덤이 대부분 나무널무덤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선제리 돌무지 나무널무덤은 금강 하구에 위치하는 데 당시 해로를 통해 서해안의 남성리·동서리와 금강중류의 괴정동을 연결해 주는 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선제리 유적은 이 시기 금강 유역과 만경강 유역과의 차이 및 관계를 엿보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군산_선제리_유적_돌무지널무덤1.jpg&lt;br /&gt;
File:군산_선제리_유적_돌무지널무덤_유물_출토_상태.jpg&lt;br /&gt;
File:군산_선제리_유적_돌무지널무덤_출토_유물.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600px&amp;gt;&lt;br /&gt;
File:군산_선제리_유적_돌무지널무덤2.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15년 || 2015년도 소규모 발굴조사 보고서Ⅷ -전북- || 2017 || 한국문화재재단&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한국문화재재단. (2017). &amp;lt;i&amp;gt;2015년도 소규모 발굴조사 보고서Ⅷ -전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5371891&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518&amp;diff=27158</id>
		<title>600-1518</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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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5:31: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이미지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선암동·신정동 유적(蔚山 仙岩洞·新亭洞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선암동·신정동 유적&lt;br /&gt;
| 이칭별칭=울산 선암동·신정동 유적, 울산 선암동 유적, 울산 야음동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울산광역시 남구 선암동 717, 산208-13, 신정동 961-3 일대&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논]], [[민무늬 토기]], [[그물추]], [[가락바퀴]], [[홈자귀]], [[바리 토기]], [[슴베 간 돌검]], [[통슴베 간 돌살촉]], [[조갯날돌도끼]], [[돌대팻날]], [[달도끼]], [[돌창]], [[돌도끼]], [[돌낫]], [[기둥 모양 외날 돌자귀]], [[흔암리 유형]], [[검단리 유형]]&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김현식&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울산광역시 남구 선암동 717, 산208-13, 신정동 961-3 일대에 위치한다. 도로 개설로 2000~2001년 밀양대학교박물관·동의대학교박물관이 조사하여(야음동 유적), Ⅰ지구에서 [[집자리|집자리]] 43기, Ⅰ지구에서 집자리 3기 및 청동기~삼국·조선 시대 [[논|논]], 현대 수로 등이 확인되었다. 이후 울산 해양경찰서 신축으로 울산문화재연구원이 2011년 조사하여(선암동 유적), 집자리 19기 및 조선 시대 유구가 다수 확인되었다. 유적은 태화강 하류역에서 약 3.5㎞ 남쪽에 위치한 해발 63m 내외의 침식성 저구릉과 소규모의 곡지에 입지한다.&lt;br /&gt;
&lt;br /&gt;
[[울산야음동유적|야음동 유적]](선암동 산208-13, 신정동 961-3) Ⅰ지구 집자리는 구릉 정상부에 대형의 장방형, 중·소형의 방형, 장방형이 위치하며, 사면부에는 중·소형의 방형, 장방형이 조성되었다. 같은 형태의 집자리 내에서 규모의 차이가 있다. 방형 1호는 길이 5.86m, 너비 5.07m, 32호는 길이 2.5m, 너비 2.4m, 장방형 27호는 길이 4m, 너비 3.2m, 35호 길이 10.68m, 너비 5.17m이다. 내부 시설은 [[화덕자리|화덕 자리]], [[기둥구멍|기둥 구멍]], [[벽도랑|벽 도랑(壁溝)]] 등이 확인되었다. 화덕 자리는 구덩식이며, 중앙에서 한 쪽으로 치우쳐 1개씩 설치된 예가 많다. 기둥 구멍은 중심 기둥, 보조 기둥, 벽 기둥, 벽 도랑 내 기둥 구멍 홈, 외부 기둥 구멍 등이 있다. 벽 도랑은 벽면을 따라 단순히 도랑을 돌린 것, 도랑 없이 홈 상으로 된 것, 도랑과 홈이 결합된 것, 이중 도랑 등 4종류로 형태와 배치면에서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시간적인 차이를 반영하지 않는다. 바닥은 맨땅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일부는 사용에 의한 경화면, 불 다짐 처리, 최초 사용 바닥면 위에 흙을 덧발라 이용한 [[첩상|첩상(貼床)]]의 흔적 등도 확인되었다. 집자리 내부의 토층 양상을 통해 벽의 지상 부분인 벽재 바깥에 벽재를 보강해 주는 시설인 [[주제대|주제대(周堤帶)]]의 존재가 상정되며, 일부에서는 개수·개축의 흔적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Ⅱ지구에서는 총 30개의 층이 구분되며, 조선 시대~현대의 논(밭)층(1~18층)은 인위적인 성토를 하거나 주변 구릉 사면부 공급물질을 다스려 논으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이전~삼국 시대 층(19~30층)은 층 간의 토성·토색의 변화가 심하며 층의 요철 및 경사도 또한 심하다. 이는 곡지내의 토지 환경적 변화, 즉 주변 사면부 공급 물질, 일시적인 급류성 유수퇴적물 등으로 이루어진 자연 퇴적층의 형성, 곡지 내 습지화 및 습지 기원 퇴적물의 형성, 배수 및 습지기원 퇴적물 이용 논 조성이라는 과정이 반복된 결과로 이해된다. 이를 통해 논농사의 개시·재개와 일시적인 중지가 반복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24층, 29층에 대한 평면 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의 논 36면, 청동기~삼국 시대의 논 38면, 삼국 시대의 논 41면 등 총 115면이 확인되었으며 모두 계단식 논이다. 청동기 시대 논 36면은 29층을 평면 조사한 것(직상층인 28층 청동기 시대 논의 저면 형태일 가능성도 있다)으로 흑갈색의 습지 기원 퇴적물을 다스려 논으로 이용하였다. 평면 형태는 곡지 내 미지형 경사를 따라 호상(弧狀) 또는 느슨한 ‘S’자 모양의 세장방형을 이루고 있었다. 논 너비는 30~50㎝로, 40㎝가 가장 많고, 삼국 시대 하층 논에 비해 너비가 좁다. 논면 간의 높이 차이는 1.4~10㎝이다. 논에 서 지름 8~30㎝의 원형의 흔적이 확인되며 이는 지하수 용출 흔적으로 추정된다. 이외에 뚜렷한 경작구 흔적(耕作具痕), 족적(足跡), 작물 재배 흔적(栽培痕)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반습답(半濕畓)~습답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집자리는 논의 북동쪽 끝에 2기가 위치하는데, 논층보다 2~3개 층이 형성된 이후 조성되었다. 1호는 장방형으로 길이 10.8m, 너비 5m이다. 내부 시설은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 화덕 자리]] 2개가 설치되었고 기둥 구멍은 12주식(柱式)이다. 집자리 의 벽면은 네 벽을 따라 홈을 파고 판재를 수직으로 세웠으며, 이 홈과 연접하여 벽 도랑을 설치하였다. 집자리는 화재로 폐기되어 벽체 시설로 사용된 탄화된 판재가 확인되었다. 2호는 방형으로 길이 3.38m, 너비 3.09m이다. 내부 시설은 벽 도랑, 화덕 자리, 기둥 구멍이 확인되었으며, 2호는 배수구와 [[저장구덩이|저장 구덩이(貯藏穴)]]가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유물은 I지구에서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그물추|그물추]], [[가락바퀴|가락바퀴]], 토제품, 석기 및 석재 [[격지|격지(剝片)]], Ⅱ지구에서는 민무늬 토기, [[홈자귀|홈자귀(有溝石斧)]]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깊은바리모양토기|깊은 바리 모양(深鉢形)]]이 많고 소형의 [[항아리모양토기|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 [[손잡이달린깊은바리토기|손잡이(把手) 달린 깊은 바리 토기]], [[바리모양토기|바리 토기]] 등이 소량 출토되었다. 토기 문양으로는 [[구멍무늬|구멍무늬(孔列文)]]＋[[골아가리|골아가리(口脣刻目)]]＋[[단사선문|짧은 빗금무늬(短斜線文)]],  [[골아가리구멍무늬|골아가리 구멍무늬]], [[횡선문|가로선 무늬(橫線文)]], 구멍무늬, 짧은 빗금무늬 등이 있다. 석기류는 홈 자루 및 [[슴베간돌검|슴베 간 돌검(有莖式磨製石劍)]], [[피홈있는간돌검|피 홈(血溝) 있는 간 돌검]], [[통슴베간돌살촉|통슴베 간 돌살촉(一段莖式磨製石鏃)]], [[합인석부|조갯날돌도끼(蛤刃石斧)]], [[돌대팻날|돌대팻날(扁平片刃石斧)]], [[달도끼|달도끼(環狀石斧)]], [[긴배모양반달돌칼|긴 배 모양(長舟形) 반달 돌칼]], [[숫돌|숫돌(砥石)]]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울산선암동유적|선암동 유적]](선암동 717)의 집자리는 방형,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집자리 중 장축 방향이 등고선과 나란한 것은 집자리간 서로 중복 양상을 보인다. 내부 시설은 화덕 자리, 기둥 구멍, 벽 도랑(壁溝), 배수구(排水溝)가 설치되었다. 화덕 자리는 대부분 한쪽 짧은 벽에 치우쳐 있으며, 바닥을 얕게 파서 조성하거나 맨땅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기둥 구멍의 배치 양상은 4·6주식(柱式)와 정형성이 없는 것으로 구분된다. 벽 도랑은 네 벽을 다 돌아가는 ‘ㅁ’자 모양은 1기이며, 대부분은 일부만 돌아가는 ‘ㅡ’, ‘ㄴ’, ‘ㄷ’자 모양이다. 집자리 중에는 내부에 돌을 쌓아 놓은 예도 있다.&lt;br /&gt;
&lt;br /&gt;
유물은 토기류 42점, 석기류 24점, 토제품 20점 등 모두 86점이다. 토기 문양은 [[겹아가리|겹아가리(二重口軟)]]+골아가리(口脣刻目)+짧은 빗금(短斜線文)+구멍무늬(孔列文),  겹아가리+짧은 빗금+구멍무늬, 짧은 빗금+구멍무늬, 구멍무늬 등이 확인되었다. 석기는 [[돌창|돌창(石槍)]], 반달 돌칼, [[돌도끼|돌도끼(石斧)]], [[간돌검|간 돌검]], [[돌낫|돌낫(石鎌)]], 숫돌(砥石), 미완성 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돌창은 슴베식(有莖式)과 없는 것 둘 다 출토되었다. 돌도끼는 조갯날 돌도끼(蛤刃石斧), [[기둥모양외날돌자귀|기둥 모양 외날 돌자귀(柱狀片刃石斧)]], 돌대팻날(扁平片刃石斧)가 출토되었다. [[돌살촉|돌살촉]]은 모두 슴베가 있는 형식이다.&lt;br /&gt;
&lt;br /&gt;
야음동 유적의 집자리는 화재에 의한 폐기가 다수 확인되어, 원래 유적의 규모는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저구릉에는 집자리, 정상부에는 농경지가 확인되어 주변에 무덤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어 주거, 생산, 묘역을 갖춘 마을로 추정된다. 유적의 시기는 야음동 유적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통해 Ⅱ-1호 2450±40 BP(보정 연대 기원전 500년), 2호 5460±40 BP(보정 연대 기원전 585년)로 확인되었다. 토기 양식과 집자리 중복 양상을 통해 골아가리, 구멍무늬, 짧은 빗금 무늬가 복합적으로 확인되는 [[흔암리유형|흔암리 유형]] 단계와, 구멍무늬가 단독으로 확인되는 [[검단리유형|검단리 유형]] 단계에 해당한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400px&amp;gt;&lt;br /&gt;
File:울산_선암동_신정동_유적(선암동_유적)_유구_배치도.jpg&lt;br /&gt;
File:울산_선암동_신정동_유적(선암동_유적)_전경.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0년~2001년 || 울산 야음동 유적 || 2001 || 밀양대학교박물관, 동의대학교박물관&lt;br /&gt;
|-&lt;br /&gt;
| 시굴조사 || 2011년 1월 17일~2011년 2월 7일 || 울산 선암동 유적 || 2011 || 울산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11년 3월 17일~2011년 5월 4일 || 울산 선암동 유적 || 2011 || 울산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밀양대학교박물관, 동의대학교박물관. (2001). &amp;lt;i&amp;gt;울산 야음동 유적&amp;lt;/i&amp;gt;.&lt;br /&gt;
* 울산문화재연구원. (2011). &amp;lt;i&amp;gt;울산 선암동 유적&amp;lt;/i&amp;gt;.&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511&amp;diff=27157</id>
		<title>600-151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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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5:30: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석택리 유적(洪城 石宅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석택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홍성 석택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 석택리 478-18 일원&lt;br /&gt;
| 성격=집자리&lt;br /&gt;
| 키워드=[[집자리]], [[역삼동 유형]], [[송국리 유형]]&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황재훈&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 석택리 478-18 일원에 위치한다. 충남도청 내포 신도시 진입 도로 개설 공사에 따라 2012~2013년에 걸쳐 발굴 조사하였으며 청동기 시대 [[집자리|집자리]] 14기와 원삼국~조선 시대에 이르는 마을 유적과 무덤군이 조사되었다. 조사 지역은 수암산과 용봉산 동쪽에 위치한 저평한 구릉성 산지로 주변으로는 넓은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다. 유적은 A-1, A-2지구에 해당하며 충적지에 둘러싸인 해발 25~55m 정도의 비교적 낮은 독립 구릉상에 위치한다.&lt;br /&gt;
&lt;br /&gt;
집자리는 해발 37~52m의 구릉 사면부에 위치한다.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 방형과 말각 방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장방형 집자리는 모두 7기로 길이 3.6~10.33m, 너비 3.66~4.7m 정도이다. 내부에서는 [[화덕자리|화덕 자리]]와 [[기둥구멍|기둥 구멍]], [[저장구덩이|저장 구덩이]] 등이 확인된다. 화덕 자리는 평면 타원형으로 구덩식과 무시설식(無施設式)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면적에 따라 1~3기가 설치되었다. 기둥 구멍은 중앙부와 벽면을 따라 열을 지어 확인된다. 저장 구덩이는 짧은 벽 모서리에 연접하여 1~6기 정도가 확인된다. 내부에서는 [[골아가리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토기|골아가리 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口脣刻目二重口緣短斜線文)]],  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골아가리 구멍무늬(口脣刻目孔列土器), 구멍무늬, 골아가리 토기, [[굽다리토기|굽다리 토기(臺附土器)]], [[가락바퀴|가락바퀴]] 등의 토기와 [[간돌검|간 돌검]], [[턱슴베돌살촉|턱 슴베 돌살촉(二段莖式石鏃)]], [[돌살촉|간 돌살촉]], [[반달돌칼|반달 돌칼]], [[합인석부|조갯날 돌도끼(蛤刃石斧)]], [[갈판과갈돌|갈판(碾石)]], [[숫돌|숫돌(砥石)]]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방형과 말각 방형 집자리는 모두 6기로 타원형 구덩이 양 끝 또는 외곽에 기둥 구멍이 배치된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이다. 타원형 구덩이 외곽으로 보조 기둥이 1~4기가 설치되거나 벽면에 인접하여 기둥 구멍이 확인되기도 한다. A-1지구-2호는 타원형 구덩이 외곽에 4기의 기둥이 배치된 4주식(柱式) 형태로 추정된다. A-1지구-4호에서는 [[벽도랑|벽 도랑(壁溝)]]이 설치되어 있는데 타원형 구덩이로 이어진다. 전체적인 규모는 길이 4.1~5.62m, 너비 3.64~5.3m, 잔존 높이 0.18~1.06m, 면적은 14.9~29.8㎡ 정도이다. 타원형 구덩이는 길이 0.74~1.14m, 너비 0.36~0.74m, 깊이 0.05~0.36m, 기둥 구멍은 지름 0.14~0.32m, 깊이 0.03~0.36m 정도이다. 유물은 매우 적은 편으로 [[골아가리토기|골아가리 토기]], [[통슴베돌살촉|통슴베 돌살촉(一段莖式石鏃)]], 가락바퀴 등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석택리 유적은 집자리 구조와 출토 유물을 통해 [[역삼동유형|역삼동 유형]]과 [[송국리유형|송국리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치]]를 참고한다면 기원전 10세기를 상한으로 하며 이후 송국리 유형 취락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600px&amp;gt;&lt;br /&gt;
File:홍성_석택리_유적_A-1지구_4호_집자리.jpg&lt;br /&gt;
File:홍성_석택리_유적_A-2지구_1지점_1호_집자리.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한얼문화유산연구원. (2015). &amp;lt;i&amp;gt;홍성 석택리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4153442&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506&amp;diff=27156</id>
		<title>600-150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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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5:29: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석천리 유적(益山 石泉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석천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익산 석천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낭산면 석천리 220-1 일원&lt;br /&gt;
| 성격=고분&lt;br /&gt;
| 키워드=[[독널]], [[독무덤]], [[무덤 구덩이]], [[골아가리 토기]], [[항아리 모양 토기]], [[송국리 문화]]&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이종철&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낭산면 석천리 220-1 일원에 위치한다. 1989년 유적에 거주하는 주민이 구릉의 일부를 절토하던 중 단애면에 박혀있는 [[독널|독널(甕棺)]]을 발견하고 국립박물관에 신고하여 조사가 이루어졌고 2기의 [[독무덤|독무덤(甕棺墓)]]이 확인되었다. 1991년에는 같은 주민에 의해 수습된 독널 1점이 인수되었는데 1989년에 조사된 독널과 유사한 기형이다. 석천대(舊 下石里) 마을 뒤편에 자리한 해발 20미터 정도의 능선 북쪽 말단부에 위치한다.&lt;br /&gt;
&lt;br /&gt;
조사된 2기의 독널은 1m 정도 떨어져서 각각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수직으로 파내려간 [[묘광|무덤 구덩이(墓壙)]]의 바닥에 납작한 받침돌을 놓은 뒤 그 위에 독널을 안치하였으며, 납작한 판돌(板石)을 이용하여 뚜껑을 삼았고 뚜껑 위에는 다시 판돌로 된 큰 뚜껑돌(蓋石)을 놓아 이중으로 처리한 직치(直置)의 돌 뚜껑 홑 독널(石蓋單甕棺) 형식이다. 1호 독널은 높이 0.53m, 구경 0.22m, 바닥 지름 0.1m이고, 2호는 높이 0.5m, 구경 0.24m, 바닥 지름 0.1m이다. 독널로 사용된 [[토기|토기]]는 구연이 직립하고 몸통의 상부 혹은 중부에 몸통의 최대 지름을 두면서 저부로 갈수록 축약되는 형태이며 바닥 면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다만 2호 독널은 [[골아가리토기|골아가리 토기(口脣刻目土器)]]로 1호와 차이를 보인다.&lt;br /&gt;
&lt;br /&gt;
석천리 유적에서는 독널 이외에 다른 유물은 출토되지 않아 유적의 연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독널로 사용된 [[항아리모양토기|항아리 모양 토기]]가 직립 구연 형태이고 골아가리가 새겨져 있는 점과 [[부여송국리유적|부여 송국리]], [[공주남산리유적|공주 남산리]], [[거창대야리유적|거창 대야리 유적]] 등에서 보이는 독무덤의 특성을 고려하면 [[송국리문화|송국리 문화]]와 연관될 가능성이 높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이건무, 신광섭. (1994). 익산 석천리 옹관묘에 대하여. &amp;lt;i&amp;gt;고고학지, 6&amp;lt;/i&amp;gt;, 43–57. https://www.riss.kr/link?id=A107053067&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500&amp;diff=27155</id>
		<title>600-150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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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5:29: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석장동 유적(慶州 錫杖洞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석장동 유적&lt;br /&gt;
| 이칭별칭=경주 석장동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석장동 707, 774-8, 824, 875-1, 876-5&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구덩이]], [[화덕 자리]], [[구멍무늬 토기]], [[항아리 모양 토기]], [[반달 돌칼]], [[홈자귀]], [[도랑]], [[조갯날 돌도끼]], [[고인돌]], [[돌널무덤]], [[거점취락]]&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안재호, 이도현&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경상북도 경주시 석장동 707, 774-8, 824, 875-1, 876-5에 위치한다.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신축에 앞서 석장동 707 일원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이 1993·1995·1997·1999·2000년에 조사하여 [[집자리|집자리]] 11기를 확인하였으며, 이후 석장동 유적으로 명명되었다(석장동 유적Ⅰ~Ⅲ). 이후, 다가구주택 신축에 앞서 2005년 신라문화유산연구원(875-1 유적), 2010년·2011년 계림문화재연구원(876-5 유적, 774-8 유적), 2015년 한국문화재연구원(824 유적)이 조사되었다. 유적은 북천이 형산강에 합류하는 곳의 서쪽 건너 편 구릉에 입지하며, 큰갓산과 옥녀봉 사이에서 뻗어 내려오는 협곡과 번데기들이 만나는 구릉 말단부에 입지한다. 유적은 반경 200m 거리에 분포한다. 주변 유적으로는, [[경주석장동고인돌군|석장동 고인돌군]], [[경주금장리민무늬토기유적|금장리 민무늬 토기 유적]], [[경주석장동바위그림유적|석장동 바위그림 유적]]이 있다.&lt;br /&gt;
&lt;br /&gt;
&#039;&#039;&#039;석장동 유적Ⅰ~Ⅲ&#039;&#039;&#039;의 집자리는 형산강에 인접한 금장대, 온방골의 동쪽 구릉지(1지구)와 서쪽 사면부(2지구)에 위치한다. 1지구는 2개 구역으로 분리되어 조사되었는데, 집자리 10기(1·3호~11호)와 [[구덩이|구덩이]] 1기(2호)가 확인되었다. 집자리가 서로 겹쳐져 있는 예도 있어 [[취락|취락]]의 존속 시기가 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방형 4기(1·7·10·11호), 장방형 6기(2·3·5·6·8·9호), 세장방형 1기(4호)로 구분할 수 있다. 3호는 길이 5.2m, 너비 3.3m, 깊이 0.72m, 4호는 길이 12m, 너비 4.6m, 깊이 0.76m이며, 면적은 13.5㎡ 전후의 소형 집자리(3·6호), 50~55㎡의 대형 집자리(4·9호)가 있다. [[화덕자리|화덕 자리]]는 모두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으로, 장방형 집자리에서는 2기, 장방형인 4호는 5호와 겹쳐 있고 경사면으로 일부 결실되어 1기만 확인되었으나 2기 이상으로 추정된다. [[기둥구멍|기둥 구멍]]은 장방형에서 4주식(柱式)와 6주식이 보이지만, 대부분 정형성을 찾을 수 없다. [[벽도랑|벽 도랑(壁溝)]]은 경사면의 높은 곳에 설치되어 있다. 출토 유물 중 토기류는 [[구멍무늬토기|구멍무늬 토기(孔列土器)]] 편, [[돋을무늬토기|돋을무늬 토기(突乳文土器)]], [[짧은빗금무늬토기|짧은 빗금무늬 토기(短斜線文土器)]], [[가로줄무늬에손잡이가부착된깊은바리토기|가로줄무늬(橫線文)에 손잡이(把手)가 부착된 깊은 바리 토기(深鉢形土器)]], [[항아리모양토기|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 등이 확인되었다. 석기류는 슴베가 편평한(坪根式) 통슴베 돌살촉(一段莖式磨製石鏃), 배 모양(舟形) [[반달돌칼|반달 돌칼]], [[홈자귀|홈자귀(有溝石斧)]] 등이 있다. 집자리와 유물을 통해 검단리 문화 시기와 그 직전 시기에 해당된다.&lt;br /&gt;
&lt;br /&gt;
2지구에서는 집자리 1기가 확인되었다. 이전 조사에서 [[환호|환호(還壕)]]가 확인되었다고 소개되었으나, 1999년 조사 결과 환호가 아니라 계곡의 자연 유로임을 확인하였다. 집자리는 방형으로 추정되며 길이 3.1m, 너비 2m의 소형으로 내부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은 [[슴베간돌검|슴베 간 돌검(有莖式磨製石劍)]], 홈자귀(有溝石斧)와 목이 약간 외반(外反) 하는 항아리 모양 토기 편이 출토되었고, 계곡부에서는 [[매부리형석기|매부리형 석기]] 2점이 수습되었다.&lt;br /&gt;
&lt;br /&gt;
&#039;&#039;&#039;석장동 875-1 유적&#039;&#039;&#039;은 집자리 5기, [[구|도랑(溝)]] 1기, 기둥 구멍 3개가 확인되었다. 집자리 중 상태가 양호한 3기는 방형이며, 길이 2.8~3.5m, 너비 2.9~3m, 깊이 0.18m, 면적 10㎡ 이하의 소형이다. 내부 시설은 화덕 자리, 기둥 구멍 등이 확인되었으며, 3호에서 다량이 목탄을 통해 벽체 시설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출토 유물은 1호에서 아가리에 낟알문을 시문한 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 [[통슴베돌살촉|통슴베 돌살촉(一段莖式石鏃)]], [[합인석부|조갯날 돌도끼(蛤刃石斧)]] 등이 확인되었다. 도랑은 북동쪽에서 남쪽으로 집자리를 감싸듯이 조성되어 환호(環濠)의 가능성도 있으나, 일부만 확인되어 성격은 알 수 없다.&lt;br /&gt;
&lt;br /&gt;
&#039;&#039;&#039;석장동 876-5 유적&#039;&#039;&#039;은 묘역식(墓域式) [[고인돌|고인돌]], 석축형 돌널무덤 1기, [[돌널무덤|돌널무덤]] 1기, 도랑 1기가 확인되었다. 묘역 시설은 해발 38m에 위치한다. 유구는 조사 지역 경계 밖으로 이어지며, 후대에 훼손되어 일부만 확인되었다. 묘역을 따라 석렬(石列)을 설치하였으며, 규모는 동서 방향 34m, 남북 방향 2.8m 확인되었다. 묘역 시설 내 서쪽에 치우쳐 돌널무덤 1기와 [[화장묘|화장묘(火葬墓)]]가 열을 이루며 조성되었다. 묘역 시설과 돌널무덤은 4.4m 정도 떨어져 있다. 돌널은 길이 0.82m, 너비 0.27m이다. 출토 유물은 북쪽 채움 돌 아래에서 [[통자루간돌검|통자루 간 돌검(一段柄式磨製石劍)]] 1점, [[돌끌|돌끌(石鑿)]] 1점이 확인되었다. 화장묘는 돌널무덤에서 서쪽으로 2.4m 떨어져 위치한다. 방형으로 추정되며 길이 2.16m, 너비 1.75m이다. 벽면에 불탄 흔적과 목탄 위에서 3개체의 사람 뼈 편이 확인되었다.  석축형 돌널무덤은 길이 1.5m, 너비 1.1m, 깊이 0.33m이며, 바닥 면은 그대로를 사용하였다. 유물은 내부에서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편 1점만 확인되었다. 돌널무덤은 주축 방향이 동-서향이며, 대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규모는 길이 1.4m, 너비 0.32m, 깊이 0.2m이다.&lt;br /&gt;
&lt;br /&gt;
&#039;&#039;&#039;석장동 774-8 유적&#039;&#039;&#039;은 집자리 1기, 구덩이 1기, 도랑 2기, 기둥 구멍 2개가 확인되었다. 집자리 대부분이 훼손되었으며, 도랑 2호는 [[울산연암동유적|연암동]]식 도랑과 유사하다. 출토 유물은 민무늬 토기 편이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039;&#039;&#039;석장동 824 유적&#039;&#039;&#039;은 집자리 2기, 도랑 3기가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방형이며 길이 2.62~3.42m, 너비 2.14~2.74m, 깊이 0.19~0.23m이다. 내부 시설은 화덕 자리, 벽 도랑(壁溝), 도랑이 확인되었다. 도랑 3호는 석장동 774-8 유적의 도랑과 연장 선상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유적은 대규모 취락과 무덤이 확인되어, 전체가 하나의 취락 공동체인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송국리 문화 단계의 [[거점취락|거점취락]] 유적으로 청동기 시대 문화상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400px&amp;gt;&lt;br /&gt;
File:경주_석장동_유적_4_5호_집자리.jpg&lt;br /&gt;
File:경주_석장동_유적_9호_집자리.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1995년 11월 27일 ~ 1995년 12월 12일 || 석장동유적Ⅰ || 1996 ||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박물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1996년 10월 ~ 1997년 2월 || 석장동유적Ⅱ || 1998 ||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박물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1999년 3월 3일 ~ 1999년 5월 5일 || 석장동유적Ⅲ || 2002 ||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박물관&lt;br /&gt;
|-&lt;br /&gt;
| 시굴조사 || 2006년 7월 18일 ~ 2006년 7월 27일 || 왕경유적Ⅷ-경주 석장동 875-1번지 유적 || 2008 || 신라문화유산조사단&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6년 9월 21일 ~ 2006년 10월 13일 || 왕경유적Ⅷ-경주 석장동 875-1번지 유적 || 2008 || 신라문화유산조사단&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고고학저널==&lt;br /&gt;
* &amp;quot;[http://portal.nrich.go.kr/kor/journalUsrDtlView.do?menuIdx=801&amp;amp;idx=6&amp;amp;d_idx=234 경주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청동기시대의 초대형 구획묘와 화장묘]&amp;quot;, &amp;lt;i&amp;gt;2010 한국고고학저널&amp;lt;/i&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계림문화재연구원. (2012). &amp;lt;i&amp;gt;경주 석장동 774-8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3251259&lt;br /&gt;
* 계림문화재연구원. (2012). &amp;lt;i&amp;gt;경주지역 소규모 발굴조사 보고서Ⅱ-경주 석장동 876-5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3251259&lt;br /&gt;
*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박물관. (1996). &amp;lt;i&amp;gt;석장동유적Ⅰ&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2371744&lt;br /&gt;
*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박물관. (1998). &amp;lt;i&amp;gt;석장동유적Ⅱ&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8660362&lt;br /&gt;
*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박물관. (2002). &amp;lt;i&amp;gt;석장동유적Ⅲ&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4887610&lt;br /&gt;
* 신라문화유산조사단. (2008). &amp;lt;i&amp;gt;왕경유적Ⅷ-경주 석장동 875-1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3889036&lt;br /&gt;
* 한국문화재연구원. (2017). &amp;lt;i&amp;gt;경주 석장동 824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5054760&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483&amp;diff=27154</id>
		<title>600-1483</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483&amp;diff=27154"/>
		<updated>2026-05-06T05:27: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석다리 고인돌군[甑山 石多里支石墓群]}}&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석다리 고인돌군&lt;br /&gt;
| 이칭별칭=증산 석다리 고인돌군, 증산 석다리 지석묘군&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북한&lt;br /&gt;
| 소재지=평안남도 증산군 석다리&lt;br /&gt;
| 성격=고인돌&lt;br /&gt;
| 키워드=[[고인돌]], [[간 돌살촉]], [[민무늬 토기]], [[묘역 시설]]&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장호수&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평안남도 증산군 석다리에 위치한다. 14기의 [[고인돌|고인돌]]이 있고 그 가운데 2기를 발굴 조사하였다.&lt;br /&gt;
&lt;br /&gt;
1호 고인돌은 [[묵방형고인돌|묵방형(默房型)]]이며 덮개돌(上石) 주위에 돌을 깔아 [[묘역|묘역 시설(墓域施設)]]을 만들었다. 덮개돌은 길이 4.2m, 너비 3.3m, 두께 0.56m이며 중심 부분이 불룩하여 마치 솥뚜껑처럼 생겼다. 돌널(石棺)은 길이 2.2m, 너비 1.1m, 깊이 1m로 세 벽은 길이 0.4~0.5m인 납작한 깬돌(割石)을 쌓고 1벽은 판돌(板石) 1매로 막았다. 돌널 바깥에는 너비 1.5m되는 범위에 밑 너비를 넓게 하고 위로 갈수록 점차 좁혀가며 5겹으로 쌓은 보강 시설(補强施設)이 있다. 바닥에는 진흙을 깔고 다졌는데, [[간돌살촉|간 돌살촉]]과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편들이 나왔다. 2호 뚜껑돌은 길이 2m, 너비 2m, 두께 0.46m이며, 덮개돌 아래에 깬돌로 쌓은 돌널이 일부 남아 있으나 대부분 파괴되었고, 묘역 시설도 확인되지 않는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석광준. (2003). &amp;lt;i&amp;gt;각지고인돌무덤조사 발굴보고&amp;lt;/i&amp;gt;. 백산자료원. https://www.riss.kr/link?id=M9095742&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472&amp;diff=27153</id>
		<title>600-1472</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472&amp;diff=27153"/>
		<updated>2026-05-06T05:27: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석계리 유적(慶州 石溪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석계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경주 석계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석계리 산165-1, 산176-1, 산180-5, 문산리 산80,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야외 화덕 자리]], [[구덩이]], [[도랑]], [[민무늬 토기]], [[바리 토기]], [[항아리 모양 토기]], [[붉은 간 토기]], [[돌살촉]], [[반달 돌칼]], [[돌도끼]], [[흔암리 유형]], [[역삼동 유형]], [[검단리 유형]]&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이도현, 윤형규&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석계리 산165-1, 산176-1, 산180-5, 문산리 산80, 일원에 위치한다. 석계리 산업 단지 조성에 앞서 2009년 성림문화재연구원에서 석계리 산180-5 유적(석계리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생활 유적)을 조사하여 [[집자리|집자리]] 16기, [[야외노지|야외 화덕 자리]] 3기, [[구덩이|구덩이]] 8기를 확인하였다. 이후 인접하여 문산 일반 산업 단지 개발로 2014년 해동문화재연구원에서 석계리 산176-1, 문산리 산80 일원(석계리 유적)을 조사하여 집자리 39기, [[구|도랑(溝)]] 1기를 확인하였다. 이후 석계4 일반 산업 단지 조성으로 2015~2016년 화랑문화재연구원이 석계리 산 165-1 일원을 조사하여 집자리 150기를 확인하였다. 석계리 165-1 유적은 1.2㎞ 거리에 위치하고, 나머지 유적은 인접하여 위치한다. 서쪽으로 1.7㎞ 떨어져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한 석계리 산231-20 유적에서는 집자리 1기가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039;&#039;&#039;석계리 산180-5 유적(석계리 청동기 시대 생활 유적)&#039;&#039;&#039;의 집자리는 구릉 서쪽 사면에 위치한다. 1B구역 1호는 길이 3.92m, 너비 2.13m, 깊이 0.42m로 규모가 가장 작고, 1A구역 4호는 길이 5.5m, 너비 2.6m, 깊이 0.34m로 가장 크다. 집자리는 대부분 장방형이며, 크기도 비슷하다. 내부 시설은 [[화덕자리|화덕 자리]], [[기둥구멍|기둥 구멍]], [[벽도랑|벽 도랑(壁溝)]], 외부 돌출구(外部突出溝) 등이 있으며, 일부 벽 도랑 내 기둥 구멍이 확인되기도 한다. 화덕 자리는 1개씩 확인되며, 집자리 규모가 클수록 한쪽 짧은 벽에 치우쳐 있다. 기둥 구멍의 배치는 대부분 부정형하지만, 일부 6주식(柱式)(A-1·4호, 1B-2~4·6~8호)도 확인되었다. 벽 도랑은 대부분의 집자리에서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대부분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편이며, 1A-2호에서는 [[붉은간토기항아리|붉은 간 토기 항아리]], [[낟알무늬토기|낟알무늬 토기]], [[혹무늬토기|혹무늬 토기(突瘤文土器)]], 1B-8호에서 혹무늬 토기가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039;&#039;&#039;석계리 산176-1 유적(경주 석계리 유적)&#039;&#039;&#039;에서는 집자리 39기, 도랑 1기가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구릉 정상부와 말단부에 집중되어 조성되었다. 조사된 집자리는 대부분 상태가 좋지 않다. 형태는 세장방형, 장방형, 방형 등이다. 내부 시설은 벽 도랑, 화덕 자리, 기둥 구멍, 외부 돌출구 등이 있다. 유물은 [[바리모양토기|바리 토기]], [[항아리모양토기|항아리 모양 토기]],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돌살촉|돌살촉]], [[반달돌칼|반달 돌칼]], [[돌도끼|돌도끼(石斧)]] 등이 출토되었다. 유적의 연대는 Ⅰ구역 10·18호 집자리에서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二重口緣短斜線文)]],  일부 집자리에서 [[단사선문|짧은 빗금무늬(短斜線文)]], [[구멍무늬|구멍무늬(孔列文)]] 토기가 확인되어 [[흔암리식단계|흔암리식 단계]]에 해당한다.&lt;br /&gt;
&lt;br /&gt;
&#039;&#039;&#039;석계리 산231-20(석계리·냉천리 유적)&#039;&#039;&#039;의 집자리는 방형이며, 길이 3.5m, 너비 3.9m, 깊이 0.3m이다. 내부에서 화덕 자리 1기가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민무늬 토기 편 4점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039;&#039;&#039;석계리 산165-1 유적(석계리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039;&#039;&#039;의 집자리는 방형 14기, 장방형 28기, 세장방형 5기로 분류된다. 규모에 따라 5~15㎡ 미만의 소형 23기, 15~30㎡ 미만의 중형 20기, 30㎡ 이상의 대형이 16기이다. 집자리 내부에는 4·6·8·12주식(柱式)의 기둥 구멍, 화덕 자리, 벽 도랑, 외부 돌출구 등이 확인되었다. 화덕 자리는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으로 집자리 중앙에 위치하거나 한쪽 벽면에 치우쳐 위치한다. 대형 집자리에 해당하는 39·65·74·141호는 집자리 중앙에 화덕 자리를 2개씩 설치하였다. 55호는 길이 5.42m, 너비 4.56m로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화덕 자리가 확인되었으며, 벽 기둥(壁柱)을 따라 가로 방향의 판재목이 탄화된 상태로 확인되었다. 이는 벽을 따라 목재를 세우고 수직 또는 수평으로 판자를 덧붙여 벽면을 축조한 것으로 동천강유역의 [[검단리식집자리|검단리식(울산식) 집자리]]에서 확인된다. 11호는 길이 3.45m, 너비 3.35m로 벽면을 따라 기둥 사이에 좁은 간격으로 가는 목재를 가로 방향으로 결구하였다. 또한, 벽면과 목재 사이 빈 공간에 흙을 채우거나 나뭇가지, 풀, 흙을 섞어 마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 배수로와 같은 성격으로 추정되는 외부 돌출구는 집자리 내부의 벽 도랑과 연결되거나 벽 모서리 상단에서부터 외곽으로 도랑을 굴착한 형태로, 총 15기가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화재 집자리는 약 30기가 확인되었다. 4·8·17·25·55·97·104호는 집자리 전체가 불에 탔으며, 바닥에서는 3~5개체의 토기 및 [[돌칼|돌칼(石刀)]], [[돌날|돌날(石鎌)]], [[돌살촉|돌살촉]]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108호는 일부만 불에 탔으며, 벽에 사용된 탄화된 목재가 그대로 남아 있고, 출토 유물도 비교적 적다. 4·8·17·21·30호 등은 화재로 폐기된 이후 크기 및 형태가 불규칙한 [[돌무지|돌무지(積石)]]가 1~2열을 쌓았다. 이는 화재 후 의도적으로 투기(投棄)와 같은 행위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출토 유물 중 토기류는 [[민무늬토기항아리|민무늬 토기 항아리(壺)]] 및 구멍무늬(孔列文),  짧은 빗금무늬(短斜線文),  [[골아가리|골아가리(口脣刻目)]]를 새긴 [[깊은바리모양토기|깊은 바리(深鉢)]]와 [[얕은바리|얕은 바리(淺鉢)]]가 확인되었다. 석기류는 석기류는 [[양날돌도끼|양날 돌도끼(兩刃石斧)]], [[외날돌도끼|외날 돌도끼(片刃石斧)]], [[간돌살촉|간 돌살촉]], [[숫돌|숫돌(砥石)]] 등이 출토되었다. 유적의 연대는 유물은 토기 문양에서 짧은 빗금무늬(短斜線文)와 구멍무늬(孔列文),  골아가리(口脣刻目)와 구멍무늬(孔列文)의 복합문과 삼각 오목 돌살촉 등과 짧은 빗금무늬(短斜線文), 구멍무늬(孔列文) 등의 단순 무늬와 [[기둥모양돌자귀|기둥 모양 돌자귀]] 등이 확인되었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통해 41호 2750±30 BP(보정 연대 기원전 970년), 55호 2700±30 BP(보정 연대 기원전 905년), 141호 2890±30 BP(보정 연대 기원전 1190년)라는 결과를 얻었다. 집자리는 시기에 따라 대형에서 소형으로 축조되며, 일정한 군집을 형성한다. 중앙에 일정한 빈 공간(空址)을 두고 집자리가 고리 모양(環狀)으로 배치되어 있어 계획적인 마을의 모습을 띈다.&lt;br /&gt;
&lt;br /&gt;
유적은 동천강을 중심으로 한 산계에 위치한 대단위 마을 유적이다. 특히, [[흔암리유형|흔암리]]·[[역삼동유형|역삼동식 유형]]에서 [[검단리유형|검단리식 유형]]으로의 변화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유적은 동천강 유역권 내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을 살펴보는 것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유적군이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경주_석계리_유적(석계리_산_165-1_유적)_106호_대형_집자리.jpg&lt;br /&gt;
File:경주_석계리_유적(석계리_산_165-1_유적)_55호_중형_집자리.jpg&lt;br /&gt;
File:경주_석계리_유적(석계리_산_165-1_유적)_55호_집자리(불_탄_모습).jpg&lt;br /&gt;
File:경주_석계리_유적(석계리_산_165-1_유적)_집자리_전경.jpg&lt;br /&gt;
File:경주_석계리_유적(석계리_산_165-1_유적)_집자리_출토_석기.jpg&lt;br /&gt;
File:경주_석계리_유적(석계리_산_165-1_유적)_집자리_출토_토기.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조사 || 2009년 || 경주 석계리 청동기시대 생활 유적 || 2011 || 성림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조사 || 2014년 || 경주 석계리유적 || 2016 || 해동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조사 || 2015년 ~ 2016년 || 경주 석계리 청동기시대 마을유적 || 2018 || 화랑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도경. (2000). &amp;lt;i&amp;gt;한국 고대 목조건축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amp;lt;/i&amp;gt;. (박사 학위 논문). 고려대학교.&lt;br /&gt;
* 성림문화재연구원. (2011). &amp;lt;i&amp;gt;경주 석계리 청동기시대 생활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2952883&lt;br /&gt;
* 중앙문화재연구원. (2013). &amp;lt;i&amp;gt;경주 석계리·냉천리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3348432&lt;br /&gt;
* 중앙문화재연구원. (2013). &amp;lt;i&amp;gt;울산 굴화리·다운동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3348432&lt;br /&gt;
* 해동문화재연구원. (2016). &amp;lt;i&amp;gt;경주 석계리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4533291&lt;br /&gt;
* 화랑문화재연구원. (2018). &amp;lt;i&amp;gt;경주 석계리 청동기시대 마을유적&amp;lt;/i&amp;gt;.&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432&amp;diff=27152</id>
		<title>600-143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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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5:22: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새롬동 유적(世宗 새롬洞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새롬동 유적&lt;br /&gt;
| 이칭별칭=세종 새롬동 유적, 공주 당암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세종특별자치시 새롬동 556(舊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당암리)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구덩이]], [[돌무지]], [[함정]], [[움무덤]], [[돌널무덤]], [[독무덤]], [[가락동식 집자리]], [[송국리식 집자리]]&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문수균&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세종특별자치시 새롬동 556(舊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당암리) 일원에 위치한다. 행정 중심 복합 도시 건설에 따라 2008~2012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 지역 내 당암리 소골, 당암리 당골2, 당암리 선돌, 당암리 가소골 나·다 구역 등 총 5개 지점에서 청동기 시대 유적이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집자리|집자리]] 50기, [[구덩이|구덩이]] 24기, [[돌무지|돌무지(積石)]] 1기, [[함정|함정(陷穽)]] 1기, [[움무덤|움무덤(土壙墓)]] 1기,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3기, [[독무덤|독무덤(甕棺墓)]] 1기와 그 밖에 초기 철기 시대 및 백제 시대 무덤, 고려~조선 시대 집자리와 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조사 지역은 행정 중심 복합 도시 서부 지역에 해당하며, 동쪽에는 북서에서 남동 방향으로 제천이 흐르다가 금강의 지류인 군계천과 합류하여 금강으로 유입된다. 해발 35~60m의 저평한 구릉 지역에 해당하며, 대체로 구릉의 정상부는 평탄하며, 사면부는 완만하다.&lt;br /&gt;
&lt;br /&gt;
집자리는 [[가락동식집자리|가락동식]]과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으로 분류된다. 가락동식 집자리는 구릉 능선 정상부에 입지하며, 길이 5~12m이며 너비 1.5~5.3m 정도이다. 내부 시설은 [[돌두름식화덕자리|돌 두름식 화덕 자리(圍石式爐址)]], [[초석|주춧돌(礎石)]], [[벽도랑|벽 도랑(壁溝)]], [[저장구덩이|저장 구덩이]] 등이 확인된다. 유물은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토기|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 [[골아가리토기|골아가리 토기(口脣刻目土器)]], [[삼각오목돌살촉|삼각 오목 돌살촉(三角灣入石鏃)]], [[반달돌칼|반달 돌칼]], [[합인석부|조갯날 돌도끼(蛤刃石斧)]], [[숫돌|숫돌(砥石)]], [[갈돌|갈돌(碾石棒)]], [[공이|공이(敲石)]], [[그물추|그물추]], [[가락바퀴|가락바퀴]] , [[ㄱ자돌칼|‘ㄱ’자 돌칼(東北形石刀)]]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가락동식 집자리 가운데 소골 11호는 길이 12m, 너비 5.3m, 깊이 0.14m의 규모로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다. 내부 시설로는 돌 두름식 화덕 자리 2기, 주춧돌, [[기둥구멍|기둥 구멍]], 벽 도랑, 저장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골아가리 토기,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슴베없는간돌살촉|슴베 없는 돌살촉]], 반달 돌칼, 조갯날 돌도끼, [[외날돌도끼|외날 돌도끼]], 공이, 숫돌, [[갈판과갈돌|갈판]], [[매부리형석기|매부리형 석기]], 그물추, 가락바퀴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장방형 집자리에서는 중축(重築)된 흔적이 확인된다. 선행 집자리가 폐기된 이후 그 위에 2~4개의 벽을 확장 또는 증축하여 후행 집자리를 축조하였다. 내부 시설은 선행 집자리의 것을 계속적으로 활용하거나 증축 이후 새롭게 구축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송국리 유형 집자리는 구릉 능선 정상부 및 사면에 입지하며 대부분 타원형 구덩이를 갖추고 있다. 기둥 구멍과 벽구가 일부 확인되며, 유물은 [[송국리식토기|송국리식 토기]], [[홈자귀|홈자귀(有溝石斧)]] 등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송국리식 집자리 가운데 소골 5호는 지름 3.3~3.7m, 깊이 0.4m이다. 내부 시설로는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 화덕 자리(竪穴式爐址)]] 1기, 벽 도랑, 기둥 구멍, 저장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바리모양토기|바리 토기]], [[항아리모양토기|항아리 모양 토기]], [[붉은간항아리모양토기|붉은 간 항아리 모양 토기]], 반달 돌칼, [[기둥모양외날돌자귀|기둥 모양 외날 돌자귀(柱狀片刃石斧)]], 홈자귀 등이 출토되었다. 구덩이는 당암리 가소골 나 구역에서 확인된 1호 집자리 주변에서 17기가 확인되었는데 집자리 내부에 서도 5기의 저장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구덩이는 1호 집자리와의 배치 양상으로 보아 저장 관련 시설의 가능성이 높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5호 집자리에서 2580±50 BP 등의 연대가 얻어졌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세종_새롬동_유적_11_11-1호_집자리.jpg&lt;br /&gt;
File:세종_새롬동_유적_집자리_출토_석기.jpg&lt;br /&gt;
File:세종_새롬동_유적_집자리_출토_토기.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백제문화재연구원. (2014). &amp;lt;i&amp;gt;행정중심복합도시 내 1-4지구 공주 제천리·당암리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4837478&lt;br /&gt;
* 백제문화재연구원. (2014). &amp;lt;i&amp;gt;행정중심복합도시부지 내 2-1·2지점 공주 당암리·연기 송원리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4078712&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432&amp;diff=27151</id>
		<title>600-143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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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5:22: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새롬동 유적(世宗 새롬洞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새롬동 유적&lt;br /&gt;
| 이칭별칭=세종 새롬동 유적, 공주 당암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세종특별자치시 새롬동 556(舊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당암리)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구덩이]], [[돌무지]], [[함정]], [[움무덤]], [[돌널무덤]], [[독무덤]], [[가락동식 집자리]], [[송국리식 집자리]]&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문수균&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세종특별자치시 새롬동 556(舊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당암리) 일원에 위치한다. 행정 중심 복합 도시 건설에 따라 2008~2012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 지역 내 당암리 소골, 당암리 당골2, 당암리 선돌, 당암리 가소골 나·다 구역 등 총 5개 지점에서 청동기 시대 유적이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집자리|집자리]] 50기, [[구덩이|구덩이]] 24기, [[돌무지|돌무지(積石)]] 1기, [[함정|함정(陷穽)]] 1기, [[움무덤|움무덤(土壙墓)]] 1기,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3기, [[독무덤|독무덤(甕棺墓)]] 1기와 그 밖에 초기 철기 시대 및 백제 시대 무덤, 고려~조선 시대 집자리와 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조사 지역은 행정 중심 복합 도시 서부 지역에 해당하며, 동쪽에는 북서에서 남동 방향으로 제천이 흐르다가 금강의 지류인 군계천과 합류하여 금강으로 유입된다. 해발 35~60m의 저평한 구릉 지역에 해당하며, 대체로 구릉의 정상부는 평탄하며, 사면부는 완만하다.&lt;br /&gt;
&lt;br /&gt;
집자리는 [[가락동식집자리|가락동식]]과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으로 분류된다. 가락동식 집자리는 구릉 능선 정상부에 입지하며, 길이 5~12m이며 너비 1.5~5.3m 정도이다. 내부 시설은 [[돌두름식화덕자리|돌 두름식 화덕 자리(圍石式爐址)]], [[초석|주춧돌(礎石)]], [[벽도랑|벽 도랑(壁溝)]], [[저장구덩이|저장 구덩이]] 등이 확인된다. 유물은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토기|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 [[골아가리토기|골아가리 토기(口脣刻目土器)]], [[삼각오목돌살촉|삼각 오목 돌살촉(三角灣入石鏃)]], [[반달돌칼|반달 돌칼]], [[합인석부|조갯날 돌도끼(蛤刃石斧)]], [[숫돌|숫돌(砥石)]], [[갈판과갈돌|갈돌(碾石棒)]], [[공이|공이(敲石)]], [[그물추|그물추]], [[가락바퀴|가락바퀴]] , [[ㄱ자돌칼|‘ㄱ’자 돌칼(東北形石刀)]]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가락동식 집자리 가운데 소골 11호는 길이 12m, 너비 5.3m, 깊이 0.14m의 규모로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다. 내부 시설로는 돌 두름식 화덕 자리 2기, 주춧돌, [[기둥구멍|기둥 구멍]], 벽 도랑, 저장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골아가리 토기,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슴베없는간돌살촉|슴베 없는 돌살촉]], 반달 돌칼, 조갯날 돌도끼, [[외날돌도끼|외날 돌도끼]], 공이, 숫돌, [[갈판과갈돌|갈판]], [[매부리형석기|매부리형 석기]], 그물추, 가락바퀴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장방형 집자리에서는 중축(重築)된 흔적이 확인된다. 선행 집자리가 폐기된 이후 그 위에 2~4개의 벽을 확장 또는 증축하여 후행 집자리를 축조하였다. 내부 시설은 선행 집자리의 것을 계속적으로 활용하거나 증축 이후 새롭게 구축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송국리 유형 집자리는 구릉 능선 정상부 및 사면에 입지하며 대부분 타원형 구덩이를 갖추고 있다. 기둥 구멍과 벽구가 일부 확인되며, 유물은 [[송국리식토기|송국리식 토기]], [[홈자귀|홈자귀(有溝石斧)]] 등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송국리식 집자리 가운데 소골 5호는 지름 3.3~3.7m, 깊이 0.4m이다. 내부 시설로는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 화덕 자리(竪穴式爐址)]] 1기, 벽 도랑, 기둥 구멍, 저장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바리모양토기|바리 토기]], [[항아리모양토기|항아리 모양 토기]], [[붉은간항아리모양토기|붉은 간 항아리 모양 토기]], 반달 돌칼, [[기둥모양외날돌자귀|기둥 모양 외날 돌자귀(柱狀片刃石斧)]], 홈자귀 등이 출토되었다. 구덩이는 당암리 가소골 나 구역에서 확인된 1호 집자리 주변에서 17기가 확인되었는데 집자리 내부에 서도 5기의 저장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구덩이는 1호 집자리와의 배치 양상으로 보아 저장 관련 시설의 가능성이 높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5호 집자리에서 2580±50 BP 등의 연대가 얻어졌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세종_새롬동_유적_11_11-1호_집자리.jpg&lt;br /&gt;
File:세종_새롬동_유적_집자리_출토_석기.jpg&lt;br /&gt;
File:세종_새롬동_유적_집자리_출토_토기.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백제문화재연구원. (2014). &amp;lt;i&amp;gt;행정중심복합도시 내 1-4지구 공주 제천리·당암리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4837478&lt;br /&gt;
* 백제문화재연구원. (2014). &amp;lt;i&amp;gt;행정중심복합도시부지 내 2-1·2지점 공주 당암리·연기 송원리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4078712&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430&amp;diff=27150</id>
		<title>600-143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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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5:21: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새김 줄무늬 토기[沈線文土器]}}&lt;br /&gt;
&lt;br /&gt;
{{개념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새김 줄무늬 토기&lt;br /&gt;
| 이칭별칭=침선문토기&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관련 유적=사천 구평리 유적, 용천 신암리 유적, 울산 검단리 유적&lt;br /&gt;
| 키워드=[[빗금무늬]], [[톱니무늬]], [[비뚠 문살무늬]], [[X자무늬]], [[가로줄무늬]], [[횡대 구획무늬]], [[횡집선무늬]], [[검단리식 토기]], [[가락동식 토기]]&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안재호&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새김 줄무늬 토기는 도구를 이용하여 토기 표면에 다양한 모양의 줄무늬를 새긴 토기들을 아우르는 용어이다. 예리한 도구로써 선(線)의 문양을 새긴 토기를 말하지만, 끝이 둥근 [[시문구|문양 도구(施文具)]]로 새기는 경우도 있다. 무늬의 종류로는 [[단사선문|짧은 빗금무늬(短斜線文)]]·[[거치문|톱니무늬(鋸齒文)]]·[[비뚠문살무늬|비뚠 문살무늬(斜格子文)]]·[[X자무늬|‘X’자 무늬]]·[[횡선문|가로줄무늬(橫線文)]]·[[횡대구획무늬|횡대구획무늬(橫帶區劃文)]]·[[횡집선무늬|횡집선무늬(橫集線文)]] 등이 있다. 무늬가 새겨지는 부위는 구연이 중심이지만, 횡대 구획무늬와 횡집선무늬는 경부와 몸통에도 새겨진다. 이들 다양한 새김 줄무늬는 대체로 다른 무늬와 결합되어 복합무늬를 이루기도 하는데, 남한 지역에서는 시기가 늦어질수록 단독무늬로만 새겨진다. [[빗금무늬|빗금무늬]]·톱니무늬·비뚠 문살무늬·‘X’자무늬·가로줄무늬는 주로 [[송국리단계|송국리 단계]] 이전 시기에 해당한다. 이무늬들은 [[신석기시대|신석기 시대]] 토기무늬를 기원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중국 동북 지역과 북한 지역을 거쳐 남하한 것이다. 낟알 모양의 가로줄무늬 토기(낟알무늬 토기)는 이른바 ‘[[검단리식토기|검단리식 토기(檢丹里式土器)]]’로 불리고 있으며, [[울산검단리유적|울산 검단리 유적]]을 대표로 하여 동남해안 지역-울산·경주·포항-에서 출토된다. 주로 강원 지역에서 남하한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문화의 영향이다.&lt;br /&gt;
&lt;br /&gt;
&#039;&#039;&#039;횡대 구획무늬(橫帶區劃文)&#039;&#039;&#039;는 1조의 가로줄무늬로 상하로 구획하고 그 내부에 새김 줄무늬를 채워 넣은 것을 말하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열점무늬|열점무늬(列点文)]]·[[눌러당긴빗금무늬|눌러 당긴 빗금무늬(押引斜線文)]]·톱니무늬·[[생선뼈무늬|생선뼈무늬(魚骨文)]]·[[삼각집선문|삼각 집선무늬(三角集線文)]]·[[장사선문|긴 빗금무늬(長斜線文)]]·비뚠 문살무늬 등이 있다. &#039;&#039;&#039;횡집선무늬(橫集線文)&#039;&#039;&#039;는 북한 지역의 평북 [[용천신암리유적|신암리 Ⅰ·Ⅱ기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열점무늬나 단추형의 [[원형첨부문|원형 첨부문(圓形貼付文)]]과 함께 새겨진다. 횡대 구획무늬와 횡집선무늬는 송국리 단계 이전에 한반도의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는데, 중국 동북 지역의 초기 청동기 시대에 보이는 주된 무늬여서 그 영향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 늦은 시기에 속하는 [[사천구평리유적|사천 구평리 유적]]에서도 [[겹아가리토기|겹아가리 토기(二重口緣土器)]]·[[덧띠토기|덧띠 토기(突帶文土器)]]와 함께 횡대 구획 톱니무늬의 [[굽다리접시|굽다리 접시(高杯)]]와 횡집선무늬의 [[띠모양손잡이|띠 모양 손잡이(橋狀把手)]] 또는 몸통 편이 출토되었다. 이것도 외래계 요소라고 생각되므로, 신석기 시대 늦은 시기부터 중국 동북 지역과 관련성이 있었다고 판단된다.&lt;br /&gt;
&lt;br /&gt;
새김 줄무늬 토기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빗금무늬는 겹아가리와 결합하여 [[가락동식토기|가락동식 토기]]를 성립시키기도 하며, 대체로 송국리 단계 직전에는 소멸되지만, 영남 동부 지역에서는 늦은 시기까지 남아 있다. 이 문양은 한반도 서북 지역의 [[팽이토기|팽이 토기]] 문화권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반하여 한반도 동북 지역의 영향으로 성립된 [[역삼동식토기|역삼동식 토기]]는 [[구멍무늬|구멍무늬]]·[[혹무늬|혹무늬]]가 주요 문양이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400px&amp;gt;&lt;br /&gt;
File:밀양_금천리_유적_출토_새김_줄무늬_토기.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배진성. (2003). 무문토기의 성립과 계통. &amp;lt;i&amp;gt;영남고고학, 32&amp;lt;/i&amp;gt;, 5-34. https://www.riss.kr/link?id=A30032369&lt;br /&gt;
* 安在皓, 千羨幸. (2004). 前期無文土器の文様編年と地域相. &amp;lt;i&amp;gt;小田富士雄先生退職記念事業会&amp;lt;/i&amp;gt;.&lt;br /&gt;
* 安在皓. (2004). &amp;lt;i&amp;gt;韓國無文土器の炭素14年代&amp;lt;/i&amp;gt;. 學生社.&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89&amp;diff=27149</id>
		<title>600-1389</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89&amp;diff=27149"/>
		<updated>2026-05-06T05:18: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상동 유적(大邱 上洞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상동 유적&lt;br /&gt;
| 이칭별칭=대구 상동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대구광역시 수성구 상동 27-5, 72, 89-2, 162-4, 310-1, 555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구덩이]], [[고인돌]], [[돌덧널무덤]], [[송국리식 집자리]], [[화덕 자리]], [[붉은 간 토기]], [[민무늬 토기]], [[돌칼]], [[골아가리 토기]], [[붉은 간 토기]], [[민무늬 토기]], [[가지무늬 토기]], [[검단리 유형]], [[돌널무덤]], [[돌검]], [[돌살촉]]&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유병록&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대구광역시 수성구 상동 27-5, 72, 89-2, 162-4, 310-1, 555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은 2000~2011년까지 여러 차례 조사되었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상동 우방아파트 건립으로(상동 72) [[집자리|집자리]] 20기, [[구덩이|구덩이]] 6기, [[고인돌|고인돌]] 1기, [[돌덧널무덤|돌덧널무덤(石槨墓)]] 5기, 수성초등학교 건립으로(상동 89-2) 집자리 20기를 확인하였다. 이후 대구한의대학교 증축으로(상동 162-11 유적) 상동 162-4 일원을 조사하여 집자리 2기, 아파트 건립(상동 552-8 유적)으로 상동 555 일대를 조사하여 집자리 3기를 확인하였다. 세종문화재연구원에서는 세계 육상대회 마라톤 코스 확장 공사로 두차례 조사하였다. 1단계 조사는 상동 27-5 일원으로(상동 1-64 유적) 돌덧널무덤 30기, 구덩이 4기를 확인하였고, 2단계 조사는 상동 310-1 일원으로(상동 63-13 유적) 돌덧널무덤 5기를 확인하였다.&lt;br /&gt;
&lt;br /&gt;
유적은 대구 시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금호강(琴湖江)과 합류하는 신천(新川)의 동쪽 약 300m 거리 안쪽에 형성된 자연 제방 위 충적 지대에 입지한다. 유적의 특징으로는 신천변 주변으로는 집자리가 확인되며, 남북쪽으로 돌덧널무덤과 중동 고인돌, 상동 고인돌Ⅱ 유적과 인접하여 집중 분포한다.&lt;br /&gt;
&lt;br /&gt;
집자리는 총 45기로, 형태에 따라 장방형, 방형과 원형으로 나뉘며, 장방형과 방형은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 원형은 늦은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방형 집자리 중에도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 집자리]]로 분류되는 일부 집자리가 있어 송국리식 집자리는 총 8기이다. 일반적으로 이른 시기의 장방형과 방형 집자리는 내부에 [[화덕자리|화덕 자리]]가 확인되지만, 상동 유적에서는 이른 시기로 추정되는 32기의 집자리 중 화덕 자리가 있는 것은 14기에 불과하다. 화덕 자리 중에서도 돌 두름식(圍石式)이 장방형에서 2기가 확인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구덩식이다. 즉, 장방형 집자리 중에도 화덕 자리가 없는 것이 4기, 방형은 13기이다. 이 집자리들은 대부분 신천의 흐름과 같이 남북 방향의 자연 제방을 따라 이어지며, 일부는 이를 벗어나 따로 만들어진 경우도 2기가 있다. 또한, 밀집된 공간 내에서 집자리의 일부는 서로 겹쳐 만들어진 것도 있다.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송국리식 집자리는 이른 시기 집자리와 같은 영역에 혼재하며, 일부는 이른 시기 집자리를 파괴하고 조성되었다.&lt;br /&gt;
&lt;br /&gt;
상동 162-11 유적의 2기의 집자리 중 1호는 길이 4.4m, 너비 4.2m, 깊이 0.9m이다. 형태는 방형이며, 네 벽면에는 크고 작은 강돌(川石)을 최대 10단, 높이로는 최고 0.9m로 쌓았다. 바닥으로는 별다른 시설을 하지 않고 목탄만 일부 확인된다. 이러한 벽체를 ‘돌담형 벽체’로 명명하게 되었다. 유물은 [[골아가리|골아가리(口脣刻目)]]에 세 귀가 달린 뾰족 바닥의 바리(三耳附尖底鉢)가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손잡이달린토기|손잡이 달린 토기(把手附土器)]],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와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다수와 [[돌칼|돌칼(石刀)]] 등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장방형 집자리에서는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의 특징인 다양한 무늬가 있는 토기가 출토되었다.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골아가리토기|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골아가리 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口脣刻目土器)]], [[겹아가리짧은빗금구멍무늬토기|겹아가리 짧은 빗금 구멍무늬 토기(二重口緣短斜線孔列土器)]],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토기|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 [[짧은빗금구멍무늬토기|짧은 빗금 구멍무늬 토기(短斜線孔列土器)]], [[골아가리토기|골아가리 토기(口脣刻目土器)]] 등이다. 이 외에 이 유적의 특징적인 유물은 [[골아가리손잡이달린토기|골아가리 손잡이 달린 토기(口脣刻目把手附土器)]]와 [[가지무늬항아리|가지무늬 항아리(彩文壺)]]이다. 골아가리 손잡이 토기는 대구 지역에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토기로 이른 시기의 요소인 골아가리와 늦은 시기의 요소인 [[손잡이|손잡이]]가 결합된 것으로 이른 시기에서 늦은 시기로 바뀌는 시기에 등장한 지역색이 있는 토기이다. 이 토기가 출토된 집자리는 장방형인데, 이른 시기의 또 다른 토기 중 하나인 [[가지무늬토기|가지무늬 토기]]와 같이 출토되었다. 유적에서 완형의 가지무늬 토기가 6기의 집자리에서 총 8점이 출토되었는데 집자리 4기는 장방형 집자리에 화덕 자리가 있는 것이다. 석기는 토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기를 반영하는 유물의 양이 많지 않고, 장방형 집자리에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슴베없는돌살촉|슴베 없는 돌살촉(無莖式石鏃)]]나 [[기둥모양외날돌자귀|기둥 모양 외날 돌자귀(柱狀片刃石斧)]], [[역사다리꼴돌칼|역사다리꼴 돌칼(逆梯形石刀)]] 등이다.&lt;br /&gt;
&lt;br /&gt;
송국리식 집자리는 방형이 4기, 원형이 4기이다. 방형 중에는 가운데 타원형 구덩이 안에 다시 [[기둥구멍|기둥 구멍]]이 나란하게 두 개가 배치된 것이 1기, 구덩이 벗이 기둥 구멍만 2개 있는 것이 3기이다. 원형 중에는 둥근 구덩이 바깥에 기둥 구멍이 각각 하나씩 있는 것이 2기, 그리고 집자리 안에 아무런 시설이 없는 것이 2기로 다양하다. 이 집자리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손잡이 달린 토기(把手附土器)인데, 이 토기는 대구 지역뿐 아니라 울산을 중심으로 한 [[검단리유형|검단리 유형]]의 대표적 유물이다.&lt;br /&gt;
&lt;br /&gt;
상동 유적의 무덤 41기 중 상동 72 유적(우방아파트 부지 내 유적) [[덮개돌|덮개돌(上石)]]이 있는 고인돌 1기(2호)를 포함한 무덤의 구조는 돌덧널무덤 26기,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8기, 두 가지가 섞인 혼합형(石棺石槨墓) 5기로 구분된다. 이러한 무덤의 구조가 시기차를 반영하지는 않는다. 특히 상동 552-8 유적의 무덤 중 대형의 2호를 중심으로 주변에 규모가 작은 3~5호가 2호를 둘러싸고 조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주변의 신천 서쪽의 [[대구이천동고인돌|이천동 고인돌 유적]]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lt;br /&gt;
&lt;br /&gt;
고인돌 내 유물로는 6호에서 [[마디자루간돌검|마디 자루 간 돌검(有節式石劍)]]와 21호에서 [[통자루간돌검|통자루 간 돌검(一段柄式石劍)]] 등 2점의 [[돌검|돌검(石劍)]]와 [[돌살촉|돌살촉(石鏃)]] 48점이 출토되었다. 돌화살은 모두 [[슴베식|슴베식(有莖式)]]으로 촉의 단면은 모두 마름모꼴이며 촉과 슴베의 구분이 불분명한 일체형 8점을 제외하면 모두 촉과 슴베의 구분이 명확하다. 무덤에서는 붉은 간 토기가 확인되지 않았았는데, 이는 대구 지역 내에서도 특히 신천 유역 주변의 공통적 특징이다.&lt;br /&gt;
&lt;br /&gt;
유적의 연대는 상동 555 유적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통해 1호 집자리 3170±50 BP(보정 연대 기원전 1540~1310년), 2호 2930±50 BP(보정 연대 기원전 1310~980년)로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300px&amp;gt;&lt;br /&gt;
File:대구_상동_유적(상동_1-64_유적)_6-9호_돌덧널무덤.jpg&lt;br /&gt;
File:대구_상동_유적(상동_162-11_유적)_1호_집자리_출토_토기.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600px&amp;gt;&lt;br /&gt;
File:대구_상동_유적_집자리와_출토_유물.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시굴조사 || 2004년 6월 || 대구 한의대학교 학생생활관 신축부지 내 문화유적시굴조사약보고서 || 2004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6년 1월 ~ 2006년 3월 || 대구 상동 162-11번지 유적 || 2008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6년 8월 16일 ~ 2007년 2월 2일 || 대구 상동 552-8번지 유적 || 2009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2). &amp;lt;i&amp;gt;대구 수성구 상동 우방아파트 건립부지내 상동유적발굴조사보고서&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9942741&lt;br /&gt;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4). &amp;lt;i&amp;gt;대구 수성초등학교 부지내 상동유적발굴조사보고서&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9652453&lt;br /&gt;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8). &amp;lt;i&amp;gt;대구 상동 162-11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1521201&lt;br /&gt;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9). &amp;lt;i&amp;gt;대구 상동 552-8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1692338&lt;br /&gt;
* 세종문화재연구원. (2012). &amp;lt;i&amp;gt;대구 상동 1-64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3177485&lt;br /&gt;
* 세종문화재연구원. (2013). &amp;lt;i&amp;gt;대구 상동 63-13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3192920&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85&amp;diff=27148</id>
		<title>600-138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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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5:16: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상도리 고인돌군[江華 上道里支石墓群]}}&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상도리 고인돌군&lt;br /&gt;
| 이칭별칭=강화 상도리 고인돌군, 강화 고인돌 지석묘군&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 상도리 산165·156&lt;br /&gt;
| 성격=고인돌&lt;br /&gt;
| 키워드=[[고인돌]], [[굽다리 토기]]&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강동석&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세계 문화유산 강화 고인돌 유적. 인천광역시 기념물 강화 부근리 고인돌군. 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 상도리 산165·156에 위치한다. 해발 74m의 부근리와 상도리의 경계 지점이 되는 곳의 능선을 따라 고인돌 4기가 분포하고 있다. 구릉 남북 쪽에는 간척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구릉의 동쪽 끝자락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형성된 조강(祖江)과 접해 있다.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된 [[강화부근리고인돌|부근리 고인돌군]]에 포함된다.&lt;br /&gt;
&lt;br /&gt;
고인돌은 모두 [[개석식고인돌|덮개식(蓋石式)]]이다. 13번 고인돌은 남쪽에 위치한 덮개돌(上石)은 판돌형(板石形)으로 길이 2.1m, 너비 1.2m, 두께 0.4m이다. 덮개돌의 하단부가 지하에 묻혀 있어 하부 구조는 거의 확인할 수 없었으나, 깬돌(割石)들의 노출 상태로 보아 간단한 무덤방(墓室)을 만들고 주위에 얇게 적석(積石)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고인돌 내부에서는 출토되지 않았으며, 고인돌 동북편에 흩어진 돌들 사이에서 약간의 토기 편들과 [[굽다리토기|굽다리 토기(高杯)]], 굽다리(臺脚) 편 등이 수습되었다.&lt;br /&gt;
&lt;br /&gt;
상도리 고인돌은 고려산 일대의 산기슭에 3~5기씩 작은 군집을 이루고 있는 다른 덮개식 고인돌군과 같은 분포 양상을 보이고 있다.&lt;br /&gt;
&lt;br /&gt;
==지정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구분 !! 지정 종목 !! 지정 명칭 !! 자세히 보기&lt;br /&gt;
|-&lt;br /&gt;
| 국가유산 || 인천광역시 기념물 || 강화 부근리 고인돌군 (江華 富近里 고인돌群) || &amp;lt;span class=&amp;quot;plainlinks&amp;quot;&amp;gt;[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2300440000 🔗]&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 세계유산 || UNESCO 세계유산 ||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 &amp;lt;span class=&amp;quot;plainlinks&amp;quot;&amp;gt;[https://www.heritage.go.kr/heri/html/HtmlPage.do?pg=/unesco/Heritage/Heritage_07.jsp&amp;amp;pageNo=5_2_2_0 🔗]&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국립중앙박물관. (1967). &amp;lt;i&amp;gt;한국지석묘연구&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9904726&lt;br /&gt;
* 서울대학교인문학연구소. (1999). &amp;lt;i&amp;gt;강화도 고인돌군&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9880863&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85&amp;diff=27147</id>
		<title>600-138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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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5:15: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상도리 고인돌군[江華 上道里支石墓群]}}&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상도리 고인돌군&lt;br /&gt;
| 이칭별칭=강화 상도리 고인돌군, 강화 고인돌 지석묘군&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 상도리 산165·156&lt;br /&gt;
| 성격=고인돌&lt;br /&gt;
| 키워드=[[고인돌]], [[덮개식]], [[굽다리 토기]]&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강동석&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세계 문화유산 강화 고인돌 유적. 인천광역시 기념물 강화 부근리 고인돌군. 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 상도리 산165·156에 위치한다. 해발 74m의 부근리와 상도리의 경계 지점이 되는 곳의 능선을 따라 고인돌 4기가 분포하고 있다. 구릉 남북 쪽에는 간척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구릉의 동쪽 끝자락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형성된 조강(祖江)과 접해 있다.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된 [[강화부근리고인돌|부근리 고인돌군]]에 포함된다.&lt;br /&gt;
&lt;br /&gt;
고인돌은 모두 [[개석식고인돌|덮개식(蓋石式)]]이다. 13번 고인돌은 남쪽에 위치한 덮개돌(上石)은 판돌형(板石形)으로 길이 2.1m, 너비 1.2m, 두께 0.4m이다. 덮개돌의 하단부가 지하에 묻혀 있어 하부 구조는 거의 확인할 수 없었으나, 깬돌(割石)들의 노출 상태로 보아 간단한 무덤방(墓室)을 만들고 주위에 얇게 적석(積石)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고인돌 내부에서는 출토되지 않았으며, 고인돌 동북편에 흩어진 돌들 사이에서 약간의 토기 편들과 [[굽다리토기|굽다리 토기(高杯)]], 굽다리(臺脚) 편 등이 수습되었다.&lt;br /&gt;
&lt;br /&gt;
상도리 고인돌은 고려산 일대의 산기슭에 3~5기씩 작은 군집을 이루고 있는 다른 덮개식 고인돌군과 같은 분포 양상을 보이고 있다.&lt;br /&gt;
&lt;br /&gt;
==지정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구분 !! 지정 종목 !! 지정 명칭 !! 자세히 보기&lt;br /&gt;
|-&lt;br /&gt;
| 국가유산 || 인천광역시 기념물 || 강화 부근리 고인돌군 (江華 富近里 고인돌群) || &amp;lt;span class=&amp;quot;plainlinks&amp;quot;&amp;gt;[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2300440000 🔗]&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 세계유산 || UNESCO 세계유산 ||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 &amp;lt;span class=&amp;quot;plainlinks&amp;quot;&amp;gt;[https://www.heritage.go.kr/heri/html/HtmlPage.do?pg=/unesco/Heritage/Heritage_07.jsp&amp;amp;pageNo=5_2_2_0 🔗]&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국립중앙박물관. (1967). &amp;lt;i&amp;gt;한국지석묘연구&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9904726&lt;br /&gt;
* 서울대학교인문학연구소. (1999). &amp;lt;i&amp;gt;강화도 고인돌군&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9880863&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421&amp;diff=27146</id>
		<title>600-142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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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5:14: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상인동 유적(大邱 上仁洞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상인동 유적&lt;br /&gt;
| 이칭별칭=대구 상인동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항아리 모양 토기]], [[숫돌]], [[가락바퀴]], [[홈자귀]], [[골아가리 토기]], [[고인돌]], [[돌덧널무덤]], [[돌널무덤]], [[송국리식 집자리]], [[돌칼]], [[모룻돌]], [[격지]], [[민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화덕 자리]], [[조갯날 돌도끼]], [[돌끌]]&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하진호&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일원에 위치한 여러 유적들을 아울러 상인동 유적이라 한다. 유적은 대구 분지의 남부 산지를 이루는 대덕, 앞산, 청룡산으로 이루어진 비슬산괴와 산록 지대로 둘러싸인 유역 분지에 위치한다. 지형분류상 이 일대는 대덕산 서록에서 발원하여 서류하면서 형성된 진천천의 옛 하도와 성당천 등의 소개천들에 의해 형성된 전형적인 복합 선상지(扇狀地)로, 유적은 해발 35~40m 정도의 비교적 평탄한 선상지의 선앙(扇央)에서 선단(扇端)으로 이행하는 경계부에 위치한다. 한편 본 유적이 위치한 대구 달서구 월배 지역은 과거 경작지로 운용되었다가 1970년대부터 공단이 조성되었고, 2000년대부터는 본격적인 공동 주택 개발이 진행되면서 본래의 경관이 크게 변화되었다. 상인동 유적은 이 과정에서 발굴 조사되었다.&lt;br /&gt;
&lt;br /&gt;
상인동에서 처음 발굴된 유적은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조사된 월성동·상인동 유적이다(월성동 선사 유적, 진천동·월성동 선사 유적). 월성동 475-12·상인동 1-36에 위치하며, 1987년 [[집자리|집자리]] 2기, 1997년 집자리 3기를 추가로 조사하였다. 모두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며, 집자리 내부에서 [[항아리모양토기|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 [[골아가리토기|골아가리(口脣刻目) 토기]] 편과 [[삼각간돌살촉|삼각 간 돌살촉]], [[양날돌도끼|양날 돌도끼兩刃石斧)]], [[홈자루간돌검|홈 자루 간 돌검(二段柄式磨製石劍)]],  [[숫돌|숫돌(砥石)]], [[가락바퀴|가락바퀴]]가 출토되었고 집자리 주변에서 [[배모양반달돌칼|배 모양(舟形) 반달 돌칼]], [[돌창|돌창(石槍)]], [[슴베간돌살촉|슴베 간 돌살촉(有莖式磨製石鏃)]], 홈 자루 간 돌검, [[홈자귀|홈자귀(有溝石斧)]] 등도 수습되었다. 1992년 아파트 건설로 인접하여 위치하는 상인동 42 일원이 조사되었다(상인동 [[고인돌|고인돌]]). 고인돌 덮개돌(上石)  1기와 [[돌덧널무덤|돌덧널무덤(石槨墓)]] 7기가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홈 자루 간 돌검, [[슴베돌살촉|슴베 돌살촉(有莖式石鏃)]], [[항아리모양의붉은간토기|항아리 모양의 붉은 간 토기]], [[곱은옥|굽은옥(曲玉)]]이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이후 2004~2009년 사이 상인동 일대의 공동 주택 개발이 본격화됨에 따라 많은 유적이 조사되었다. 2004년에 상인동 171-1 유적과 월성동 1275 유적이 조사되었다. 상인동 171-1 유적은 집자리 2기,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6기, [[구덩이|구덩이]] 1기, [[구|도랑(溝)]] 1기가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원형이며 가운데 구덩이와 양 [[기둥구멍|기둥 구멍]]이 있는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 집자리]]다. 유물은 항아리 모양 토기, 슴베 돌살촉, [[슴베간돌검|슴베 간 돌검(有莖式磨製石劍)]], [[돌칼|돌칼]], [[모룻돌|모룻돌(臺石)]], 미완성 석기, [[격지|격지(剝片)]] 등이 출토되었다. 월성동 1275 유적은 상인동 133에 위치한다. 평면 형태가 방형, 원형인 집자리 17기와 [[야외노지|야외 화덕 자리]] 4기, 돌덧널무덤 1기, 구덩이 5기가 조사되었는데 원형 집자리가 중심인 마을 이다. 원형 집자리에서는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골아가리 토기, 젖꼭지 모양 손잡이 달린 바리, 슴베 돌살촉, [[사다리꼴돌칼|사다리꼴 돌칼(梯形石刀)]] 등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2005년과 2006년 사이에 조사된 유적은 상인동 123-1 유적, 상인동 152-1 유적, 상인동 87 유적, 상인동 98-1 유적이 있다. &#039;&#039;&#039;상인동 123-1 유적&#039;&#039;&#039;은 대구 월서초등학교 신축으로 조사하여, 집자리 22기와 [[기둥건물터|기둥 건물터(掘立柱建物址)]] 1기, 구덩이 6기, 야외 화덕 자리 1기를 확인하였다. 집자리의 형태는 장방형, 방형, 원형 등 다양하게 확인되었는데 중·대형의 장방형 집자리가 중심인 마을이다. 장방형 집자리에서는 바리 토기(深鉢形土器), [[얕은바리모양토기|얕은 바리 토기(淺鉢形土器)]],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무늬는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골아가리토기|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골아가리 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口脣刻目土器)]], [[겹아가리골아가리토기|겹아가리+골아가리 토기(二重口緣口脣刻目土器)]], 골아가리 토기, [[구멍무늬토기|구멍무늬 토기(孔列土器)]] 등이다. 석기는 [[자루간돌검|자루 간 돌검(有柄式石劍)]], [[기둥모양외날돌자귀|기둥 모양 외날 돌자귀(柱狀片刃石斧)]], 슴베식 돌살촉 등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039;&#039;&#039;상인동 152-1 유적&#039;&#039;&#039;은 상인동 150-11 일원에 위치하며, 고인돌 덮개돌 1기, 돌덧널무덤 5기, [[돌더미|돌더미(集石)]] 3기가 확인되었다. 고인돌 덮개돌은 유적 분포 지도에 대구 상인동 고인돌 Ⅲ으로 알려진 것이지만 조사 결과 원래 위치에서 이동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붉은 간 토기 1점, [[간돌살촉|간 돌살촉]] 7점이 확인되었다. 간 돌살촉은 촉신 단면이 마름모꼴인 [[긴버들잎모양의슴베돌살촉|긴 버들잎 모양(柳葉形)의 슴베 돌살촉]]이다. 상인동 87 유적은 2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하였다. Ⅰ구역은 영남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하여 집자리 18기, 고인돌 1기, 돌덧널무덤 2기, 깐 돌(敷石) 7기, 구덩이 4기, [[매납유구|매납 유구(埋納遺構)]] 1기, 야외 화덕 자리 1기를 확인하였다. Ⅱ구역은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하여 구덩이 20기, 돌덧널무덤 2기, 도랑 2기를 확인하였다. 집자리는 장방형, 방형, 원형이 모두 확인된다. 원형은 지름 2.3~3.5m이며, 가운데 구덩이와 양 기둥 구멍을 갖춘 송국리식 집자리다. 무덤은 5기가 확인되었고 구조는 돌 두름식(圍石式)와 돌덧널식이 있다. 유물은 집자리와 구덩이 내부에서 민무늬 토기, 젖꼭지 모양 손잡이 달린 바리, 미완성 돌도끼, 숫돌, 격지 등이 출토되었고, Ⅱ구역 돌덧널무덤 1호에서 [[통자루간돌검|통자루 간 돌검(一段柄式石劍)]] 1점, 가락바퀴 1점, 슴베 끝이 편평한 슴베 돌살촉 11점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039;&#039;&#039;상인동 98-1 유적&#039;&#039;&#039;은 상인동 95에 위치하며, 집자리 11기, 돌덧널무덤 12기, 돌무지 2기, 도랑 1기가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세장방형 8기, 방형 2기, 원형 1기로 장방형 집자리가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집자리의 규모는 5호가 길이 15m로 가장 크며, 방형 집자리는 4~4.6m, 원형 집자리는 지름 4.6m이다. 장방형 집자리의 내부 시설은 [[화덕자리|화덕 자리]], [[저장구덩이|저장 구덩이]], 기둥 구멍, 바닥을 불로 다진 흔적이 확인되었다. 화덕 자리는 [[돌두름식화덕자리|돌 두름식]],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 등이 있고 기둥 구멍은 정형성을 찾을 수 없다. 출토 유물은 골아가리 토기,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토기|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토기]], 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골아가리 토기와 [[돌대팻날|돌 대팻날]], [[홈자루돌검자루|홈 자루 돌검자루]], 가락바퀴, 숫돌, [[합인석부|조갯날 돌도끼(蛤刃石斧)]], [[돌끌|돌끌(石鑿)]] 등 187점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2008년에는 도로 건설에 앞서 &#039;&#039;&#039;상인동 128-8 유적&#039;&#039;&#039;이 조사되어 집자리 16기, 고인돌 12기, 구덩이 4기, 야외화덕 자리 3기와 [[초기철기시대|초기 철기 시대]] 널무덤(土壙墓) 1기 등이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세장방형, 장방형, 방형, 원형 등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집자리 내부에 돌 두름식 화덕 자리와구덩식 화덕 자리가 함께 설치된 것도 있다. 출토 유물은 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토기, [[겹아가리구멍짧은빗금무늬토기|겹아가리 구멍 짧은 빗금무늬 토기(二重口緣孔列短斜線文土器)]], 골아가리 토기, 구멍무늬 토기 등이 확인되었다. 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토기는 방형 집자리에서 확인되었다. 수량은 골아가리 토기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2009년에는 상인동 112-3 유적과 상인동 119-20 유적이 조사되었다. &#039;&#039;&#039;상인동 112-3 유적&#039;&#039;&#039;은 장방형 집자리 3기와 구덩이 2기가 조사되었고 집자리 내부에서 골아가리 토기, 바리 토기, 가락바퀴, 격지, 숫돌, 슴베 돌살촉, [[간돌검자루|간 돌검 자루]] 편이 출토되었다. 상인동 119-20 유적에서는 집자리 10기, 돌덧널무덤 2기, 구덩이 4기, 야외 화덕 자리 1기 등 총 17기를 확인하였다. 장방형 집자리 내부 시설은 화덕 자리,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화덕 자리는 집자리 가운데 2개가 배치되었으며, 구덩식과 돌 두름식이 확인되었다. 화덕 자리와 유물의 출토 정황을 통해 집자리 내에서 저장·가공 공간과 작업 공간 및 생활도구를 보관하는 공간, 취사 공간, 취침 공간 등을 구분할 수 있다. 원형은 가운데 구덩이와 좌우에 기둥 구멍이 있는 송국리식 집자리로, 5기가 확인되었다. 규모는 지름 4~5m내외이다. 유적의 서편에 2기, 북동편에 3기가 무리를 이루며 위치한다. 유물의 대부분이 민무늬 토기 저부와 아가리 편, 석기 편 등이나 토기의 문양 구성에서 [[골아가리구멍무늬토기|골아가리 구멍무늬 토기(口脣刻目孔列土器)]], 골아가리 토기가 확인되었다. 석기의 경우 통자루 간 돌검, 기둥 모양 외날 돌자귀, 장방형 돌칼(長方形石刀) 등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상인동 유적은 집자리, 무덤, 저장 시설 등 마을을 구성하는 다양한 구조물이 복합된 마을 유적이다. 집자리는 총 113기가 확인되었으며 형태는 장방형이 50여 기, 방형 20여 기, 원형이 40여 기가 분포한다. 집자리는 출토 유물과 중복 관계,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통해 (가는)장방형 집자리에서 방형 집자리, 그리고 원형 집자리로 시기별 전개 양상이 관찰된다. 집자리 내부 시설로는 돌 두름식 화덕 자리와 구덩식 화덕 자리가 함께 사용되고, 저장 구덩이가 집자리의 가장자리에 설치된 것도 있다. 기둥 구멍은 정형성이 확인되지 않는다. 원형 집자리는 가운데 구덩이와 좌우에 기둥 구멍이 있는 송국리식 집자리다. 상인동 98-1 유적에서는 집자리의 개축(改築)과 보수(補修), 재사용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집자리의 폐기(廢棄) 과정에서 이루어진 의례 행위로 추정되는 돌쌓기(積石) 행위가 확인된 유적은 상인동 98-1 유적, 상인동 128-8 유적, 상인동 112-3 유적 등 다수의 집자리에서 확인된다. 무덤은 고인돌 덮개돌이 남아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하부 구조인 돌덧널무덤만 확인된다. 상인동 유적에서 확인된 무덤은 42기이지만, 이 무덤이 한 군집을 이루고 있지는 않고 집자리군 주변에 몇 기식 분포하는 양상이다. 이는 같은 월배 선상지에 위치한 [[대구대천동유적|대천동 유적]]에서 무덤 68기가 확인된 것과는 다른 마을 경관을 보이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상인동 유적은 대구 월배 지역에서 확인되는 모든 유형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특히 선상지의 선앙부에 서 선단부로 이행되는 구간의 낮은 언덕에는 무덤, 평지에는 집자리가 배치되는 마을의 분포 정형을 확인할 수 있어 단위 마을(單位聚落)의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대구_상인동_유적(상인동_119-20_유적)_1_2호_집자리.jpg&lt;br /&gt;
File:대구_상인동_유적(상인동_119-20_유적)_전경.jpg&lt;br /&gt;
File:대구_상인동_유적(상인동_152-1_유적)_돌덧널무덤.jpg&lt;br /&gt;
File:대구_상인동_유적(상인동_171-1_유적)_3호_돌덧널무덤.jpg&lt;br /&gt;
File:대구_상인동_유적(상인동_87_유적)_고인돌.jpg&lt;br /&gt;
File:대구_상인동_유적(상인동_98-1_유적)_전경.jpg&lt;br /&gt;
File:대구_상인동_유적(월성동_1275_유적)_출토_토기.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시굴조사 || 2005년 2월 4일 ~ 2005년 3월 7일 || 대구 상인동 123-1번지유적 || 2007 || 영남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5년 6월 13일 ~ 2005년 12월 8일 || 대구 상인동 123-1번지유적 || 2007 || 영남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5년 1월 10일 ~ 2005년 3월 17일 || 대구 상인동152-1번지유적 || 2007 || 영남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지표조사 || 2004년 4월 || 대구 상인동152-1번지유적 || 2007 || 영남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시굴조사 || 2004년 9월 30일 ~ 2004년 10월 22일 || 대구 상인동152-1번지유적 || 2007 || 영남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시굴조사 || 2005년 3월 2일 ~ 2005년 4월 22일 || 대구 상인동 87번지 유적-Ⅱ지구- || 2008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5년 9월 5일 ~ 2006년 7월 20일 || 대구 상인동 87번지 유적-Ⅱ지구- || 2008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경북대학교. (2004). &amp;lt;i&amp;gt;경북대학교 연보–창간호–&amp;lt;/i&amp;gt;.&lt;br /&gt;
* 경북대학교박물관. (1991). &amp;lt;i&amp;gt;대구 월성동 선사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59201&lt;br /&gt;
* 경북대학교박물관. (2000). &amp;lt;i&amp;gt;대구 진천동·월성동 선사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8048663&lt;br /&gt;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8). &amp;lt;i&amp;gt;대구 상인동 87번지 유적–Ⅱ지구–&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1548603&lt;br /&gt;
* 대구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1990). &amp;lt;i&amp;gt;대구시사&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1708053&lt;br /&gt;
* 대동문화재연구원. (2008). &amp;lt;i&amp;gt;대구 상인동 98-1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1692334&lt;br /&gt;
* 대동문화재연구원. (2011). &amp;lt;i&amp;gt;대구 상인동 119-20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2710993&lt;br /&gt;
* 삼한문화재연구원. (2010). &amp;lt;i&amp;gt;대구 상인동 128-8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3184677&lt;br /&gt;
* 삼한문화재연구원. (2011). &amp;lt;i&amp;gt;대구 상인동 112-3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2823623&lt;br /&gt;
* 영남대학교박물관. (2006). &amp;lt;i&amp;gt;대구 월성동 1275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0881838&lt;br /&gt;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6). &amp;lt;i&amp;gt;대구 상인동 171-1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1392094&lt;br /&gt;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7). &amp;lt;i&amp;gt;대구 상인동 123-1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1064413&lt;br /&gt;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7). &amp;lt;i&amp;gt;대구 상인동 152-1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1064412&lt;br /&gt;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8). &amp;lt;i&amp;gt;대구 상인동 87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1518344&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586&amp;diff=27145</id>
		<title>600-1586</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586&amp;diff=27145"/>
		<updated>2026-05-06T02:42: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송국리식 집자리[松菊里式住居址]}}&lt;br /&gt;
&lt;br /&gt;
{{개념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송국리식 집자리&lt;br /&gt;
| 이칭별칭=송국리형 집자리&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관련 지역=한강 유역을 포함한 경기도 일원 및 강원도, 낙동강 상류 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역&lt;br /&gt;
| 관련 유적=부여 송국리 유적, 광주 송암동 유적, 서산 휴암리 유적, 영암 장천리 유적, 거창 대야리 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송국리 유형]], [[송국리식 토기]], [[타원형 구덩이]], [[기둥 구멍]], [[홈자귀]], [[삼각 돌칼]], [[플라스크 모양의 붉은 간 토기]], [[간 돌검]], [[돌살촉]], [[돌도끼]], [[돌널무덤]], [[돌뚜껑움무덤]], [[독무덤]]&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이종철&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송국리식 집자리는 [[부여송국리유적|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조사된 [[집자리|집자리]]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집자리 바닥 중앙에 [[타원형구덩이|타원형 구덩이]]와 그 양쪽에 두 개의 [[기둥구멍|기둥 구멍]]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75년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조사된 이래 [[광주송암동유적|광주 송암동]], [[서산휴암리유적|서산 휴암리]], [[영암장천리유적|영암 장천리]], [[거창대야리유적|거창 대야리 유적]] 등이 보고되면서 그 윤곽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최근까지 집계된 송국리식 집자리는 약 3,000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송국리식 집자리에서 타원형 구덩이와 중심 기둥은 이른 시기부터 늦은 시기까지 전통적으로 설치되는 내부 시설로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이다. 평면 형태는 크게 방형과 원형으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방형은 &#039;&#039;&#039;휴암리식 집자리&#039;&#039;&#039;로, 원형은 송국리식 집자리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평면 형태, 타원형 구덩이, 중심 기둥 등 내부 시설물의 조합에 따라 좀 더 상세하게 분류하는 연구자들도 있다.&lt;br /&gt;
&lt;br /&gt;
송국리식 집자리는 2개의 중심 기둥이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장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송국리식 집자리는 타원형 구덩이와 구덩이 안쪽에 중심 기둥이 설치되는 형태이다. 반면, 타원형 구덩이와 구덩이 바깥쪽에 중심 기둥이 설치되는 집자리는 영남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이외에 타원형 구덩이 주변으로 4개의 기둥이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구조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주거에서 활용되며, 대부분 원형 집자리에서 많이 나타난다.&lt;br /&gt;
&lt;br /&gt;
송국리식 집자리의 내부 시설들은 기본적인 형태를 유지하기도 하지만 변형된 조합을 이루기도 한다. 한 집자리 안에서 타원형 구덩이가 2개 이상 설치되거나 4주의 기둥이 6주로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 또 타원형 구덩이와 중심 기둥 가운데 한 요소가 생략되어 축조되기도 한다. 특히, 중심 기둥만 설치되는 집자리는 대구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여 유적명을 따서 &#039;&#039;&#039;동천동식 집자리(東川洞式住居址)&#039;&#039;&#039;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내부 시설의 변화는 지역적으로 나타나며, 송국리식 집자리의 변화 과정으로 간주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집자리 바닥의 중앙부에서 발견되는 타원형 구덩이의 기능에 대해서는 보관 및 [[저장구덩이|저장 구덩이(貯藏孔)]], 작업 구덩이(作業孔), [[화덕자리|화덕 자리(爐址)]], 집수 시설(集水施設) 등 다양한 용도로 추정된다. 그 중 보관 및 저장 구덩이 혹은 작업 구덩이의 기능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외에 내부 시설로는 내벽 기둥 구멍, 외벽 기둥 구멍, 벽 도랑(壁溝), 물을 빼거나 모으는 도랑(誘引水路)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송국리식 집자리의 분포는 대체적으로 수계(水系)를 중심으로 밀집된다. 한강 유역을 포함한 경기도 일원 및 강원특별자치도, 낙동강 상류 지역을 제외하면 남한 전역에서 고루 발견된다. 최근까지의 조사 성과에 의하면, 인천-경기도 가평-강원특별자치도 고성을 있는 선이 송국리식 집자리의 북한계로 파악되었고, 남쪽으로는 바다 건너 제주도와 일본에까지 이른다. 보령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서부 평야 지역, 금강 유역, 영산강 유역, 보성강 유역 등 중서남부 지역에서는 집자리의 평면 형태와 관계 없이 타원형 구덩이 안쪽에 2개의 기둥 구멍이 설치되는 집자리가 많다. 이러한 분포와 물질 문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에 근거하여 송국리식 집자리로 대표되는 [[송국리유형|송국리 유형]]이 금강 하류 지역 일대에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낙동강 유역에서는 진주 남강댐 수몰 지역의 대단위 발굴 조사를 통해 타원형 구덩이 바깥에 2개의 중심 기둥이 설치되는 집자리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lt;br /&gt;
&lt;br /&gt;
송국리식 집자리에서는 아가리가 바라지고 몸통이 불룩하며 저부로 갈수록 좁아지는 [[송국리식토기|송국리식 토기]], [[홈자귀|홈자귀(有溝石斧)]], [[삼각형돌칼|삼각 돌칼(三角形石刀)]], [[플라스크모양붉은간토기|플라스크 모양의 붉은 간 토기(赤色磨硏土器)]] 등 특징적인 물질 문화를 비롯하여 [[간돌검|간 돌검(磨製石劍)]], [[돌살촉|돌살촉(石鏃)]], [[돌도끼|돌도끼(石斧)]] 등이 출토된다. 이와 같은 집자리는 송국리식 토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며,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돌뚜껑움무덤|돌뚜껑움무덤(石蓋土壙墓)]]·[[독무덤|독무덤(甕棺墓)]]과 함께 송국리 유형을 이룬다.&lt;br /&gt;
&lt;br /&gt;
송국리식 집자리는 송국리식 토기와 함께 기원전 9세기에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부여 송국리에서 처음 조사되던 때에는 기원전 6~4세기로, 조사 성과와 방사성 탄소 연대가 축적되면서 기원전 8세기로 상향되었던 2000년대 초의 연대관보다 좀 더 올려볼 수 있게 되었다. 하한 연대는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이음독널|이음독널(合口式甕棺)]]로 사용된 송국리식 토기, 순천 연향동 대석 유적에서 [[삼각덧띠토기|삼각 덧띠 토기(粘土帶土器)]]가 출토되는 송국리식 집자리 등으로 미루어 보아 기원을 전후하는 시기까지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의 조사 성과가 대량으로 축적되면서 송국리식 집자리가 [[원삼국시대|원삼국 시대]] 이후 까지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lt;br /&gt;
&lt;br /&gt;
송국리식 집자리는 앞 시기의 집자리에서 보이던 화덕 자리가 없고, 기둥의 배치도 장축 2열의 배치와 다른 중심 기둥이 특징이기 때문에 앞 시기 문화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특히 한반도 남부 지역 송국리 문화를 대표하는 주거 형태로서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앞으로 기후와 불의 관계성, 화덕의 사용 여부, 구덩이의 기능, 문화접변 양상 등에서 송국리 유형의 해상도를 더욱 높여 갈 필요가 있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4주가_있는_송국리식_집자리(전주_송천동2가_유적).jpg&lt;br /&gt;
File:송국리식_집자리(부여_송국리_유적_68호_집자리).jpg&lt;br /&gt;
File:중심_기둥만_있는_동천동식_집자리(대구_동천동_유적).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승옥. (2001). 금강유역 송국리형 묘제의 연구-석관묘·돌뚜껑움무덤·옹관묘를 중심으로-. &amp;lt;i&amp;gt;한국고고학보, 45&amp;lt;/i&amp;gt;, 45-74. https://www.riss.kr/link?id=A105301720&lt;br /&gt;
* 이건무. (1992). 송국리형주거분류시론. &amp;lt;i&amp;gt;택와허선도선생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amp;lt;/i&amp;gt;.&lt;br /&gt;
* 이종철. (2015). &amp;lt;i&amp;gt;송국리형문화의 취락체제와 발전&amp;lt;/i&amp;gt;. (박사 학위 논문). 전북대학교. https://www.riss.kr/link?id=T13698155&lt;br /&gt;
* 조현종. (1989). &amp;lt;i&amp;gt;송국리형토기에 대한 일고찰&amp;lt;/i&amp;gt;. (석사 학위 논문). 홍익대학교. https://www.riss.kr/link?id=T2183688&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67&amp;diff=27144</id>
		<title>600-136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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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2:33: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삼포리 유적(高城 三浦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삼포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고성 삼포리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 산 131-1 일대&lt;br /&gt;
| 성격=집자리&lt;br /&gt;
| 키워드=[[집자리]], [[화덕 자리]], [[기둥 구멍]], [[민무늬 토기]], [[덧띠 토기]], [[반달 돌칼]], [[돌도끼]], [[반달돌칼]], [[돌살촉]], [[숫돌]]&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박영구&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 산 131-1 일대에 위치한다. 주택 신축 부지 조사에서 확인되었으며 해발 30m 내외의 구릉 지역으로, 주변으로는 문암천, 황포천이 흐르고 있다.&lt;br /&gt;
&lt;br /&gt;
삼포리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집자리|집자리]] 5기가 조사되었다.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말각 방형과 말각 장방형이다. 1~4호 집자리의 주축 방향은 동서 방향에 가깝고 대체적으로 등고선 방향과 평행하며, 5호는 북서-남동 방향으로 등고선 방향과 직교한다. 집자리는 기반암층인 풍화 암반층을 수직에 가깝게 굴착하여 조성하였으며, 바닥의 레벨은 거의 평탄하다.&lt;br /&gt;
&lt;br /&gt;
집자리의 면적은 20㎡ 이하의 소형과 40㎡ 이상으로 구분되며 내부 시설로는 [[화덕자리|화덕 자리]], [[기둥구멍|기둥 구멍(柱孔)]]등이 확인되었다. 집자리 바닥은 전체가 아니라 일부 공간에만 점토로 다짐 처리하였다, 화덕 자리는 바닥면을 굴착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평지식(2~5호)과 일부 원형으로 굴착하여 사용한 구덩식(1호)으로 대부분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 화덕 자리]]이다. 화덕 자리은 한쪽 짧은 벽으로 약간 치우쳐져 있다.&lt;br /&gt;
&lt;br /&gt;
출토 유물은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편, [[덧띠토기|덧띠 토기(粘土帶土器)]] 편과 같은 소량의 토기류와 [[돌도끼|돌도끼(石斧)]], [[반달돌칼|반달 돌칼]], [[돌살촉|돌살촉]], [[숫돌|숫돌(砥石)]] 등의 석기류가 있다.&lt;br /&gt;
&lt;br /&gt;
삼포리 유적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는 2404±25~2443±25 BP로, 고성의 다른 [[둥근덧띠토기|둥근 덧띠 토기]] 유적들과 동일한 단계의 유적으로 판단된다.&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6년 1월 13일 ~ 2006년 2월 13일 || 고성 삼포리유적 || 2008 || 예맥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박영구. (2015). &amp;lt;i&amp;gt;동해안지역 청동기시대 취락과 사회&amp;lt;/i&amp;gt;. 서경문화사.  https://www.riss.kr/link?id=M13951009&lt;br /&gt;
* 예맥문화재연구원. (2008). &amp;lt;i&amp;gt;고성 삼포리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1554320&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61&amp;diff=27143</id>
		<title>600-136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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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2:31: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삼정리 유적(浦項 三政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삼정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포항 삼정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읍 삼정리 276·515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움무덤]], [[구덩이]], [[도랑]], [[돌더미]], [[그물추]], [[구멍무늬 토기]], [[골아가리 토기]], [[겹아가리 토기]], [[굽다리 토기]], [[붉은 간 토기]], [[가락바퀴]], [[조갯날 돌도끼]], [[돌대팻날]], [[반달 돌칼]], [[갈판]], [[갈돌]], [[민무늬 토기]], [[돌도끼]], [[돌끌]], [[흔암리 유형]]&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배군열&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읍 삼정리 276·515 일원에 위치한다. 포항 구룡포-대보 간 도로 확장 공사로 2004~2005년 조사하여, 삼정1리 유적(삼정리 515)에 서 [[집자리|집자리]] 59기, [[움무덤|움무덤(土壙墓)]] 1기, [[구덩이|구덩이]] 7기, [[구|도랑(溝)]] 3기, [[돌더미|돌더미(集石)]] 1기, 삼정2리 유적(삼정리 276)에서 집자리 9기, 도랑 1기를 확인하였다. 두 유적은 응암산(해발 158.5m)에서 동쪽으로 뻗은 구릉의 말단부에 입지하며, 계곡을 사이에 두고 위치하며 약 700m 거리에 위치한다.&lt;br /&gt;
&lt;br /&gt;
&#039;&#039;&#039;삼정1리 유적&#039;&#039;&#039;의 집자리는 3개의 군집을 이루며 남동쪽, 중앙, 북동쪽 사면부에 밀집 조성되었다. 집자리 간의 중복 양상은 빈번하게 확인된다. 형태에 따라 방형 31기, 장방형 4기이며, 9호는 길이 9.36m, 너비 5.24m로 가장 크다. 면적은 6.1~49㎡로, 중소형인 15~20㎡에 해당하는 집자리가 10기로 가장 많다. 내부 시설로는 [[기둥구멍|기둥 구멍]], [[화덕자리|화덕 자리]], [[벽도랑|벽 도랑(壁溝)]], [[저장구덩이|저장 구덩이]]가 확인된다. 기둥 구멍은 4·6·8·10주식(柱式)이 확인되었다. 기둥 구멍의 배치가 정형성 없거나 33호 같이 기둥 구멍이 없는 예도 있다. 화덕 자리는 48기에서 확인되며, 복수인 것이 11기이다. 대부분 원형 또는 타원형의 구덩식으로 한쪽 짧은 벽에 치우쳐 위치한다. 11·12호는 돌 두름식(圍石式)으로 집자리 중앙에 위치한다. 벽 도랑은 53기에서 ‘ㄱ’, ‘ㄷ’, ‘ㅁ’, ‘ㅡ’자 모양으로 다양하며, ‘ㄱ’, ‘ㄷ’자 모양이 다수이다. 28·59호는 내부에 도랑이 설치되어 공간을 분리한 것으로 판단된다. 벽 도랑에서 집자리 외부로 배수(排水)하는 기능을 한 외부 돌출구(外部突出溝)는 대부분 구덩식이지만, 3·10호는 석조식(石造式)으로 덮개돌이 남아 있다. 저장 구덩이는 주로 모서리에 설치되며, 원형 또는 타원형이며 길이 0.15~0.56m이다. 3호에서는 구덩이 내에서 [[그물추|그물추]]가 출토되었고, 35호에서는 소형 깬돌(割石) 편들이 채워져 있었다. 바닥은 대부분 맨땅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25호는 점토 다짐, 21호는 불다짐 처리하였다. 집자리의 폐기 양상은 자연적으로 폐기되거나, 화재로 폐기된 것이 비슷한 비율로 확인되며, 19·41호는 돌더미 폐기가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유물은 [[구멍무늬토기|구멍무늬 토기(孔列土器)]], [[골아가리토기|골아가리 토기(口脣刻目土器)]], [[겹아가리토기|겹아가리 토기]], [[짧은빗금무늬토기|짧은 빗금무늬 토기]], [[골아가리구멍무늬토기|골아가리 구멍무늬 토기(口脣刻目孔列文土器)]], [[겹아가리짧은빗금구멍무늬토기(二重口緣孔列短斜線孔列文土器)|겹아가리 짧은 빗금 구멍무늬 토기]], [[겹아가리짧은빗금구멍무늬토기(二重口緣孔列短斜線孔列文土器)|겹아가리 짧은 빗금 구멍무늬 토기]],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골아가리토기|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골아가리토기(二重口緣短斜線口脣刻目文土器)]], [[얕은바리모양토기|얕은 바리 토기(淺鉢形土器)]], [[항아리모양토기|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 [[굽다리토기|굽다리 토기(高杯形土器)]],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그물추, [[가락바퀴|가락바퀴]], [[버들잎모양돌살촉|버들잎 모양 돌살촉(柳葉式石鏃)]], [[슴베돌살촉|슴베 돌살촉(有莖式石鏃)]], [[마디자루간돌검|마디 자루 간 돌검(有節式磨製石劍)]], [[합인석부|조갯날 돌도끼(蛤刃石斧)]], [[돌대팻날|돌대팻날(扁平片刃石斧)]], [[반달돌칼|반달 돌칼]], [[갈판|갈판(碾石)]], [[갈돌|갈돌(碾石棒)]]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구덩이는 사면을 따라 3개의 군집을 보이며, 각 군집은 집자리군와 거리를 두며 대칭적으로 위치하여, 저장의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규모는 길이 1.17~5.2m, 너비 0.85~4.45m, 깊이 0.16~0.42m이며, 내부에서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와 각종 석기가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움무덤은 남서쪽 구릉 사면부에 위치하며, [[묘광|무덤 구덩이]]는 길이 1.85m, 너비 1.03m, 깊이 0.4m이다. 유물은 붉은 간 토기 2점과 가락바퀴 1점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039;&#039;&#039;삼정2리 유적&#039;&#039;&#039;의 집자리는 3개의 군집을 이루며 남동쪽, 중앙, 북서쪽 사면부에 조성되었다. 형태는 대부분 유실되어 알 수 없으며, 면적은 17~20㎡이다. 내부 시설로는 기둥 구멍, 화덕 자리, 벽 도랑, 저장 구덩이가 확인된다. 기둥 구멍은 바닥면에서 확인되나 정형성은 없다. 화덕 자리는 원형 또는 타원형의 구덩식으로 1·9호는 한쪽 짧은 벽, 8호는 중앙에 위치한다. 벽 도랑은 5호를 제외하고 모두 확인되며, ‘ㄱ’자, ‘ㄷ’자, ‘ㅁ’자 모양이다. 외부 돌출구는 6호에서 경사가 낮은 모서리 부분에 축조되었다. 2호에서는 공간 분할의 기능을 한 내부 도랑이 확인된다. 바닥은 맨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폐기는 자연적으로 폐기된 양상과 화재로 폐기된 양상이 비슷한 비율로 확인된다. 유물은 구멍무늬 토기, 골아가리 구멍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슴베 돌살촉, 마디 자루 간 돌검, [[돌도끼|돌도끼(石斧)]], [[돌끌|돌끌(石鑿)]], 갈판, [[갈돌|갈돌]]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유적의 연대는 집자리 평면 형태 및 구조, 내부 출토 유물을 통해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로 판단되며, 동해안에 조성된 대규모의 [[흔암리유형|흔암리 유형]] [[취락|취락]]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포항_삼정리_유적(삼정_1리_유적)_전경.jpg&lt;br /&gt;
File:포항_삼정리_유적(삼정_1리_유적)_출토_석기.jpg&lt;br /&gt;
File:포항_삼정리_유적(삼정_1리_유적)_출토_토기.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7). &amp;lt;i&amp;gt;포항 삼정1리 유적I·II&amp;lt;/i&amp;gt;.&lt;br /&gt;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7). &amp;lt;i&amp;gt;포항 삼정2리·석병리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1277585&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51&amp;diff=27142</id>
		<title>600-1351</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51&amp;diff=27142"/>
		<updated>2026-05-06T02:28: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삼성리 고인돌군[慶山 三省里支石墓群]}}&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삼성리 고인돌군&lt;br /&gt;
| 이칭별칭=경산 삼성리 고인돌군, 경산 삼성리 지석묘군&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삼성리 384-1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고인돌]], [[돌널무덤]], [[돌 깐 시설]], [[간 돌검]], [[붉은 간 토기]]&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김광명&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삼성리 384-1 일원에 위치한다. 대구-부산 간 고속 도로 건설 공사에 앞서 2003년 3개의 구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하였다. A·B구역에서 [[고인돌|고인돌]] 3기, C구역에서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4기, [[부석시설|돌 깐 시설(敷石施設)]] 2기와 [[삼국시대|삼국 시대]] 도로가 확인되었다.  유적은 서쪽으로 뻗은 산자락 말단부와 평지가 만나는 부분에 입지하며, 남쪽에 인접하여 삼성리 고인돌군Ⅰ·Ⅱ가 위치한다. 조사된 고인돌 2호는 삼성리 고인돌군Ⅲ의 2호이며, 3호는 삼성리 고인돌군Ⅲ의 3호에 해당한다.&lt;br /&gt;
&lt;br /&gt;
고인돌의 [[덮개돌|덮개돌(上石)]]은 모두 부정형이고, 3호는 길이 3.6m, 너비 2.4m, 높이 1.75m, 무게 23톤으로 가장 크다. 1호 덮개돌 하부에서는 평면 장방형인 돌깐 시설이 확인되었는데, 동-서 2.3m, 남-북 3.6m로 길이 0.3m의 깬돌을 2~3단 정도 쌓았다. 3호의 덮개돌 하부에서는 길이 0.4m의 자연석과 깬돌을 길이 2.8m, 너비 2.1m, 높이 0.4m로 쌓았다.&lt;br /&gt;
&lt;br /&gt;
돌널무덤은 판돌(板石)을 사용하여 만든 것과 깬돌을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구분된다. 3호는 깬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으며, 길이 1.92m, 너비 0.42m, 깊이 0.9m이다. 돌널무덤은 [[뚜껑돌|뚜껑돌(蓋石)]]로 덮여 있으며, 길이 0.6~0.8m의 판돌을 사용하였다. 무덤의 바닥에도 판돌을 사용하여 전면에 깔았다. 2호는 길이 0.64m, 너비 0.27m, 깊이 0.35m로 소형이며, 네 벽을 모두 두께 10㎝ 내외의 판돌을 세워서 만들었다. 바닥에는 판돌을 전면에 깔았다. 출토 유물은 [[간돌검|간 돌검(石劍)]] 편과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편 등이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유적은 덮개돌 하부에서 [[매장주체부|매장 주체부]]가 아닌 깐돌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고인돌은 영남 지역에서 다수 확인되며,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제의(祭儀)와 관련된 시설물로 판단된다.&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지표조사 || 1995년 12월 30일 ~ 1996년 2월 7일 || 경산 매장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 || 1997 ||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3년 3월 10일 ~ 2003년 10월 10일 || 경산 삼성리 유적 || 2005 || 영남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광명 , 서길한. (2009). 영남지역의 제단식지석묘 연구. &amp;lt;i&amp;gt;과기고고연구, 15&amp;lt;/i&amp;gt;, 5–29. https://www.riss.kr/link?id=A109971471&lt;br /&gt;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5). &amp;lt;i&amp;gt;경산 삼성리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0331797&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46&amp;diff=27141</id>
		<title>600-134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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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2:26: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삼락리 안자동 고인돌군[鎭安 三樂里顔子洞支石墓群]}}&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삼락리 안자동 고인돌군&lt;br /&gt;
| 이칭별칭=진안 삼락리 안자동 고인돌군, 진안 삼락리 안자동 지석묘군&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안천면 삼락리 610-1 일원&lt;br /&gt;
| 성격=고인돌&lt;br /&gt;
| 키워드=[[고인돌]], [[홈 자루 간 돌검]], [[삼각 오목 돌살촉]], [[붉은 간 토기]], [[민무늬 토기]]&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이종철&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안천면 삼락리 610-1 일원에 위치한다. 용담댐 수몰 지구 내 문화유적 발굴 조사의 일환으로 1996년에 1차, 1998년에 2차로 구분되어 국립전주박물관과 전북대학교박물관이 지점을 달리하여 연차적으로 실시하였다. 해발 772m의 지장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나온 능선의 최말단부로, 해발 340m의 야산을 등지고 있으며 앞 쪽으로는 안자천의 하상퇴적으로 이루어진 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다. 뒤쪽에 자리하는 야산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능선으로 남쪽 사면이 매우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고, 앞쪽으로 안자천이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의 입지를 이룬다. [[고인돌|고인돌]]은 [[매장주체부|매장 주체부(埋葬主體部)]]를 중심으로 방형의 묘역(墓域)을 이룬다.&lt;br /&gt;
&lt;br /&gt;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조사한 지점에서는 11기의 고인돌이 확인되었는데 독립적으로 조성된 단독 무덤(單獨墓)과 방형의 묘역부를 서로 연접하여 무덤을 조성한 연접 무덤(連接墓)으로 구분된다. 2기의 단독 무덤은 가장 높은 지점의 경사면에 축조되었는데, 전북대학교박물관의 조사 지점에서 확인된 2기가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조사한 단독 무덤과 함께 가장 높은 지점에서 열을 이루어, 동일선상에서 축조되어졌음을 보여주었다. 반면 연접 무덤은 그 아래 평탄면에 축조하였으며 한쪽 방향에서 연차적으로 조성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경계석(境界石)의 연접 방법에 있어서는 먼저 축조된 무덤의 한쪽 경계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묘역부를 형성하거나 먼저 축조된 무덤의 경계석에 독립된 묘역부를 연접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lt;br /&gt;
&lt;br /&gt;
단독 무덤과 연접 무덤의 선후관계는 토층에 의해 단독 무덤이 먼저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는데 인근 [[진안삼락리풍암고인돌군|삼락리 풍암 고인돌군]]에서도 연접 무덤이 단독 무덤을 파괴하고 축조되어 이를 뒷받침한다. 매장 주체부의 위치는 지하식에서 지상식(地上式)으로의 변화가 확인된다.&lt;br /&gt;
&lt;br /&gt;
유물은 방형의 묘역부를 갖춘 단독 무덤에서는 [[홈자루간돌검|홈 자루 간 돌검(二段柄式磨製石劍)]], [[삼각오목돌살촉|삼각 오목 돌살촉(三角灣入石鏃)]],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전북대학교 1호 고인돌에서 출토된 홈 자루 간 돌검은 검 몸(劍身)에 피 홈(血溝)이 없어 국립전주박물관 9호 출토 간 돌검과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삼각 오목 돌살촉이 공통적으로 출토되었다. 그러나 이들 단독 무덤 뿐만 아니라 연접된 고인돌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송국리문화|송국리 문화(松菊里文化)]] 요소가 확인되어, 송국리 문화 단계에 속할 것으로 판단된다. 고인돌군은 조사 이후 용담댐 건설로 수몰되었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600px&amp;gt;&lt;br /&gt;
File:진안_삼락리_안자동_고인돌군_유구_배치도.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1998년 || 진안 용담댐 수몰지구 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X-풍암 유적- || 2001 || 전북대학교박물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1996년 || 진안 용담댐 수몰지구 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Ⅲ-안자동 유적- || 2001 || 국립전주박불관&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국립전주박물관. (2001). &amp;lt;i&amp;gt;진안 용담댐 수몰지구 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Ⅲ-안자동 유적-&amp;lt;/i&amp;gt;.&lt;br /&gt;
* 전북대학교박물관. (2001). &amp;lt;i&amp;gt;진안 용담댐 수몰지구 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X-풍암 유적-&amp;lt;/i&amp;gt;.&lt;br /&gt;
* 전북대학교박물관. (2001). &amp;lt;i&amp;gt;진안 용담댐 수몰지구 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Ⅱ-안자동 유적-&amp;lt;/i&amp;gt;.&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41&amp;diff=27140</id>
		<title>600-1341</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41&amp;diff=27140"/>
		<updated>2026-05-06T02:25: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삼동 고인돌[義王 三洞支石墓]}}&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삼동 고인돌&lt;br /&gt;
| 이칭별칭=의왕 삼동 고인돌, 의왕 삼동 지석묘&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경기도 의왕시 삼동 416&lt;br /&gt;
| 성격=고인돌&lt;br /&gt;
| 키워드=[[고인돌]], [[채석흔적]], [[알 구멍]]&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우장문&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경기도 의왕시 삼동 416에 위치한다. 1987년 충북대학교박물관에서 발견하고 1988년 서울대학교에서 발굴하였다. 삼동 고인돌은 원래 3기가 있었는데 안양~부곡 간 도로 공사 과정에서 2기가 없어져 1기만 조사되었다. 발굴된 [[고인돌|고인돌]] 역시 원래의 위치가 부정확하다. 해발 47.37m의 약간 경사진 밭에 입지한다.&lt;br /&gt;
&lt;br /&gt;
고인돌은 [[개석식고인돌|덮개식(蓋石式)]]이며 덮개돌(上石)은 거정화강암으로 길이 2.2m, 너비 1.6m, 두께 0.6m이고 무게는 약 6톤 정도이다. 이 덮개돌의 윗면에는 [[채석흔적|채석 흔적(採石痕)]]으로 보이는 6~12㎝ 정도 크기의 구멍 9개가 한 줄로 나타나 있고, 지름 6㎝ 가량의 [[알구멍|알 구멍(性穴)]] 1개와 갈다가 만 알 구멍 1개가 확인되었다. 옆면에도 채석 흔적으로 보이는 8~12㎝ 정도 크기의 구멍 4개가 윗면과 같이 줄지어 있어 채석 방법을 알 수 있게 한다. 무덤방(墓室)은 길이 1.9m, 너비 1.5m, 깊이 0.17~0.2m이며, 바닥의 기울기는 북동에서 남서쪽으로 약 3° 정도 비스듬한데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무덤방의 크기로 볼 때, 바로 펴묻기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부장품은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lt;br /&gt;
&lt;br /&gt;
보고자는 삼동 고인돌의 축조 과정에 대해, 먼저 덮개돌의 운반과 관련하여 유적에서 남서쪽으로 1.8㎞ 떨어진 구봉산 기슭의 새골 지역을 채석장으로 판단하였다. 또 운반 및 복원과 관련하여 소요 인원을 추정하여 떼어내는데 4명, 운반 108명, 축조 96명 등 모두 208명이 참여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다음으로 고인돌의 축조는 움을 파서 구덩이를 만든 다음 바닥을 다져 죽은 사람을 바로 펴묻기로 묻고 고운 흙을 뿌렸던 것으로 보았다. 특히 무덤방에서 채취한 시료들의 P2O3 함량을 분석하여 머리 쪽 방향을 추정하고 산줄기의 흐름과 나란히 하였음을 밝혀냈다.&lt;br /&gt;
&lt;br /&gt;
삼동 고인돌은 남아있지 않지만, 우리나라 고인돌 조사에서 처음으로 토양 성분 검사를 실시하여 매장 풍습에 대해 구체적인 상황을 연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지표조사 || 1987년 || 판교~구리·신갈~반월 간 고속 도로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 1987 || 충북대학교박물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1987년 || 시흥 삼리 지석묘 발굴조사 보고 || 1988 || 충북대학교박물관&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경기도박물관. (2007). &amp;lt;i&amp;gt;경기도 고인돌&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0935926&lt;br /&gt;
* 충북대학교박물관. (1987). &amp;lt;i&amp;gt;판교구리·신갈반월 간 고속 도로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8031760&lt;br /&gt;
* 충북대학교박물관. (1988). &amp;lt;i&amp;gt;시흥 삼리 지석묘 발굴조사 보고&amp;lt;/i&amp;gt;.&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36&amp;diff=27139</id>
		<title>600-133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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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2:24: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삼길리 유적(任實 三吉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삼길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임실 삼길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신덕면 삼길리 424-3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구덩이]], [[돌널무덤]], [[고인돌]], [[송국리식 토기]], [[외반 구연 토기]], [[송국리식 집자리]], [[민무늬 토기]], [[바리 토기]], [[항아리 모양 토기]], [[붉은 간 토기]], [[간 돌살촉]], [[돌도끼]], [[돌칼]], [[숫돌]], [[가락바퀴]]&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천선행&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신덕면 삼길리 424-3 일원에 위치한다. 계곡~신덕 간 국지도 확·포장 공사에 앞서 2013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외량1 유적과 외량2 유적으로 구분되어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삼길리 유적은 외량2 유적에 해당한다. 외량1 유적은 해발 520m 내외의 능선에서 동쪽 방향으로 뻗어 내린 능선 말단부(해발 200m내외)에 위치한다. 외량2 유적은 북동쪽에 위치하는 하천 충적 대지와 해발 400m의 노적봉에서 서쪽으로 뻗은 구릉 말단부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는데, 남쪽으로는 섬진강의 지류천인 옥녀동천에 의해 형성된 곡간부 평야 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외량1 유적과 외량2 유적 간의 거리는 약 350m이고 사이에는 옥녀동천으로 합류하는 서이지천이 남북으로 흐르며, 각 유적이 다른 구릉에서 이어지는 양상이므로 별개 유적으로 판단된다. 외량2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집자리|집자리]], [[구덩이|구덩이]], [[도랑|도랑(溝)]],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고인돌|고인돌]], [[석렬유구|석렬(石列) 유구]], [[돌더미유구|돌더미(集石) 유구]]를 비롯하여 [[구석기시대|구석기 시대]]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외량1 유적은 2지점에서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구덩이 2기만 확인되었고, 내부에서 [[송국리식토기|송국리식 토기]]에 해당하는 [[외반구연토기|외반 구연 토기(外反口緣土器)]]가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삼길리 유적의 청동기 시대 유구는 해발 201~205m의 구릉 남사면에 밀집되어 분포한다. 유구의 성격에 따라 입지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집자리와 구덩이 등 생활 유구는 구릉 하단부에 위치하고 크게 동서 두 그룹으로 나뉘어 분포한다. 집자리 위로는 돌널무덤과 고인돌 등 무덤 유구가 분포하는 데, 무덤 유구와 생활 유구와의 사이에는 동서 방향의 석렬(石列)이 가로 놓여져 있다. 석렬은 현재 남아 있는 길이가 57.2m로 전체적으로 작은 깬돌(割石)을 깐 상태이다. 무덤 공간과 생활 공간을 분리한 양상은 [[송국리문화|송국리 문화]] 단계에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유사한 사례가 [[보령관창리유적|보령 관창리 유적]], [[진안모정리여의곡유적|진안 여의곡 유적]], [[고창삼인리유적|고창 삼인리 유적]], [[나주영천유적|나주 영천 유적]], [[장흥신풍리유적|장흥 신풍]]·갈두 유적, [[고창죽림리유적|고창 죽림리 유적]], [[고창부곡리유적|부곡리 유적]]에서 확인된다. 특히 장흥 갈두 유적은 도랑으로 구획한 점에서 삼길리 유적과 차이가 있지만, 고창 부곡리 유적에서는 고인돌과 [[송국리식무덤|송국리식 무덤]]을 감싼 형태로 확인되는 점이 유사하다.&lt;br /&gt;
&lt;br /&gt;
집자리는 20기 확인되었다. 구릉 서편에 집자리 12기(1~12호), 동편에 집자리 8기(13~20호)가 분포한다. 서편의 집자리는 중복없이 2~10m 간격으로 조성되는 반면, 동편은 13호와 14호를 제외하고 간격 1m 내외로 밀집하여 분포한다. 집자리가 중복된 16~18호를 제외하고 대부분 2~3기 집자리가 소군집을 이루는데, 반원형상으로 배치되고 중앙에 공터가 마련되어 있다. 유사한 양상은 전주 효자5 유적, 장흥 신풍·갈두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집자리 평면 형태는 말각 장방형 내지 방형계로 길이 2.22~4.59m이고, 면적은 4.75~16.25㎡로 송국리 문화 단계 집자리 면적상 소형군에 해당한다. 내부 구조가 확인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다만, 2·10·17호에서는 타원형 구덩이가 있지만, 중앙이 아니라 벽면에 치우쳐 있다. 따라서 전형적인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 집자리]]라고 할 수 없지만, 집자리 규모가 축소되는 경향, 출토 유물로 보아 송국리 문화 단계에 조성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lt;br /&gt;
&lt;br /&gt;
구덩이는 10기 확인되었다. 집자리 인근에 위치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서편 집자리의 아래쪽에 밀집되어 분포한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 장타원형, 원형, 타원형 등 다양하고 장축 길이 1.05~3.08m로 다양하다. 도랑은 2기 확인되었다. 모두 동서 방향으로 형성되어 자연 도랑으로 보기 어렵다. 길이 3.6m 내외이다.&lt;br /&gt;
&lt;br /&gt;
생활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편으로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편을 비롯하여 [[바리모양토기|바리 토기(鉢形土器)]], [[항아리모양토기|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 편 등이 대부분이고, 일부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작은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석기류로는 [[간돌살촉|간 돌살촉]], [[돌도끼|돌도끼(石斧)]], [[돌칼|돌칼(石刀)]], [[숫돌|숫돌(砥石)]], 석제 [[가락바퀴|가락바퀴]], 미완성 석기, 석재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미완성 석기와 석기 제작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또한 집자리 내에서 0.2~0.7m 내외의 구덩이가 확인되고, 주변에 석재 편 등이 다량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외량2 유적 집자리는 주거의 기능 외에도 석재를 일차적으로 가공하여 형태를 만드는 초기 공정이 이루어진 공방의 역할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고인돌은 유적에서 가장 높은 곳에 단독으로 위치한다. [[덮개돌|덮개돌(上石)]]은 본래 위치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고, 덮개돌 주변에서 [[받침돌|받침돌(支石)]]이 원형으로 돌아가는 돌 두름(圍石) 시설이 확인되어 돌두름식 고인돌로 판단된다. 유물은 주변에서 민무늬 토기 편이 소량 출토되었다. 돌널무덤은 고인돌의 아래쪽 집자리와의 사이에서 3기가 확인되었다. 돌널무덤은 바닥은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고, 여러 매의 판돌으로 긴 벽을 세우고 1매의 판돌으로 짧은 벽을 세워 무덤방을 마련하였으며, 위에 겹겹이 [[뚜껑돌|뚜껑돌(蓋石)]]을 올렸다. 무덤방과 무덤 구덩이 사이에는 흙과 석재를 혼용하여 뒷채움을 하였다. 무덤방의 규모는 길이 0.81~1.4m, 너비 0.24~0.42m, 깊이 0.27~0.4m로 소형이다. 완형으로 출토된 유물은 없고, 민무늬 토기 편이 소량 출토될 뿐이다. 고인돌과 돌널무덤 모두 송국리 문화 단계의 것으로 판단된다.&lt;br /&gt;
&lt;br /&gt;
집자리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는 2430±30~2550±30 BP이고, 돌널무덤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도 2390±30 BP~ 2470±30 BP로 거의 동시기에 축조되어 이용되었음이 분명하고, 중심 시기는 기원전 6세기 전후로 판단된다.&lt;br /&gt;
&lt;br /&gt;
삼길리 유적은 청동기 시대 생활 공간과 무덤 공간이 분리되어 분포하는 양상, 집자리의 구조와 형태,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 구성과 석기 제작 양상, 고인돌과 돌널무덤의 구조와 형태로 볼 때, 호남 지역 특히 섬진강 유역 청동기 시대 문화의 성격과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금강 유역 송국리 문화와 섬진강 유역 송국리 문화의 파급 과정을 엿볼 수 있어 청동기 시대 지역 관계를 검토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300px&amp;gt;&lt;br /&gt;
File:임실_삼길리_유적_2호_집자리.jpg&lt;br /&gt;
File:임실_삼길리_유적_전경.jpg&lt;br /&gt;
File:임실_삼길리_유적_집자리_전경.jpg&lt;br /&gt;
File:임실_삼길리_유적_출토_석기.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13년~2014년 || 임실 외량 유적 || 2015 || 전라문화유산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전라문화유산연구원. (2015). &amp;lt;i&amp;gt;임실 외량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4233373&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30&amp;diff=27138</id>
		<title>600-1330</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30&amp;diff=27138"/>
		<updated>2026-05-06T02:23: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삼거동 유적(光州 三巨洞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삼거동 유적&lt;br /&gt;
| 이칭별칭=광주 삼거동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광주광역시 광산구 삼거동 산51·산52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고인돌]], [[돌도끼]]&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신경숙, 김수민&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거동 산51·산52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완만하게 내려오는 구릉 사면부 및 말단부에 해당한다. 삼거동 고인돌군과 삼거동 유적으로 구분되는데, 삼거동 고인돌군에는 [[고인돌|고인돌]]이 49기가 분포하고 삼거동 유적에서는 고인돌 4기와 부석 유구 2기가 조사되었다.&lt;br /&gt;
&lt;br /&gt;
&#039;&#039;&#039;삼거동 고인돌군&#039;&#039;&#039;(산51 일원)은 구릉 상에 2개 군으로 반경 200m 이내에 49기가 분포한다. [[받침돌|받침돌(支石)]]이 없는 고인돌은 20여 기이며 10여 기는 [[무덤방|무덤방(墓室)]]이 노출되어 있다. [[덮개돌|덮개돌(上石)]]의 형태는 장방형이 일부 있으나 대부분 원형이나 타원형이다. 가군은 23기로 군집 형태는 동서 2열이며 받침돌은 판돌(板石)이나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덮개돌의 장축은 모두 군집 방향과 같은 방향이다. 덮개돌 2기는 길이 1~1.3m로 비교적 두꺼운 편이나 나머지는 얇고 밑 부분이 땅에 밀착되어있다. 나군은 북두칠성 모양으로 위치하며 크기는 모두 작은 편이다. 이 곳에서는 돌을 구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 외부에서 운반하여 고인돌을 만든 것으로 보이고, 칠성마을이라는 이름은 고인돌이 놓인 형태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039;&#039;&#039;삼거동 유적&#039;&#039;&#039;(산52 일원)은 빛그린 산업 단지 진입 도로 확장 공사 구간에 포함되어 2016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1구역에서 고인돌 4기와 [[부석유구|부석 유구(敷石遺構)]] 2기가 조사되었는데, 삼거동 고인돌군의 북동쪽에 해당한다. 고인돌 4기 가운데 2호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후대 경작이나 무덤 조성으로 인해 이동되었거나 파괴되었다. 3호와 4호 고인돌 사이에는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덮개돌|덮개돌(上石)]]이 4~5개 있다.&lt;br /&gt;
&lt;br /&gt;
1호 고인돌의 덮개돌은 약간 이동된 상태로 확인되었다. 평면 형태는 부정형이고 크기는 길이 1.3m, 너비 0.9m, 높이 0.5m이다. 2호 고인돌은 [[매장주체부|매장 주체부]]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작은 깬돌들이 일정한 형태로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묘역(墓域)으로 추정된다. 3호 고인돌은 덮개돌이 유실된 상태이며 바닥에서 깬돌 6매와 [[구덩이|구덩이]]가 확인되었지만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4호 고인돌은 덮개돌과 [[받침돌|받침돌(支石)]]이 일부 확인되었지만 정확한 형태는 파악하기 어렵다.&lt;br /&gt;
&lt;br /&gt;
부석 유구는 3호 고인돌의 북쪽에 있으며 1호와 2호는 연접해있다. 1호는 평면 원형이며 크기는 길이 6.5m, 너비 4.8m이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2호는 평면 방형이며 크기는 길이 7.6m, 너비 6.5m이다. [[돌도끼|돌도끼(石斧)]]로 추정되는 미완성 석기 1점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삼거동 유적은 지형과 고인돌의 분포 상태로 보아 삼거동 고인돌군과 같은 군집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16년 4월 4일~2016년 8월 19일 || 광주 삼거동유적 || 2018 || 경남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경남문화재연구원. (2018). &amp;lt;i&amp;gt;광주 삼거동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6718503&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34&amp;diff=27137</id>
		<title>600-133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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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2:22: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삼계동 유적(金海 三溪洞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삼계동 유적&lt;br /&gt;
| 이칭별칭=김해 삼계동 유적, 김해 구산동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경상남도 김해시 삼계동 1505-2~4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송국리식 집자리]], [[구덩이]], [[돌널무덤]], [[민무늬 토기]], [[둥근 덧띠 토기]], [[굽다리 토기]], [[독 모양 토기]], [[바리 토기]], [[간 돌검]], [[간 돌살촉]], [[돌도끼]], [[돌칼]], [[돌창]], [[돌끌]], [[숫돌]], [[삼각 돌칼]]&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배진성&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경상남도 김해시 삼계동 1505-2~4 일원에 위치한다. 김해 북부 지구 택지 개발 조성 사업에 앞서 1998년 조사하여, [[집자리|집자리]] 18기, [[구덩이|구덩이]] 3기,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1기가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집자리는 원형, 타원형, 장방형, 말각 방형, 말각 장방형으로 구분되며 내부 시설의 특징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된다. 원형 구덩이만 있는 것(Ⅰ류), 타원형 구덩이와 그 내부의 양쪽 가장자리에 [[기둥구멍|기둥 구멍]]이 있는 것(Ⅱ류), 타원형 구덩이와 그 외부의 양쪽 가장자리에 기둥 구멍이 있는 것(Ⅲ류), 타원형 구덩이의 내부 양 쪽과 집자리 내부의 네 모서리에 각각 기둥 구멍이 있는 것(Ⅳ류)이다. Ⅰ류는 모두 말각 방형이며(1·2·10호) 길이 4.4~5.1m이다. Ⅱ류는 원형(5호), 타원형(4호), 말각 방형(8호)이 있으며, 원형과 타원형은 길이 5m 이상의 중형급 집자리다. Ⅲ류는 말각 방형(13호)이며 길이 4.4m로 소형급이다. Ⅳ류는 타원형(18호)과 말각 방형(11호)이며 길이 6m 이상으로 다른 집자리에 비해 규모가 크다.&lt;br /&gt;
&lt;br /&gt;
출토 유물로는 [[송국리단계|송국리 단계]]의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와 각종 석기류 및 이후 시기의 [[둥근덧띠토기|둥근 덧띠 토기(圓形粘土帶土器)]], [[굽다리토기|굽다리 토기(豆形土器)]], [[조합식손잡이|조합식 손잡이(組合式把手)]], 뚜껑(蓋)등이 출토되었다. 민무늬 토기는 [[옹형토기|독 모양 토기(甕形土器)]], [[바리모양토기|바리 토기(鉢形土器)]]가 있으며, 손잡이가 부착된 것도 있다. 아가리 편 가운데 기형을 알 수 있는 것은 [[직립구연|직립 구연(直立口緣)]] 39점, [[외반구연|외반 구연(外反口緣)]] 19점이다. 18점의 둥근 덧띠 토기 편은 바리 모양과 독 모양으로 추정되며 덧띠의 단면 형태는 원형과 타원형이 모두 확인된다. 손잡이 편은 조합식쇠뿔 모양과 꼭지형이다. 석기의 종류로는 [[간돌검|간 돌검]], [[간돌살촉|간 돌살촉]], [[돌도끼|돌도끼(石斧)]], [[돌칼|돌칼(石刀)]], [[돌창|돌창(石槍)]], [[돌끌|돌끌(石鑿)]], [[숫돌|숫돌(砥石)]], 대석(臺石), 석재(石材) 편, 미완성 석기 등이 있다. 간 돌살촉은 8점 가운데 1점만 슴베 없는 것(無莖式)이며 나머지는 슴베식(有莖式)이다. 돌칼은 미완성품을 비롯하여 반달 모양과 삼각형이 있으며, [[삼각형돌칼|삼각 돌칼]]은 교차된 날(交刃)이다. 그리고 석재 편은 출토 석기 가운데 가장 양이 많아 활발한 석기 제작 활동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구덩이는 원형에 지름 1.2~1.4m로 작다. 1호는 바닥에 깬돌(割石)을 한 벌 깔았으며, 2호는 깬돌이 덮여 있었다. 내부에서는 다량의 민무늬 토기 편과 둥근 덧띠 토기 편이 출토되었으며, 집 밖에 있던 저장 시설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돌널무덤은 3·5호 집자리 사이에 위치하며, 돌널은 길이 1.4m이다. 양쪽 긴 벽은 각 4~5매씩, 양쪽 짧은 벽은 각 1매의 편평한 깬돌(割石)을 세워서 축조하였다.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정확한 판단은 어렵지만,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 집자리]]인 4·5호와 설치면이 동일하여 청동기 시대의 돌널무덤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유적은 집자리 내부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를 갖춘 송국리식 집자리 6기가 확인된 점에서 송국리 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둥근 덧띠 토기가 출토된 집자리도 8기가 있다. 둥근 덧띠 토기가 출토된 장방형 집자리(12호)는 송국리식 집자리(18호)를 파괴하고 설치되어, 둥근 덧띠 토기 출토 집자리는 송국리 단계에서도 늦은 시기이거나 그 이후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즉, 유적의 시기는 송국리 단계 및 그 이후인 둥근 덧띠 토기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단계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송국리식 집자리에서 둥근 덧띠 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은 대부분 호서~호남 지역으로, 삼계동 유적은 영남 지역에서 출토된 매우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700px&amp;gt;&lt;br /&gt;
File:김해_삼계동_유적_11호_집자리.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시굴조사 || 1997년 3월~1997년7월 || 김해 구산동 유적 || 2013 || 동의대학교박물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10년~2012년 || 김해 구산동 유적 || 2013 || 동의대학교박물관&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동의대학교박물관. (2013). &amp;lt;i&amp;gt;김해 구산동 유적&amp;lt;/i&amp;gt;.&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33&amp;diff=27136</id>
		<title>600-133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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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2:21: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삼거리 유적(漣川 三巨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삼거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연천 삼거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삼거리 722-2전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구덩식 화덕 자리]], [[기둥 구멍]], [[팽이 토기]], [[깊은 바리 토기]], [[간 돌검]], [[돌돈]], [[숫돌]], [[팽이 토기 문화]]&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송만영&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삼거리 722-2전 일원에 위치한다. 강변에 입지해 있어 집중 호우 때마다 홍수 피해를 입는 지역으로 1999년에 긴급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신석기시대|신석기 시대]] [[집자리|집자리]] 5기와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집자리 4기, 소형 유구 3기, 그 밖에 [[조선시대|조선 시대]]의 [[돌무지유구|돌무지 유구(積石遺構)]] 1기를 확인하였다. 유적 내에는 본래 고인돌이 있었지만, 덮개돌(上石)이 인근 중학교 교정으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유적은 임진강 변 해발 36m의 모래 언덕 위에 입지하며 삼거리 주위로 임진강이 곡류하면서 큰 충적 대지를 형성하고 있다. 주변에는 [[연천전곡리유적|전곡리]]를 비롯한 구석기 유적과 여러 차례의 지표 조사를 통해 신석기 및 청동기, 원삼국 시대에 이르는 유적이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집자리는 대체로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며 유구의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전체 규모를 알 수 있는 것은 8호뿐으로 길이 10.68m, 너비 3.6m, 깊이 0.6~0.42m이다. 바닥의 장축 중앙을 따라 화덕 자리가 8호는 2기, 9호는 3기가 설치되어 있는데, 모두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이며 깊이는 6~7㎝정도로 얕다. [[기둥구멍|기둥 구멍]]은 긴 벽 아래에서만 일부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유물은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토기|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 [[겹아가리짧은빗금구멍무늬토기|겹아가리 짧은 빗금 구멍무늬 토기(二重口緣短斜線孔列土器)]], [[구멍무늬토기|구멍무늬 토기(孔列土器)]]가 출토되었는데, 특히 [[깊은바리모양토기|깊은 바리 토기(深鉢形土器)]]의 기형은 몸통에 비해 저부가 매우 좁은 형태로 [[팽이토기|팽이 토기(角形土器)]]와의 관련성이 주목된다. 석기류는 [[유단식간돌검|유단식 간 돌검(有段式磨製石劍)]], [[턱슴베간돌살촉|턱 슴베 간 돌살촉(二段莖式磨製石鏃)]], [[슴베없는간돌살촉|슴베 없는 간 돌살촉(無莖式磨製石鏃)]], [[돌끌|돌끌(石鑿)]], [[긴배모양반달톨칼|긴 배 모양(長舟形) 반달 돌칼]], [[갈판|갈판(碾石)]], [[갈돌|갈돌(碾石棒)]], [[숫돌|숫돌(砥石)]]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간돌검|간 돌검]]은 검 몸에 피 홈(血溝)이 있고, 자루의 양 측면만이 결입된 형태로 [[봉산어수구돌널무덤|봉산 어수구 돌널무덤(石棺墓)]]에서 출토된 간 돌검과 유사하다. 한편 7호 집자리에서는 [[돌돈|돌돈(石貨)]], 숫돌, 미완성 석기 등 석기 제작 공정을 보여주는 석기류들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삼거리 유적은 경기 북부 지역에서 가장 북단에서 조사된 선사 시대 마을 유적으로 주로 황해도 지역의 [[팽이토기문화|팽이 토기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9호 집자리가 2930±50 BP(보정 연대 기원전 1130년) 값이 나왔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400px&amp;gt;&lt;br /&gt;
File:연천_삼거리_유적_9호_집자리_출토_토기1.jpg&lt;br /&gt;
File:연천_삼거리_유적_9호_집자리_출토_토기2.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1999년 09월 27일~1999년 12월 03일 || 연천 삼거리 유적 || 2002 || 경기도박물관&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경기도박물관. (2002). &amp;lt;i&amp;gt;연천 삼거리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8198032&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17&amp;diff=27135</id>
		<title>600-131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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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2:19: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산하동 유적(蔚山 山下洞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산하동 유적&lt;br /&gt;
| 이칭별칭=울산 산하동 유적, 울산 산하동 37 유적, 울산 산하동 산음 유적, 울산 산하동 화암 유적, 울산 산하동 화암 고분군&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울산광역시 북구 산하동 산116, 1002, 1051, 1102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검단리식 집자리]], [[구덩이]], [[돌널무덤]], [[검단리 유형]], [[연암동식 둘레 도랑]], [[조갯날 돌도끼]], [[돌대팻날]], [[돌끌]], [[돌도끼]], [[가락바퀴]], [[배 모양 석기]], [[바리 토기]], [[독 모양 토기]]&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황창한&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울산광역시 북구 산하동 산116, 1002, 1051, 1102 일원에 위치한다. 울산-강동 간 도로 확·포장 공사로 울산문화재연구원(산하동 산음 유적)이 2003년 조사하여 [[집자리|집자리]] 16기, [[구덩이|구덩이]] 1기를 확인하였다. 이후 강동 지구 택지 개발 사업으로 2007~2012년 4개 기관이 구역을 나누어 조사하였다. Ⅰ구역은 4개 지구로 세분하였으며, Ⅰ(산하동 유적)·Ⅱ지구(산하동 화암 유적, 화암 고분군)는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 Ⅲ지구는 우리문화재연구원(산하동 37 유적), Ⅳ지구는 동서문물연구원(산화동 화암 유적)이 조사하였다. Ⅱ구역은 A~G지구로 세분하여 울산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하였다(산하동 유적Ⅰ~Ⅴ). 유적은 반경 850m 거리에 분포한다.&lt;br /&gt;
&lt;br /&gt;
&#039;&#039;&#039;산하동 산음 유적&#039;&#039;&#039;(울산문화재연구원)의 집자리는 구릉의 남사면에 축조되었다. 집자리는 남아 있는 상태가 좋지 않다. [[기둥구멍|기둥 구멍]]의 배치가 4주식인 방형 집자리와 6주식인 장방형 집자리가 5기씩 확인되었다. 6기는 기둥 구멍이 없는 방형으로 추정된다. 내부 시설로는 [[화덕자리|화덕 자리]], [[벽도랑|벽 도랑(壁溝)]] 등이 확인되는 [[검단리식집자리|검단리식 집자리]]다. 12·14호에서는 내부에 [[돌무지|돌무지(積石)]]가 확인되었다. 12호에서 확인된 석기에서 미완성품을 가공하여 석기를 제작한 흔적이 확인되며, 특히 14호 돌무지 내부에는 [[갈돌|갈돌(碾石棒)]]을 4조각으로 파괴하여 뿌린 현상이 확인된다. 집자리 내부에서 확인되는 돌무지에 대해 가옥 무덤 또는 주거 폐기 의례라는 견해가 있다. 유물은 석기 중에서 [[숫돌|숫돌(砥石)]]과 갈돌류의 비중이 높은 반면, 수렵구인 [[돌살촉|돌살촉]] 및 [[돌창|돌창(石槍)]]류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은 점이 이례적이다. 토기의 문양은 [[구멍무늬|구멍무늬(孔列文)]]로, 취락의 중심 연대는 [[검단리유형|검단리 유형]] 단계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Ⅰ구역 Ⅰ지구 &#039;&#039;&#039;산하동 유적&#039;&#039;&#039;&#039;(울산발전연구원)에서는 집자리 19기,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4기, [[구|도랑(溝)]] 7기, [[주구|둘레 도랑(周溝)]] 10기, 석렬(石列) 6기, [[기둥건물터|기둥 건물터(高床式建物址)]] 6기가 조사되었다. 집자리의 배치는 2~3기가 군집을 이루는 것과, 개별로 배치된 것으로 구분된다. 군집을 이루는 2~4호 집자리는 장방형 1기와 방형 2기로 구성되며, 3호는 일반 주거용과는 구조적 차이가 있다. 9·10호, 17·19호는 장방형 1기와 방형 1기로 구성되며 19호는 벽면 아래를 깬돌(割石)을 이용하여 높이 0.2m로 축조하였다. 내부 시설은 화덕 자리, 벽 도랑, 배수구(排水溝) 등이다. 집자리의 면적이 30㎡를 전후한 16·17호는 내부에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 화덕 자리]] 2개가 등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유물은 토기류 62점, 석기류 12점, [[그물추|그물추]] 4점 등이다. 토기는 구멍무늬, [[단사선문|짧은 빗금무늬(短斜線文)]], 민무늬 등 단순문양의 비중이 높다. 석기는 돌살촉, [[돌도끼|돌도끼(石斧)]], [[가락바퀴|가락바퀴]], [[배모양석기|배 모양 석기(船形石器)]] 등 미완성품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을 통해 검단리 유형 단계의 취락으로 판단된다. 돌널무덤 1호는 길이 1.59m, 너비 0.74m, 깊이 0.56m로 가장 크고 나머지는 길이 0.92m 이하의 소형이다. 내부에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주변 취락으로 볼 때 검단리 유형 단계로 추정된다. 이외에 원형으로 설치된 둘레 도랑 내부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는 [[연암동식둘레도랑|연암동식 둘레 도랑]]으로, 의례 시설 또는 매장 시설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Ⅰ구역 Ⅱ지구 &#039;&#039;&#039;산하동 화암 유적&#039;&#039;&#039;(울산발전연구원)에서는 집자리 15기, 도랑 3기, 연암동식 둘레 도랑 4기가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방형, 장방형으로 구분된다. 내부 구조는 화덕 자리, 기둥 구멍, 벽 도랑, 배수구가 확인된다. 기둥 구멍은 대부분 정연하게 확인되는 경우가 드물고 기둥 구멍이 없는 것도 많아 바닥에 바로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자리가 폐기되는 시점에 형성된 돌무지 현상도 확인된다. 출토 유물 중 토기류는 구멍무늬와 짧은 빗금무늬가 결합된 것(2호)을 제외하면 대부분 구멍무늬 또는 [[낟알무늬|낟알무늬]]가 단독으로 시문되거나 민무늬가 대부분이다. 석기류는 [[합인석부|조갯날 돌도끼(蛤刃石斧)]], [[돌대팻날|돌대팻날(扁平片刃石斧)]], [[돌끌|돌끌(石鑿)]], 화살촉, 미완성 석기 등이며, 반달 돌칼이 확인되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 이외에 용도를 알 수 없는 타원형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연암동식 둘레 도랑은 한 쪽이 트여져 있으며 내부에서 특별한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대부분 입지가 좋은 취락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너비가 약 12m이다. 일부 도랑 내부에서 토기 편 및 그물추가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039;&#039;&#039;산하동 화암 고분군&#039;&#039;&#039;(울산발전연구원)에서는 집자리 3기, 구덩이 2기, 도랑 4기가 확인되었다. 2호 구덩이는 형태가 장방형이며, 길이 4.6m, 너비 1.75m, 깊이 0.2m이며, 내부에서 재가공 또는 제작 과정 중인 간 돌검 편이 확인되었다. 형태로 볼 때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의례와 관련된 유구일 가능성도 있다. 주변에서 확인된 부정형의 도랑도 이와 관련된 의례 시설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Ⅰ구역 Ⅲ지구 &#039;&#039;&#039;산하동 37 유적&#039;&#039;&#039;(우리문화재연구원)에서는 집자리 12기, 기둥 건물터(堀立柱建物) 24기, 연암동식 둘레 도랑 21기, 구덩이 6기, 도랑 12기가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유적의 남동쪽과 서쪽에 분포하며, 중심부에 위치하는 기둥 건물터와 연암동식 둘레 도랑이 분포하는 범위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입지적 특징을 보인다. 또한 집자리는 장축 방향이 남북으로 구릉 사면의 등고선과 나란하게 배치되어 있고, 외부로 연결되는 배수구는 주로 경사가 낮은 북서쪽을 향하는데, 이는 지형 변화에 따라 가장 효율적 배치의 방식을 취한 것으로 판단된다. 내부 시설은 기둥 구멍, 화덕 자리, 벽 도랑, 배수구를 갖춘 전형적인 검단리식 집자리다. 고상식 건물은 청동기 시대로 파악하였으나 내부토 외에는 근거가 부족해 주변의 삼국 시대 유적과 동 시기의 유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연암동식 둘레 도랑은 전체적인 배치가 집자리와는 분리된 공간에 형성되어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면서 배치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내부에서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유적의 출토 유물 중 토기류는 [[골아가리|골아가리(口脣刻目)]], 골아가리+반관통 구멍무늬+짧은 빗금무늬, 구멍무늬, 낟알무늬 등이 시문되어 검단리 유형 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석기는 조갯날 돌도끼, [[달도끼|달도끼(環狀石斧)]], 반달 돌칼, [[슴베돌살촉|슴베 돌살촉(有莖式石鏃)]], 토제·석제 가락바퀴, 숫돌 등이 출토되었다. 집자리에서 미완성 석기가 출토되어 가구 단위로 석기를 제작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Ⅰ구역 Ⅳ지구 울산 산하동 화암 유적(동서문물연구원)은 산하동 37유적에서 고지대로 연접된 구간이다. 집자리 2기, 도랑 20기, 구덩이 2기가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검단리식 집자리에 해당한다. 도랑은 부정형으로 토기 편과 토제 그물추가 다수 확인되어 의례와 관련된 시설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구덩이 1·2·4호는 타원형으로, 1호는 길이 1.72m, 너비 0.92m, 깊이 0.55m이다. 이러한 형태는 울산지역 청동기 시대의 유적에서 확인되는 [[함정유구|함정 유구]]와 유사하지만, 바닥에 나무 창(木槍)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 불분명하다. 3호는 지름 0.36m, 깊이 0.36m로 구덩이를 파고 내부에 [[바리모양민무늬토기|바리 모양 민무늬 토기]]를 넣었다. [[독무덤|독무덤(甕棺墓)]] 또는 매납 유구로 추정된다. 출토된 토기류는 단독 무늬 또는 민무늬로 검단리 유형 단계로 인접한 다른 유적과 같다.&lt;br /&gt;
&lt;br /&gt;
Ⅱ구역 울산 산하동 유적(울산문화재연구원)에서 집자리는 A지구 13기, B지구 2기, C지구 27기, D지구 41기, F지구 46기로 총 129기이다. 이외에 도랑 22기, 구덩이 1기가 확인되었다. 취락의 배치 양상은 A·B지구는 구릉 능선의 집자리 밀집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며 구릉의 사면에 2~4기가 군집하여 조영되었다. C지구는 정상부가 조사되지 않아 정확한 취락 구조를 알 수 없지만, 구릉 사면에 집자리와 연암동식 둘레 도랑이 집중되어 있다. 집자리와 연암동식 둘레 도랑은 서로 중복되지 않았다. D·F지구도 구릉 사면에 집자리가 소규모로 군집을 이루며 능선을 둘러싸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집자리는 세장방형 집자리가 소멸하고 장방형의 검단리식 집자리가 일반화되는 단계로, 구릉의 능선부를 비워두고 사면에 열상 또는 소규모로 군집하여 배치되는 것이 특징이다. 집자리의 내부 시설은 화덕 자리, 벽 도랑, 기둥 구멍 등이 있고, 외부 한쪽 모서리에 배수구가 설치되었다. 벽 도랑은 전체 집자리 중에서 약 90% 이상에서 확인된다. 특히 A·B지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구릉의 경사도가 가파른 D·F지구는 모든 집자리에서 확인된다. 또한 배수구가 확인된 집자리는 18기지만, 대부분 삭평으로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화덕 자리는 방형, 장방형 집자리에는 1개, 세장방형 집자리에서는 2개 이상이 설치되었다. 화덕 자리는 70% 이상이 구덩식이고 나머지는 평지식이다.&lt;br /&gt;
&lt;br /&gt;
토기는 전반적으로 완형이 드물지만 기형으로 볼 때 [[바리모양토기|바리 토기(鉢形土器)]]와 [[옹형토기|독 모양 토기(甕形土器)]]가 주를 이룬다. 토기의 문양은 크게 복합무늬(14%, 단독문(86%)로 구분된다. 복합무늬는 모두 구멍무늬에 골아가리, X자문, 짧은 빗금무늬 등이 추가된 형태로 A~D지구에서만 확인된다. 단독문은 구멍무늬(63%)가 가장 많고, 짧은 빗금 무늬(30%), 낟알무늬(5%), X자 무늬(2%) 등이다. 이중 C지구 6호 집자리의 골아가리 [[구멍무늬토기|구멍무늬 토기]]는 [[역삼동식토기|역삼동식 토기]]로 알려져 있는데 다소 늦은 검단리식 집자리에서 출토되어, 역삼동식 토기의 하한이 검단리 유형 단계 전반까지 지속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9점의 복합무늬 토기는 집자리의 형태나 공반 유물을 통해 일반적으로 복합무늬가 이르다는 시간성과는 무관하게 구멍무늬를 기본으로 토기에 단순히 X자 무늬나 짧은 빗금무늬가 추가된 형태로 복합무늬가 소멸하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파악된다. 한편 F지구 22호 집자리에서 출토된 깊은 바리 토기는 검단리 유형 단계로 편년되는 검단리식 토기로 손잡이에 낟알무늬가 시문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석기는 [[간돌살촉|간 돌살촉]], 반달 돌칼, [[ㄱ자돌칼|‘ㄱ’자 돌칼(東北型石刀)]], 돌도끼, [[찰절석기|찰절석기(擦切石器)]], [[돌낫|돌낫]], 간 돌검 등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석기는 대동소이하지만 간 돌검 중에서 손잡이에 소혈이 장식된 장식 간 돌검은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유물이다. 또한 F지구 27호 집자리에서 출토된 편마암제 조갯날 돌도끼는 원거리에서 확인되는 석재로서 교류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이다.&lt;br /&gt;
&lt;br /&gt;
유적을 통해 해안가에 인접한 검단리 유형 단계의 대규모 취락이 확인되었다. 또한, 집자리 뿐만 아니라 연암동식 둘레 도랑, 돌널무덤, 구덩이 등 취락을 구성하는 다양한 생활 유구가 확인되어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확보되었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울산_산하동_유적(산하동_37_유적)_8호_집자리_및_16호_둘레_도랑.jpg&lt;br /&gt;
File:울산_산하동_유적(산하동_화암_유적)_2호_집자리.jpg&lt;br /&gt;
File:울산_산하동_유적_II구역_A지구_10_11호_집자리_출토_유물.jpg&lt;br /&gt;
File:울산_산하동_유적_II구역_A지구_10호_집자리.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3년 3월 14일~2003년 7월 24일 || 울산 산하동 산음 유적 || 2005 || 울산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7년 11월 26일~2009년 4월 30일 || 울산 산하동 37번지 유적 || 2011 || 우리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시굴조사 || 2006년 3월~2006년 6월 || 울산 산하동 화암 유적 || 2011 || 울산발전연구원문화재센터&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7년 12월 4일~2010년 1월 29일 || 울산 산하동 화암 유적 || 2011 || 울산발전연구원문화재센터&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8년 7월 7일~2010년 7월 8일 || 울산 산하동 화암 유적 || 2012 || 동서문물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8년 1월 14일~2012년 6월 20일 || 울산 산하동 유적 II || 2014 || 울산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8년 1월 14일~2012년 6월 20일 || 울산 산하동 유적 III || 2014 || 울산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8년 1월 14일~2012년 6월 20일 || 울산 산하동 유적 IV || 2014 || 울산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8년 1월 14일~2012년 6월 20일 || 울산 산하동 유적 V || 2014 || 울산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8년 1월 14일~2012년 6월 20일 || 울산 산하동 유적 Ⅰ || 2014 || 울산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동서문물연구원. (2012). &amp;lt;i&amp;gt;울산 산하동 화암 유적&amp;lt;/i&amp;gt;.&lt;br /&gt;
* 우리문화재연구원. (2011). &amp;lt;i&amp;gt;울산 산하동 37번지 유적&amp;lt;/i&amp;gt;.&lt;br /&gt;
* 울산문화재연구원. (2005). &amp;lt;i&amp;gt;울산 산하동 산음 유적&amp;lt;/i&amp;gt;.&lt;br /&gt;
* 울산문화재연구원. (2014). &amp;lt;i&amp;gt;울산 산하동 유적 II&amp;lt;/i&amp;gt;.&lt;br /&gt;
* 울산문화재연구원. (2014). &amp;lt;i&amp;gt;울산 산하동 유적 III&amp;lt;/i&amp;gt;.&lt;br /&gt;
* 울산문화재연구원. (2014). &amp;lt;i&amp;gt;울산 산하동 유적 IV&amp;lt;/i&amp;gt;.&lt;br /&gt;
* 울산문화재연구원. (2014). &amp;lt;i&amp;gt;울산 산하동 유적 Ⅰ~Ⅴ&amp;lt;/i&amp;gt;.&lt;br /&gt;
* 울산문화재연구원. (2014). &amp;lt;i&amp;gt;울산 산하동 유적 Ⅴ&amp;lt;/i&amp;gt;.&lt;br /&gt;
*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 (2010). &amp;lt;i&amp;gt;울산 산하동 유적&amp;lt;/i&amp;gt;.&lt;br /&gt;
*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 (2011). &amp;lt;i&amp;gt;울산 산하동 화암 고분군&amp;lt;/i&amp;gt;.&lt;br /&gt;
*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 (2011). &amp;lt;i&amp;gt;울산 산하동 화암 유적&amp;lt;/i&amp;gt;.&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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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309&amp;diff=27134</id>
		<title>600-1309</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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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2:16: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산정동 유적(光州 山亭洞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산정동 유적&lt;br /&gt;
| 이칭별칭=광주 산정동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정동 1125&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화덕 자리]], [[겹아가리 토기]], [[민무늬 토기]]&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김수민&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정동 1125에 위치한다. 유적은 광주 하남 2지구 택지 개발 사업 지역에 포함되어 2005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유적 일대는 계단식 [[논|논]]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3구역에서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집자리 1기가 조사되었다.&lt;br /&gt;
&lt;br /&gt;
[[집자리|집자리]]는 구릉의 북동쪽 사면 끝자락에 자리한다. 50호 도랑이 만들어지면서 집자리의 동쪽 부분을 파괴하였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으로 추정되며, 길이 8.4m, 남은 너비 3.4m, 깊이 0.26m이다. 바닥 중앙에 [[화덕자리|화덕 자리]]2기가 설치되어 있다. 크기는 각각 지름 0.4m와 0.5m이다. 서벽과 남벽에서 숯이 다량으로 확인되어서 집자리는 화재로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겹아가리토기|겹아가리 토기(二重口緣土器)]],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토기|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바닥 편 등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산정동 유적의 집자리는 평면 형태와 내부에 설치된 화덕, 그리고 출토 유물로 보아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로 판단된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500px&amp;gt;&lt;br /&gt;
File:광주_산정동_유적_18호_집자리.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5년 3월 28일~2006년 7월 20일 || 광주 산정동 유적 || 2008 || 호남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호남문화재연구원. (2008). &amp;lt;i&amp;gt;광주 산정동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3302288&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95&amp;diff=27133</id>
		<title>600-129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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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2:15: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산남동 유적(淸州 山南洞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산남동 유적&lt;br /&gt;
| 이칭별칭=청주 산남동 유적, 청주 분평동Ⅱ 유적, 청주 원흥리Ⅱ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산남동 1109(분평동Ⅱ)·366(원흥리Ⅱ)·51-9(산남동 산31-3) 일원&lt;br /&gt;
| 성격=집자리&lt;br /&gt;
| 키워드=[[가락동 유형]], [[집자리]], [[돌살촉]], [[‘ㄱ’자 돌칼]], [[돌 두름식 화덕 자리]]&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이소영&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산남동 1109(분평동Ⅱ)·366(원흥리Ⅱ)·51-9(산남동 산31-3) 일원에 위치한다. 산남 택지 개발 지구에 포함된 곳으로 이후 주변 지역도 개발로 인한 구제 발굴 조사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2003~2005년에 산남 택지 개발 지구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집자리|집자리]] 2기, 2012년 근린 생활 시설 부지에서는 집자리 1기를 발굴하여 총 3기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039;&#039;&#039;산남동 1109(분평동Ⅱ) 유적&#039;&#039;&#039; 집자리는 해발 81m 정도의 구릉의 능선 정상부에 위치하며 장방형으로 길이 9.95m, 너비 3.58m, 깊이 0.16m이고, 내부 시설로는 [[돌두름식화덕자리|돌 두름식 화덕 자리(圍石式爐址)]] 2기와 대부분 양 벽면에 맞대어 만들어진 [[기둥구멍|기둥 구멍]] 및 저장 시설이 남아 있다. 출토 유물은 대부분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편들이며 집자리는 [[가락동유형|가락동 유형]]으로 판단된다.&lt;br /&gt;
&lt;br /&gt;
&#039;&#039;&#039;산남동 366(원흥리Ⅱ) 유적&#039;&#039;&#039;의 집자리는 해발 85m 정도의 구릉 정상부에 위치하는데 대부분 유실되어 정확한 형태 및 구조는 알 수 없으며 [[돌살촉|돌살촉]] 4점이 확인되었다. 산남동 51-9(산남동 산31-3)의 집자리는 장방형으로 해발 84~85m인 동남향 사면에 위치한다. 규모는 길이 3m, 너비 1.45m, 깊이 0.25m이고 내부 시설로는 기둥 구멍과 돌 두름식 화덕 자리가 남아 있어 가락동 유형의 집자리로 판단된다. 출토 유물로는 민무늬 토기, 돌살촉(石鏃), [[석도|돌칼(石刀)]], [[합인석부|조갯날 돌도끼(蛤刃石斧)]], [[돌대팻날|돌대팻날(扁平片刃石斧)]]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주로 동해안 지역이나 북한 동북 지역 혹은 두만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ㄱ자돌칼|‘ㄱ’자 돌칼]], 주걱칼 등으로 불리는 동북형 돌칼이 1점 출토되어 미호천 유역 청동기 시대 문화 교류에 대한 자료를 제공한다.&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3년~2005년 || 청주 산남동 유적 || 2006 || 중앙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12년 06월 28일~2012년 10월 12일 || 청주 산남동 산31-3번지 유적 || 2014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중앙문화재연구원. (2006). &amp;lt;i&amp;gt;청주 분평동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1087551&lt;br /&gt;
* 중앙문화재연구원. (2006). &amp;lt;i&amp;gt;청주 산남동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0732987&lt;br /&gt;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4). &amp;lt;i&amp;gt;청주 산남동 산31-3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3742133&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91&amp;diff=27132</id>
		<title>600-129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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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2:13: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사회 발달 단계론(社會發達段階論)}}&lt;br /&gt;
&lt;br /&gt;
{{개념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사회 발달 단계론&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키워드=[[단계론]], [[진화론]], [[사회적 진화주의]], [[삼시대 체계]], [[신진화론]], [[사회 형식론]]&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김범철&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인류 사회가 공통적이고 일관된 단계를 거쳐 발달해왔다는 포괄적 논리 체계. 발달은 진보(進步, progression)의 개념보다는 변화 또는 진화(進化, evolution)의 개념을 내포하는바, 학술적 논의에서는 사회 문화적 진화(sociocultural evolution)의 일부로 다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인류 사회의 변화가 보편적인 단계를 가진다는 생각, 곧 [[단계론|단계론(stadial theory)]]은 그 연원이 깊다. 기록이 있는 한,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의 헤시오도스(Hesiodos)가 인류사를 황금의 시대, 은의 시대, 청동의 시대, 영웅 시대, 철의 시대라는 단계로 나눈 것이 가장 오래다. 다만 진보가 아닌 쇠락(degeneration)이 그 변천의 방향이라는 것이 주목된다. 낙원(樂園)으로부터의 퇴출 또는 쇠락에 대한 관념은 17·18세기 계몽주의(啓蒙主義) 시대 이전까지 서구 사회에 팽배해 있었다.&lt;br /&gt;
&lt;br /&gt;
인류 역사의 변천에 진보의 개념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것은 프랑스 사회 철학자 몽테스키외(Montesquieu)의 3단계―야만(savagery)·미개(barbarism)·문명(civilization)― 구분·변천안을 필두로 한다. 그런데, 이 3단계설은 몽테스키외가 활동했던 당시보다는 19세기에 들어 크게 유행하게 된다. 미국의 모건(Lewis H. Morgan)은 인류학에서 19세기 진화론자의 입장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고대 사회(Ancient Society)』(1877)를 통해 3단계설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되, 야만과 미개를 각각 3기로 세분하여 7단계를 제시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모건이 그러했듯, 당시 영국 인류학을 이끌었던 타일러(Edward B. Tylor)도 3단계 발전 과정을 전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그들에게 ‘최종’ 단계인 문명은 분절적 문자, 도시, 집약 농경 등의 기술적 성취를 이룬 단혼제(單婚制) 등을 특징으로 한다. 사회 발달 단계에 대한 19세기의 이러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진화’와 ‘진보’를 동일시하는 관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다윈(Charles R. Darwin)의 생물학적 [[진화론|진화론]]에 앞서 발표된 스펜서(Herbert Spencer)의 관점에서부터 분명해지며, 19세기 [[사회적진화주의|사회적 진화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집단이 동일한 궤적으로 진화한다는 단선적(單線的, unilineal) 진화이면서 그 정점에는 당시 유럽 사회가 있다고 전제하는 [[자민족중심주의|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c)]]의 입장을 천명하게 된다. 그와 같은 서구 중심의 사고는 몽테스키외의 단계에서는 전제되지 않았지만 15~17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lt;br /&gt;
&lt;br /&gt;
유럽 밖 집단과의 비교를 전제하지는 않았지만 1816년 톰센(Christian J. Thomsen)이 [[선사시대|선사 시대]] 유물을 [[석기|석기]], [[청동기|청동기]], [[철기|철기]]로 분류하면서 제시된 [[삼시대법|삼시대 체계(Three Age System)]] 또한 구대륙 여러 나라의 [[편년|편년]] 체계로 수용되면서 보편적인 단계론으로 자리 잡는다.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에 대해 즐문 (토기) 시대, 무문 (토기) 시대 등의 대안적 개념이 제시되기도 하지만 한국 고고학의 선사 시대 편년 체계도 기본적으로 삼시대 체계를 준용하고 있다. 사회적 진화주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생산수단과 생산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경제적 사회 구성체(social formation)의 변화를 ‘원시 공산제―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자본주의’로 제시한 틀 역시 19세기에 제시된 사회 발달 단계론의 하나이다. 맥락상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물 사관의 형성 과정에는 당시 사회 진화론자 특히, 모건의 영향을 받게 된다. 유물사관의 배경이 되는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가족·사유 재산·국가의 기원(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1884)은 『고대 사회』에 고무된 바 크다.&lt;br /&gt;
&lt;br /&gt;
이념적 성향을 따라, 북한 고고학은 해방 이후 사적 유물론의 변천 단계에 의거하여 한국역사를 재구성한다. 1950년대 원시·고대의 사회 구성체 논쟁을 통해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에서 [[고조선|고조선(古朝鮮)]]을 분리하여 노예 소유자 사회로서 고대에 포함하게 된다. 더 나아가 고조선을 단계화함으로써 종래 청동기 시대에 속했던 유적들, 특히 동북한의 유적을 고대에 포함시키고 있다. 한편, 오히려 정치 체제 등 상부 구조가 사회 변화를 추동할 수도 있다는 [[신마르크스주의|신마르크스 주의(Neo-Marxism)]]의 논리가 쉽게 접목될 만함에도, 여전히 생산 수단과 생산력에 주목하는 [[속류유물론|속류 유물론(vulgar materialism)]]에 천착하는 모습도 보인다.&lt;br /&gt;
&lt;br /&gt;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단선적 진화, 자민족 중심주의적 시각, 기술 발달에 대한 과도한 강조 등 19세기 사회적 진화주의가 표방하였던 사항들은 비판에 직면하게 되고 문화 변동에 있어 자생적 발달보다는 전파를 강조하는 비진화적 관점의 흥기를 촉발한다. 영국(비전문가들)의 극단적 전파주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역사적전파주의|역사적 전파주의]], 미국 보아스(Franz U. Boas) 등의 [[역사특수주의|역사 특수주의(historical particularism)]], 영국의 [[구조기능주의|구조 기능주의(structural-functionalism)]] 등이 이 시기에 유행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이러한 반동적 움직임의 영향으로 인류사에 대한 진화론적 이해는 변화를 도모하게 된다. 20세기 전반 일률적인 진보보다는 상이한 환경에 대한 적응에 주목하는 다선적(多線的, multilineal) 진화를 표방하게 된다. 더불어, 사회 복합도의 상승이라는 [[보편진화|보편 진화(general evolution)]]는 물론, 상이한 환경에 대한 적응과 함께 다종의 전파와 접촉에 의해 발생하는 [[특수진화|특수 진화(specific evolution)]]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된다. 흔히, [[신진화론|신진화론(Neoevolutionism)]]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조(思潮)에서 나타난 [[사회형식론|사회 형식론(社會形式論, societal typology)]]은 고고학에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서비스(Elman R. Service)의 안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lt;br /&gt;
&lt;br /&gt;
서비스는 『원시 사회 조직(Primitive Social Organization)』(1962)을 통해 국가 조직을 갖지 않은 세계 각지의 민족지(ethnographic) 집단을 사회 정치적 구조와 경제 형태의 상관관계에 주목하면서 [[무리|무리(band)]], [[부족|부족(部族, tribe)]], [[수장사회|수장 사회(首長社會, chiefdom)]]의 3가지로 분류하고, 『국가와 문명의 기원(Origins of the State and Civilization)』(1975)을 통해 세계 각지 원시 조직이 [[국가|국가(國家, state)]]단계 조직으로의 진화를 설명함으로써, 4단계 변천을 상정하게 된다. ‘무리’는 25~100명의 부계 또는 부거제(父居制) 친족으로 구성되는데 수렵-채집 경제를 영위한다. ‘부족’은 혈연적 결속을 갖는 무리의 연합으로 동·식물의 사육과 재배 같은 생산 경제에 기반한다. 무리는 [[구석기시대|구석기 시대]]의, 부족은 [[신석기시대|신석기 시대]]의 가장 발전된 형태의 사회 조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수장 사회’는 앞의 두 단계에 비해, 확연한 양적 팽창―인구 규모 및 밀도의 증대―은 물론 친족 집단에 따른 불평등한 서열 곧 계층, 사회정치적 우두머리, 재분배 경제 체제 등의 발생이라는 현저한 구조적 차이를 보인다.&lt;br /&gt;
&lt;br /&gt;
서비스의 안보다는 파급력이 약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프리드(Morton H. Fried)의 ‘평등 사회(egalitarian society)―서열 사회(ranked society)―계층 사회(stratified society)―국가(state)’ 안 역시 신진화론에 입각한 단계론으로 인정된다. 외형은 유사하지만 프리드의 각 단계는 대응하는 서비스의 단계보다 복합도가 높은 집단을 포괄한다. 뿐만아니라, 서비스가 사회 통합의 정도에 주목하면서 민족지 집단의 분류에 치중했던 반면, 『정치 사회의 진화(The Evolution of Political Society)』(1967)라는 제목에 드러나듯, 프리드는 [[계층화|계층화(stratification)]] 과정에서의 갈등에 주목하며 정치 체제의 진화를 설명한다. 취지나 구체적 분류 과정에서 서비스와의 차이를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프리드는 서비스의 ‘부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80%;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 margin-top:2.5em; margin-bottom:2.5em; text-align:center; table-layout:fixed;&amp;quot;&lt;br /&gt;
|+ &#039;&#039;&#039;표 1. 서비스와 프리드의 단계비교&#039;&#039;&#039;&lt;br /&gt;
|-&lt;br /&gt;
| style=&amp;quot;width:15%; background-color:#666; color:#fff; font-weight:bold;&amp;quot; | 서비스&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width:20%;&amp;quot; | 무리&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width:20%;&amp;quot; | 부족&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width:20%;&amp;quot; | 수장사회&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width:25%;&amp;quot; | 국가&lt;br /&gt;
|-&lt;br /&gt;
| style=&amp;quot;background-color:#666; color:#fff; font-weight:bold;&amp;quot; | 프리드&lt;br /&gt;
| colspan=&amp;quot;3&amp;quot; | 평등사회&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 서열사회&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 계층사회&lt;br /&gt;
| 국가&lt;br /&gt;
|}&lt;br /&gt;
&lt;br /&gt;
그 외에도 서비스의 설에 대한 적잖은 비판이 이어지는데, 특히 수장 사회에 집중된다. 얼(Timothy K. Earle)은 하와이(Hawai’i) 현지 조사를 통해 수장 사회를 판정하는 필수적 특성들, 특히 ‘재분배 경제’는 적어도 하와이의 맥락에서는 적합하지 않거나 허구적임을 지적한다. 한편, 「너무나 많은 유형(Too Many Types)」(1984)의 제목에서처럼 파인먼(Gary M. Feinman)과 나이젤(Jill E. Neitzel)도 범문화적 검토를 통해 ‘수장사회’라는 범주에 속하는 집단들이 형태상 엄청난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수장 사회’라는 부류 또는 단계가 무두 평등(無頭平等)의 사회와 국가의 사이에 있는 다양한 집단을 규정한 데서 오는 태생적 한계라는 인식도 널리 퍼져간다. 그 맥락에서 ‘중간(intermediate)’ 또는 ‘중위(middlerange)’의 범주로 다루자는 주장이 적잖은 동조를 얻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비스의 분류·단계론은 확대·재생산되기도 한다. 렌프류(Colin Renfrew)는 1974년 「생계 경제를 넘어서(Beyond a Subsistence Economy)」를 통해 신석기시대 영국 웨섹스(Wessex) 사회를 대상으로, ① 서열화된 사회, ② 수장에 의해 조직된 생산물 재분배 경제, ③ 인구 밀도의 증대, ④ 전체 인구 규모의 증가, ⑤ 개별 취락 규모의 확대, ⑥ 생산성의 증대, ⑦ 영역 경계의 명확화, ⑧ 사회적 지위의 증대를 수반하는 사회 통합도의 증대, ⑨ 사회·신앙·경제적 활동을 조율하는 중심지, ⑩ 다양한 사회적 목적에 부합하는 의식과 의례 증가, ⑪ 사제(司祭) 집단의 부상(浮上), ⑫ (재분배를 촉발할) 다양한 생태적 적소들과의 관계, ⑬ 지역별 또는 생태 영역별, 협업적 노력으로 개별 기술을 동원하는 작업을 통한 전문화, ⑭ 농업 기반 시설 및/또는 사원, 의례 시설을 위한 축대, 피라미드 등의 축조를 위한 공공 노동력의 조직화 및 그 발달, ⑮ 수공생산 전문화의 향상, ⑯ 수장 사회들의 부침(浮沈)에 관련된 영역 확대의 가능성, ⑰ 내부 투쟁 감소, ⑱ 비경제적 분야에서 작동하는 영속적 지도권에 관련된 사회 내 개인 및 집단 간 불평등, ⑲ 높은 지위를 표시하는 복장과 장신구, ⑳ 합법적 강제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진정한 정부 조직의 부재 등 수장 사회에 적용될 20가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고고학적 맥락에서의 활용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수장 사회 자체를 세분―예를 들어, 단순 대(對) 복합 수장사회―함으로써, 개념을 세련화하고자 한 노력도 잇따른다. 더 나아가 렌프류와 반(Paul Banh)은 『고고학: 이론, 방법 및 실행(Archaeology: Theories, Methods &amp;amp; Practice)』에서 이동성 수렵 채집 집단(mobile hunter-gatherer group) 분절 사회(segmentary society), 수장 사회(chiefdom), 국가(state)의 범주를 설정하고 있다. 이는 서비스의 안을 기초로 삼고 있는데, 몇몇 비판을 의식하고 무분별한 통시적 적용을 경계하면서도 분류 체계로서의 기여를 인정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서비스의 안은 한국 선사 시대 사회 조직을 복원하는 작업에도 적극 수용된다. 특히, ‘chiefdom’을 ‘군장(君長) 사회’, ‘족장(族長) 사회’, ‘추장(酋長) 사회’ 등으로 번역하면서 청동기 시대 및 삼한(三韓)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고자 했다. 역사 기록에 나타나거나 친숙한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 토착화의 노력은 인정되지만 범문화적 보편성 파악을 목표로 했던 사회 형식론의 기본적 취지에는 배치된다. ‘chief’는 보편적인 의미의 우두머리, 곧 수장(首長)으로 그 역할 분야가 한정되지 않는다. 세계 다른 지역에도 수장을 일컫는 명칭이 문헌 기록에 나타나지만 해당 사회를 지칭할 때, 특화된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한편, 이론적 배경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나 기계적 기준 적용 등이 한계로 지적되면서, 한국 선사 시대에서 세계사적 보편성에 부합할 측면들을 부각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당초 의도와는 달리 1990년대 이후 논의가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lt;br /&gt;
&lt;br /&gt;
한국 고고학의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 사회 형식론에 입각한 단계적 변화를 고전적 저작에 따라 설명하는 노력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성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확보한 세계 여러 사회들 간 상사·상이성에 대한 정보는 당초와는 다른 관점에서 이론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특정 사회가 특정 부류에 속하는지 여부를 판정하고자 하지는 않지만, 연구의 대상이 된 사회가 대략 어떤 단계의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정도만 잠정하고 어떤 기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떠한 방향으로 사회 복합화를 진행시키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각지의 연구 결과를 비교론의 관점에서 고찰하여 상사·상이성을 발생시키는 배경을 탐색하는 이른바 ‘복합화 과정의 비교 고고학’으로 탈바꿈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400px&amp;gt;&lt;br /&gt;
File:루이스_모건.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범철. (2015). &amp;lt;i&amp;gt;사회성격의 이해&amp;lt;/i&amp;gt;.&lt;br /&gt;
* 머윈 S. 가바리노. (1994). &amp;lt;i&amp;gt;문화인류학의 역사&amp;lt;/i&amp;gt;.&lt;br /&gt;
* 부르스 트리거. (2006). &amp;lt;i&amp;gt;고고학사&amp;lt;/i&amp;gt;.&lt;br /&gt;
* 이선복. (1992). 북한 고고학사 시론. &amp;lt;i&amp;gt;동방학지, 74&amp;lt;/i&amp;gt;, 1-74. https://www.riss.kr/link?id=A19674676&lt;br /&gt;
* 콜린 렌프류 , 폴 반. (2006). &amp;lt;i&amp;gt;현대고고학의 이해&amp;lt;/i&amp;gt;.&lt;br /&gt;
* Earle, T. K. (1991). &amp;lt;i&amp;gt;Chiefdoms: Power, Economy, and Ideology&amp;lt;/i&amp;gt;. Cambridge University Press.&lt;br /&gt;
* Fried, M. H. (1967). &amp;lt;i&amp;gt;The Evolution of Political Society: An Essay in Political Anthropology&amp;lt;/i&amp;gt;. Random House.&lt;br /&gt;
* Meskell, L., Preucel, R. W. (2004). &amp;lt;i&amp;gt;A Companion to Social Archaeology&amp;lt;/i&amp;gt;. Blackwell.&lt;br /&gt;
* Service, E. R. (1962). &amp;lt;i&amp;gt;Primitive Social Organization: An Evolutionary Perspective&amp;lt;/i&amp;gt;. Random House.&lt;br /&gt;
* Service, E. R. (1975). &amp;lt;i&amp;gt;Origins of the State and Civilization: The Process of Cultural Evolution&amp;lt;/i&amp;gt;. W.W. Norton &amp;amp; Company.&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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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00-129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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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사회 발달 단계론(社會發達段階論)}}&lt;br /&gt;
&lt;br /&gt;
{{개념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사회 발달 단계론&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키워드=[[단계론]], [[진화론]], [[사회적 진화주의]], [[삼시대 체계]], [[신진화론]], [[사회 형식론]]&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김범철&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인류 사회가 공통적이고 일관된 단계를 거쳐 발달해왔다는 포괄적 논리 체계. 발달은 진보(進步, progression)의 개념보다는 변화 또는 진화(進化, evolution)의 개념을 내포하는바, 학술적 논의에서는 사회 문화적 진화(sociocultural evolution)의 일부로 다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인류 사회의 변화가 보편적인 단계를 가진다는 생각, 곧 [[단계론|단계론(stadial theory)]]은 그 연원이 깊다. 기록이 있는 한,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의 헤시오도스(Hesiodos)가 인류사를 황금의 시대, 은의 시대, 청동의 시대, 영웅 시대, 철의 시대라는 단계로 나눈 것이 가장 오래다. 다만 진보가 아닌 쇠락(degeneration)이 그 변천의 방향이라는 것이 주목된다. 낙원(樂園)으로부터의 퇴출 또는 쇠락에 대한 관념은 17·18세기 계몽주의(啓蒙主義) 시대 이전까지 서구 사회에 팽배해 있었다.&lt;br /&gt;
&lt;br /&gt;
인류 역사의 변천에 진보의 개념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것은 프랑스 사회 철학자 몽테스키외(Montesquieu)의 3단계―야만(savagery)·미개(barbarism)·문명(civilization)― 구분·변천안을 필두로 한다. 그런데, 이 3단계설은 몽테스키외가 활동했던 당시보다는 19세기에 들어 크게 유행하게 된다. 미국의 모건(Lewis H. Morgan)은 인류학에서 19세기 진화론자의 입장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고대 사회(Ancient Society)』(1877)를 통해 3단계설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되, 야만과 미개를 각각 3기로 세분하여 7단계를 제시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모건이 그러했듯, 당시 영국 인류학을 이끌었던 타일러(Edward B. Tylor)도 3단계 발전 과정을 전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그들에게 ‘최종’ 단계인 문명은 분절적 문자, 도시, 집약 농경 등의 기술적 성취를 이룬 단혼제(單婚制) 등을 특징으로 한다. 사회 발달 단계에 대한 19세기의 이러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진화’와 ‘진보’를 동일시하는 관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다윈(Charles R. Darwin)의 생물학적 [[진화론|진화론]]에 앞서 발표된 스펜서(Herbert Spencer)의 관점에서부터 분명해지며, 19세기 [[사회적진화주의|사회적 진화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집단이 동일한 궤적으로 진화한다는 단선적(單線的, unilineal) 진화이면서 그 정점에는 당시 유럽 사회가 있다고 전제하는 [[자민족중심주의|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c)]]의 입장을 천명하게 된다. 그와 같은 서구 중심의 사고는 몽테스키외의 단계에서는 전제되지 않았지만 15~17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lt;br /&gt;
&lt;br /&gt;
유럽 밖 집단과의 비교를 전제하지는 않았지만 1816년 톰센(Christian J. Thomsen)이 [[선사시대|선사 시대]] 유물을 [[석기|석기]], [[청동기|청동기]], [[철기|철기]]로 분류하면서 제시된 [[삼시대법|삼시대 체계(Three Age System)]] 또한 구대륙 여러 나라의 [[편년|편년]] 체계로 수용되면서 보편적인 단계론으로 자리 잡는다.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에 대해 즐문 (토기) 시대, 무문 (토기) 시대 등의 대안적 개념이 제시되기도 하지만 한국 고고학의 선사 시대 편년 체계도 기본적으로 삼시대 체계를 준용하고 있다. 사회적 진화주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생산수단과 생산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경제적 사회 구성체(social formation)의 변화를 ‘원시 공산제―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자본주의’로 제시한 틀 역시 19세기에 제시된 사회 발달 단계론의 하나이다. 맥락상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물 사관의 형성 과정에는 당시 사회 진화론자 특히, 모건의 영향을 받게 된다. 유물사관의 배경이 되는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가족·사유 재산·국가의 기원(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1884)은 『고대 사회』에 고무된 바 크다.&lt;br /&gt;
&lt;br /&gt;
이념적 성향을 따라, 북한 고고학은 해방 이후 사적 유물론의 변천 단계에 의거하여 한국역사를 재구성한다. 1950년대 원시·고대의 사회 구성체 논쟁을 통해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에서 [[고조선|고조선(古朝鮮)]]을 분리하여 노예 소유자 사회로서 고대에 포함하게 된다. 더 나아가 고조선을 단계화함으로써 종래 청동기 시대에 속했던 유적들, 특히 동북한의 유적을 고대에 포함시키고 있다. 한편, 오히려 정치 체제 등 상부 구조가 사회 변화를 추동할 수도 있다는 [[신마르크스주의|신마르크스 주의(Neo-Marxism)]]의 논리가 쉽게 접목될 만함에도, 여전히 생산 수단과 생산력에 주목하는 [[속류유물론|속류 유물론(vulgar materialism)]]에 천착하는 모습도 보인다.&lt;br /&gt;
&lt;br /&gt;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단선적 진화, 자민족 중심주의적 시각, 기술 발달에 대한 과도한 강조 등 19세기 사회적 진화주의가 표방하였던 사항들은 비판에 직면하게 되고 문화 변동에 있어 자생적 발달보다는 전파를 강조하는 비진화적 관점의 흥기를 촉발한다. 영국(비전문가들)의 극단적 전파주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역사적전파주의|역사적 전파주의]], 미국 보아스(Franz U. Boas) 등의 [[역사특수주의|역사 특수주의(historical particularism)]], 영국의 [[구조기능주의|구조 기능주의(structural-functionalism)]] 등이 이 시기에 유행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이러한 반동적 움직임의 영향으로 인류사에 대한 진화론적 이해는 변화를 도모하게 된다. 20세기 전반 일률적인 진보보다는 상이한 환경에 대한 적응에 주목하는 다선적(多線的, multilineal) 진화를 표방하게 된다. 더불어, 사회 복합도의 상승이라는 [[보편진화|보편 진화(general evolution)]]는 물론, 상이한 환경에 대한 적응과 함께 다종의 전파와 접촉에 의해 발생하는 [[특수진화|특수 진화(specific evolution)]]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된다. 흔히, [[신진화론|신진화론(Neoevolutionism)]]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조(思潮)에서 나타난 [[사회형식론|사회 형식론(社會形式論, societal typology)]]은 고고학에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서비스(Elman R. Service)의 안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lt;br /&gt;
&lt;br /&gt;
서비스는 『원시 사회 조직(Primitive Social Organization)』(1962)을 통해 국가 조직을 갖지 않은 세계 각지의 민족지(ethnographic) 집단을 사회 정치적 구조와 경제 형태의 상관관계에 주목하면서 [[무리|무리(band)]], [[부족|부족(部族, tribe)]], [[수장사회|수장 사회(首長社會, chiefdom)]]의 3가지로 분류하고, 『국가와 문명의 기원(Origins of the State and Civilization)』(1975)을 통해 세계 각지 원시 조직이 [[국가|국가(國家, state)]]단계 조직으로의 진화를 설명함으로써, 4단계 변천을 상정하게 된다. ‘무리’는 25~100명의 부계 또는 부거제(父居制) 친족으로 구성되는데 수렵-채집 경제를 영위한다. ‘부족’은 혈연적 결속을 갖는 무리의 연합으로 동·식물의 사육과 재배 같은 생산 경제에 기반한다. 무리는 [[구석기시대|구석기 시대]]의, 부족은 [[신석기시대|신석기 시대]]의 가장 발전된 형태의 사회 조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수장 사회’는 앞의 두 단계에 비해, 확연한 양적 팽창―인구 규모 및 밀도의 증대―은 물론 친족 집단에 따른 불평등한 서열 곧 계층, 사회정치적 우두머리, 재분배 경제 체제 등의 발생이라는 현저한 구조적 차이를 보인다.&lt;br /&gt;
&lt;br /&gt;
서비스의 안보다는 파급력이 약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프리드(Morton H. Fried)의 ‘평등 사회(egalitarian society)―서열 사회(ranked society)―계층 사회(stratified society)―국가(state)’ 안 역시 신진화론에 입각한 단계론으로 인정된다. 외형은 유사하지만 프리드의 각 단계는 대응하는 서비스의 단계보다 복합도가 높은 집단을 포괄한다. 뿐만아니라, 서비스가 사회 통합의 정도에 주목하면서 민족지 집단의 분류에 치중했던 반면, 『정치 사회의 진화(The Evolution of Political Society)』(1967)라는 제목에 드러나듯, 프리드는 [[계층화|계층화(stratification)]] 과정에서의 갈등에 주목하며 정치 체제의 진화를 설명한다. 취지나 구체적 분류 과정에서 서비스와의 차이를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프리드는 서비스의 ‘부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80%;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 text-align:center; table-layout:fixed;&amp;quot;&lt;br /&gt;
|+ &#039;&#039;&#039;표 1. 서비스와 프리드의 단계비교&#039;&#039;&#039;&lt;br /&gt;
|-&lt;br /&gt;
| style=&amp;quot;width:15%; background-color:#666; color:#fff; font-weight:bold;&amp;quot; | 서비스&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width:20%;&amp;quot; | 무리&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width:20%;&amp;quot; | 부족&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width:20%;&amp;quot; | 수장사회&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width:25%;&amp;quot; | 국가&lt;br /&gt;
|-&lt;br /&gt;
| style=&amp;quot;background-color:#666; color:#fff; font-weight:bold;&amp;quot; | 프리드&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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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amp;quot;2&amp;quot; | 서열사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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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 외에도 서비스의 설에 대한 적잖은 비판이 이어지는데, 특히 수장 사회에 집중된다. 얼(Timothy K. Earle)은 하와이(Hawai’i) 현지 조사를 통해 수장 사회를 판정하는 필수적 특성들, 특히 ‘재분배 경제’는 적어도 하와이의 맥락에서는 적합하지 않거나 허구적임을 지적한다. 한편, 「너무나 많은 유형(Too Many Types)」(1984)의 제목에서처럼 파인먼(Gary M. Feinman)과 나이젤(Jill E. Neitzel)도 범문화적 검토를 통해 ‘수장사회’라는 범주에 속하는 집단들이 형태상 엄청난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수장 사회’라는 부류 또는 단계가 무두 평등(無頭平等)의 사회와 국가의 사이에 있는 다양한 집단을 규정한 데서 오는 태생적 한계라는 인식도 널리 퍼져간다. 그 맥락에서 ‘중간(intermediate)’ 또는 ‘중위(middlerange)’의 범주로 다루자는 주장이 적잖은 동조를 얻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비스의 분류·단계론은 확대·재생산되기도 한다. 렌프류(Colin Renfrew)는 1974년 「생계 경제를 넘어서(Beyond a Subsistence Economy)」를 통해 신석기시대 영국 웨섹스(Wessex) 사회를 대상으로, ① 서열화된 사회, ② 수장에 의해 조직된 생산물 재분배 경제, ③ 인구 밀도의 증대, ④ 전체 인구 규모의 증가, ⑤ 개별 취락 규모의 확대, ⑥ 생산성의 증대, ⑦ 영역 경계의 명확화, ⑧ 사회적 지위의 증대를 수반하는 사회 통합도의 증대, ⑨ 사회·신앙·경제적 활동을 조율하는 중심지, ⑩ 다양한 사회적 목적에 부합하는 의식과 의례 증가, ⑪ 사제(司祭) 집단의 부상(浮上), ⑫ (재분배를 촉발할) 다양한 생태적 적소들과의 관계, ⑬ 지역별 또는 생태 영역별, 협업적 노력으로 개별 기술을 동원하는 작업을 통한 전문화, ⑭ 농업 기반 시설 및/또는 사원, 의례 시설을 위한 축대, 피라미드 등의 축조를 위한 공공 노동력의 조직화 및 그 발달, ⑮ 수공생산 전문화의 향상, ⑯ 수장 사회들의 부침(浮沈)에 관련된 영역 확대의 가능성, ⑰ 내부 투쟁 감소, ⑱ 비경제적 분야에서 작동하는 영속적 지도권에 관련된 사회 내 개인 및 집단 간 불평등, ⑲ 높은 지위를 표시하는 복장과 장신구, ⑳ 합법적 강제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진정한 정부 조직의 부재 등 수장 사회에 적용될 20가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고고학적 맥락에서의 활용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수장 사회 자체를 세분―예를 들어, 단순 대(對) 복합 수장사회―함으로써, 개념을 세련화하고자 한 노력도 잇따른다. 더 나아가 렌프류와 반(Paul Banh)은 『고고학: 이론, 방법 및 실행(Archaeology: Theories, Methods &amp;amp; Practice)』에서 이동성 수렵 채집 집단(mobile hunter-gatherer group) 분절 사회(segmentary society), 수장 사회(chiefdom), 국가(state)의 범주를 설정하고 있다. 이는 서비스의 안을 기초로 삼고 있는데, 몇몇 비판을 의식하고 무분별한 통시적 적용을 경계하면서도 분류 체계로서의 기여를 인정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서비스의 안은 한국 선사 시대 사회 조직을 복원하는 작업에도 적극 수용된다. 특히, ‘chiefdom’을 ‘군장(君長) 사회’, ‘족장(族長) 사회’, ‘추장(酋長) 사회’ 등으로 번역하면서 청동기 시대 및 삼한(三韓)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고자 했다. 역사 기록에 나타나거나 친숙한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 토착화의 노력은 인정되지만 범문화적 보편성 파악을 목표로 했던 사회 형식론의 기본적 취지에는 배치된다. ‘chief’는 보편적인 의미의 우두머리, 곧 수장(首長)으로 그 역할 분야가 한정되지 않는다. 세계 다른 지역에도 수장을 일컫는 명칭이 문헌 기록에 나타나지만 해당 사회를 지칭할 때, 특화된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한편, 이론적 배경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나 기계적 기준 적용 등이 한계로 지적되면서, 한국 선사 시대에서 세계사적 보편성에 부합할 측면들을 부각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당초 의도와는 달리 1990년대 이후 논의가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lt;br /&gt;
&lt;br /&gt;
한국 고고학의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 사회 형식론에 입각한 단계적 변화를 고전적 저작에 따라 설명하는 노력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성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확보한 세계 여러 사회들 간 상사·상이성에 대한 정보는 당초와는 다른 관점에서 이론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특정 사회가 특정 부류에 속하는지 여부를 판정하고자 하지는 않지만, 연구의 대상이 된 사회가 대략 어떤 단계의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정도만 잠정하고 어떤 기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떠한 방향으로 사회 복합화를 진행시키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각지의 연구 결과를 비교론의 관점에서 고찰하여 상사·상이성을 발생시키는 배경을 탐색하는 이른바 ‘복합화 과정의 비교 고고학’으로 탈바꿈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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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lt;br /&gt;
* 김범철. (2015). &amp;lt;i&amp;gt;사회성격의 이해&amp;lt;/i&amp;gt;.&lt;br /&gt;
* 머윈 S. 가바리노. (1994). &amp;lt;i&amp;gt;문화인류학의 역사&amp;lt;/i&amp;gt;.&lt;br /&gt;
* 부르스 트리거. (2006). &amp;lt;i&amp;gt;고고학사&amp;lt;/i&amp;gt;.&lt;br /&gt;
* 이선복. (1992). 북한 고고학사 시론. &amp;lt;i&amp;gt;동방학지, 74&amp;lt;/i&amp;gt;, 1-74. https://www.riss.kr/link?id=A19674676&lt;br /&gt;
* 콜린 렌프류 , 폴 반. (2006). &amp;lt;i&amp;gt;현대고고학의 이해&amp;lt;/i&amp;gt;.&lt;br /&gt;
* Earle, T. K. (1991). &amp;lt;i&amp;gt;Chiefdoms: Power, Economy, and Ideology&amp;lt;/i&amp;gt;. Cambridge University Press.&lt;br /&gt;
* Fried, M. H. (1967). &amp;lt;i&amp;gt;The Evolution of Political Society: An Essay in Political Anthropology&amp;lt;/i&amp;gt;. Random House.&lt;br /&gt;
* Meskell, L., Preucel, R. W. (2004). &amp;lt;i&amp;gt;A Companion to Social Archaeology&amp;lt;/i&amp;gt;. Blackwell.&lt;br /&gt;
* Service, E. R. (1962). &amp;lt;i&amp;gt;Primitive Social Organization: An Evolutionary Perspective&amp;lt;/i&amp;gt;. Random House.&lt;br /&gt;
* Service, E. R. (1975). &amp;lt;i&amp;gt;Origins of the State and Civilization: The Process of Cultural Evolution&amp;lt;/i&amp;gt;. W.W. Norton &amp;amp; Company.&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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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2:10: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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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개념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사회 발달 단계론&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키워드=[[단계론]], [[진화론]], [[사회적 진화주의]], [[삼시대 체계]], [[신진화론]], [[사회 형식론]]&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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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필자=김범철&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인류 사회가 공통적이고 일관된 단계를 거쳐 발달해왔다는 포괄적 논리 체계. 발달은 진보(進步, progression)의 개념보다는 변화 또는 진화(進化, evolution)의 개념을 내포하는바, 학술적 논의에서는 사회 문화적 진화(sociocultural evolution)의 일부로 다루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인류 사회의 변화가 보편적인 단계를 가진다는 생각, 곧 [[단계론|단계론(stadial theory)]]은 그 연원이 깊다. 기록이 있는 한,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의 헤시오도스(Hesiodos)가 인류사를 황금의 시대, 은의 시대, 청동의 시대, 영웅 시대, 철의 시대라는 단계로 나눈 것이 가장 오래다. 다만 진보가 아닌 쇠락(degeneration)이 그 변천의 방향이라는 것이 주목된다. 낙원(樂園)으로부터의 퇴출 또는 쇠락에 대한 관념은 17·18세기 계몽주의(啓蒙主義) 시대 이전까지 서구 사회에 팽배해 있었다.&lt;br /&gt;
&lt;br /&gt;
인류 역사의 변천에 진보의 개념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것은 프랑스 사회 철학자 몽테스키외(Montesquieu)의 3단계―야만(savagery)·미개(barbarism)·문명(civilization)― 구분·변천안을 필두로 한다. 그런데, 이 3단계설은 몽테스키외가 활동했던 당시보다는 19세기에 들어 크게 유행하게 된다. 미국의 모건(Lewis H. Morgan)은 인류학에서 19세기 진화론자의 입장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고대 사회(Ancient Society)』(1877)를 통해 3단계설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되, 야만과 미개를 각각 3기로 세분하여 7단계를 제시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모건이 그러했듯, 당시 영국 인류학을 이끌었던 타일러(Edward B. Tylor)도 3단계 발전 과정을 전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그들에게 ‘최종’ 단계인 문명은 분절적 문자, 도시, 집약 농경 등의 기술적 성취를 이룬 단혼제(單婚制) 등을 특징으로 한다. 사회 발달 단계에 대한 19세기의 이러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진화’와 ‘진보’를 동일시하는 관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다윈(Charles R. Darwin)의 생물학적 [[진화론|진화론]]에 앞서 발표된 스펜서(Herbert Spencer)의 관점에서부터 분명해지며, 19세기 [[사회적진화주의|사회적 진화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집단이 동일한 궤적으로 진화한다는 단선적(單線的, unilineal) 진화이면서 그 정점에는 당시 유럽 사회가 있다고 전제하는 [[자민족중심주의|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c)]]의 입장을 천명하게 된다. 그와 같은 서구 중심의 사고는 몽테스키외의 단계에서는 전제되지 않았지만 15~17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lt;br /&gt;
&lt;br /&gt;
유럽 밖 집단과의 비교를 전제하지는 않았지만 1816년 톰센(Christian J. Thomsen)이 [[선사시대|선사 시대]] 유물을 [[석기|석기]], [[청동기|청동기]], [[철기|철기]]로 분류하면서 제시된 [[삼시대법|삼시대 체계(Three Age System)]] 또한 구대륙 여러 나라의 [[편년|편년]] 체계로 수용되면서 보편적인 단계론으로 자리 잡는다.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에 대해 즐문 (토기) 시대, 무문 (토기) 시대 등의 대안적 개념이 제시되기도 하지만 한국 고고학의 선사 시대 편년 체계도 기본적으로 삼시대 체계를 준용하고 있다. 사회적 진화주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생산수단과 생산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경제적 사회 구성체(social formation)의 변화를 ‘원시 공산제―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자본주의’로 제시한 틀 역시 19세기에 제시된 사회 발달 단계론의 하나이다. 맥락상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물 사관의 형성 과정에는 당시 사회 진화론자 특히, 모건의 영향을 받게 된다. 유물사관의 배경이 되는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가족·사유 재산·국가의 기원(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1884)은 『고대 사회』에 고무된 바 크다.&lt;br /&gt;
&lt;br /&gt;
이념적 성향을 따라, 북한 고고학은 해방 이후 사적 유물론의 변천 단계에 의거하여 한국역사를 재구성한다. 1950년대 원시·고대의 사회 구성체 논쟁을 통해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에서 [[고조선|고조선(古朝鮮)]]을 분리하여 노예 소유자 사회로서 고대에 포함하게 된다. 더 나아가 고조선을 단계화함으로써 종래 청동기 시대에 속했던 유적들, 특히 동북한의 유적을 고대에 포함시키고 있다. 한편, 오히려 정치 체제 등 상부 구조가 사회 변화를 추동할 수도 있다는 [[신마르크스주의|신마르크스 주의(Neo-Marxism)]]의 논리가 쉽게 접목될 만함에도, 여전히 생산 수단과 생산력에 주목하는 [[속류유물론|속류 유물론(vulgar materialism)]]에 천착하는 모습도 보인다.&lt;br /&gt;
&lt;br /&gt;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단선적 진화, 자민족 중심주의적 시각, 기술 발달에 대한 과도한 강조 등 19세기 사회적 진화주의가 표방하였던 사항들은 비판에 직면하게 되고 문화 변동에 있어 자생적 발달보다는 전파를 강조하는 비진화적 관점의 흥기를 촉발한다. 영국(비전문가들)의 극단적 전파주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역사적전파주의|역사적 전파주의]], 미국 보아스(Franz U. Boas) 등의 [[역사특수주의|역사 특수주의(historical particularism)]], 영국의 [[구조기능주의|구조 기능주의(structural-functionalism)]] 등이 이 시기에 유행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이러한 반동적 움직임의 영향으로 인류사에 대한 진화론적 이해는 변화를 도모하게 된다. 20세기 전반 일률적인 진보보다는 상이한 환경에 대한 적응에 주목하는 다선적(多線的, multilineal) 진화를 표방하게 된다. 더불어, 사회 복합도의 상승이라는 [[보편진화|보편 진화(general evolution)]]는 물론, 상이한 환경에 대한 적응과 함께 다종의 전파와 접촉에 의해 발생하는 [[특수진화|특수 진화(specific evolution)]]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된다. 흔히, [[신진화론|신진화론(Neoevolutionism)]]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조(思潮)에서 나타난 [[사회형식론|사회 형식론(社會形式論, societal typology)]]은 고고학에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서비스(Elman R. Service)의 안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lt;br /&gt;
&lt;br /&gt;
서비스는 『원시 사회 조직(Primitive Social Organization)』(1962)을 통해 국가 조직을 갖지 않은 세계 각지의 민족지(ethnographic) 집단을 사회 정치적 구조와 경제 형태의 상관관계에 주목하면서 [[무리|무리(band)]], [[부족|부족(部族, tribe)]], [[수장사회|수장 사회(首長社會, chiefdom)]]의 3가지로 분류하고, 『국가와 문명의 기원(Origins of the State and Civilization)』(1975)을 통해 세계 각지 원시 조직이 [[국가|국가(國家, state)]]단계 조직으로의 진화를 설명함으로써, 4단계 변천을 상정하게 된다. ‘무리’는 25~100명의 부계 또는 부거제(父居制) 친족으로 구성되는데 수렵-채집 경제를 영위한다. ‘부족’은 혈연적 결속을 갖는 무리의 연합으로 동·식물의 사육과 재배 같은 생산 경제에 기반한다. 무리는 [[구석기시대|구석기 시대]]의, 부족은 [[신석기시대|신석기 시대]]의 가장 발전된 형태의 사회 조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수장 사회’는 앞의 두 단계에 비해, 확연한 양적 팽창―인구 규모 및 밀도의 증대―은 물론 친족 집단에 따른 불평등한 서열 곧 계층, 사회정치적 우두머리, 재분배 경제 체제 등의 발생이라는 현저한 구조적 차이를 보인다.&lt;br /&gt;
&lt;br /&gt;
서비스의 안보다는 파급력이 약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프리드(Morton H. Fried)의 ‘평등 사회(egalitarian society)―서열 사회(ranked society)―계층 사회(stratified society)―국가(state)’ 안 역시 신진화론에 입각한 단계론으로 인정된다. 외형은 유사하지만 프리드의 각 단계는 대응하는 서비스의 단계보다 복합도가 높은 집단을 포괄한다. 뿐만아니라, 서비스가 사회 통합의 정도에 주목하면서 민족지 집단의 분류에 치중했던 반면, 『정치 사회의 진화(The Evolution of Political Society)』(1967)라는 제목에 드러나듯, 프리드는 [[계층화|계층화(stratification)]] 과정에서의 갈등에 주목하며 정치 체제의 진화를 설명한다. 취지나 구체적 분류 과정에서 서비스와의 차이를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프리드는 서비스의 ‘부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width:80%;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 text-align:center; table-layout:fixed;&amp;quot;&lt;br /&gt;
|+ &#039;&#039;&#039;표 1. 서비스와 프리드의 단계비교&#039;&#039;&#039;&lt;br /&gt;
|-&lt;br /&gt;
| style=&amp;quot;width:15%; background-color:#666; color:#fff; font-weight:bold;&amp;quot; | 서비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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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width:20%;&amp;quot; | 부족&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width:20%;&amp;quot; | 수장사회&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style=&amp;quot;width:25%;&amp;quot; | 국가&lt;br /&gt;
|-&lt;br /&gt;
| style=&amp;quot;background-color:#666; color:#fff; font-weight:bold;&amp;quot; | 프리드&lt;br /&gt;
| colspan=&amp;quot;3&amp;quot; | 평등사회&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 서열사회&lt;br /&gt;
| colspan=&amp;quot;2&amp;quot; | 계층사회&lt;br /&gt;
| 국가&lt;br /&gt;
|}&lt;br /&gt;
&lt;br /&gt;
그 외에도 서비스의 설에 대한 적잖은 비판이 이어지는데, 특히 수장 사회에 집중된다. 얼(Timothy K. Earle)은 하와이(Hawai’i) 현지 조사를 통해 수장 사회를 판정하는 필수적 특성들, 특히 ‘재분배 경제’는 적어도 하와이의 맥락에서는 적합하지 않거나 허구적임을 지적한다. 한편, 「너무나 많은 유형(Too Many Types)」(1984)의 제목에서처럼 파인먼(Gary M. Feinman)과 나이젤(Jill E. Neitzel)도 범문화적 검토를 통해 ‘수장사회’라는 범주에 속하는 집단들이 형태상 엄청난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수장 사회’라는 부류 또는 단계가 무두 평등(無頭平等)의 사회와 국가의 사이에 있는 다양한 집단을 규정한 데서 오는 태생적 한계라는 인식도 널리 퍼져간다. 그 맥락에서 ‘중간(intermediate)’ 또는 ‘중위(middlerange)’의 범주로 다루자는 주장이 적잖은 동조를 얻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비스의 분류·단계론은 확대·재생산되기도 한다. 렌프류(Colin Renfrew)는 1974년 「생계 경제를 넘어서(Beyond a Subsistence Economy)」를 통해 신석기시대 영국 웨섹스(Wessex) 사회를 대상으로, ① 서열화된 사회, ② 수장에 의해 조직된 생산물 재분배 경제, ③ 인구 밀도의 증대, ④ 전체 인구 규모의 증가, ⑤ 개별 취락 규모의 확대, ⑥ 생산성의 증대, ⑦ 영역 경계의 명확화, ⑧ 사회적 지위의 증대를 수반하는 사회 통합도의 증대, ⑨ 사회·신앙·경제적 활동을 조율하는 중심지, ⑩ 다양한 사회적 목적에 부합하는 의식과 의례 증가, ⑪ 사제(司祭) 집단의 부상(浮上), ⑫ (재분배를 촉발할) 다양한 생태적 적소들과의 관계, ⑬ 지역별 또는 생태 영역별, 협업적 노력으로 개별 기술을 동원하는 작업을 통한 전문화, ⑭ 농업 기반 시설 및/또는 사원, 의례 시설을 위한 축대, 피라미드 등의 축조를 위한 공공 노동력의 조직화 및 그 발달, ⑮ 수공생산 전문화의 향상, ⑯ 수장 사회들의 부침(浮沈)에 관련된 영역 확대의 가능성, ⑰ 내부 투쟁 감소, ⑱ 비경제적 분야에서 작동하는 영속적 지도권에 관련된 사회 내 개인 및 집단 간 불평등, ⑲ 높은 지위를 표시하는 복장과 장신구, ⑳ 합법적 강제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진정한 정부 조직의 부재 등 수장 사회에 적용될 20가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고고학적 맥락에서의 활용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수장 사회 자체를 세분―예를 들어, 단순 대(對) 복합 수장사회―함으로써, 개념을 세련화하고자 한 노력도 잇따른다. 더 나아가 렌프류와 반(Paul Banh)은 『고고학: 이론, 방법 및 실행(Archaeology: Theories, Methods &amp;amp; Practice)』에서 이동성 수렵 채집 집단(mobile hunter-gatherer group) 분절 사회(segmentary society), 수장 사회(chiefdom), 국가(state)의 범주를 설정하고 있다. 이는 서비스의 안을 기초로 삼고 있는데, 몇몇 비판을 의식하고 무분별한 통시적 적용을 경계하면서도 분류 체계로서의 기여를 인정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서비스의 안은 한국 선사 시대 사회 조직을 복원하는 작업에도 적극 수용된다. 특히, ‘chiefdom’을 ‘군장(君長) 사회’, ‘족장(族長) 사회’, ‘추장(酋長) 사회’ 등으로 번역하면서 청동기 시대 및 삼한(三韓)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고자 했다. 역사 기록에 나타나거나 친숙한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 토착화의 노력은 인정되지만 범문화적 보편성 파악을 목표로 했던 사회 형식론의 기본적 취지에는 배치된다. ‘chief’는 보편적인 의미의 우두머리, 곧 수장(首長)으로 그 역할 분야가 한정되지 않는다. 세계 다른 지역에도 수장을 일컫는 명칭이 문헌 기록에 나타나지만 해당 사회를 지칭할 때, 특화된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한편, 이론적 배경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나 기계적 기준 적용 등이 한계로 지적되면서, 한국 선사 시대에서 세계사적 보편성에 부합할 측면들을 부각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당초 의도와는 달리 1990년대 이후 논의가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lt;br /&gt;
&lt;br /&gt;
한국 고고학의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 사회 형식론에 입각한 단계적 변화를 고전적 저작에 따라 설명하는 노력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성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확보한 세계 여러 사회들 간 상사·상이성에 대한 정보는 당초와는 다른 관점에서 이론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특정 사회가 특정 부류에 속하는지 여부를 판정하고자 하지는 않지만, 연구의 대상이 된 사회가 대략 어떤 단계의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정도만 잠정하고 어떤 기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떠한 방향으로 사회 복합화를 진행시키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각지의 연구 결과를 비교론의 관점에서 고찰하여 상사·상이성을 발생시키는 배경을 탐색하는 이른바 ‘복합화 과정의 비교 고고학’으로 탈바꿈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400px&amp;gt;&lt;br /&gt;
File:루이스_모건.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김범철. (2015). &amp;lt;i&amp;gt;사회성격의 이해&amp;lt;/i&amp;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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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린 렌프류 , 폴 반. (2006). &amp;lt;i&amp;gt;현대고고학의 이해&amp;lt;/i&amp;gt;.&lt;br /&gt;
* Earle, T. K. (1991). &amp;lt;i&amp;gt;Chiefdoms: Power, Economy, and Ideology&amp;lt;/i&amp;gt;. Cambridge University Press.&lt;br /&gt;
* Fried, M. H. (1967). &amp;lt;i&amp;gt;The Evolution of Political Society: An Essay in Political Anthropology&amp;lt;/i&amp;gt;. Random House.&lt;br /&gt;
* Meskell, L., Preucel, R. W. (2004). &amp;lt;i&amp;gt;A Companion to Social Archaeology&amp;lt;/i&amp;gt;. Blackwell.&lt;br /&gt;
* Service, E. R. (1962). &amp;lt;i&amp;gt;Primitive Social Organization: An Evolutionary Perspective&amp;lt;/i&amp;gt;. Random House.&lt;br /&gt;
* Service, E. R. (1975). &amp;lt;i&amp;gt;Origins of the State and Civilization: The Process of Cultural Evolution&amp;lt;/i&amp;gt;. W.W. Norton &amp;amp; Company.&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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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이미지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사수리 대전 고인돌군[和順 泗洙里大田支石墓群]}}&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사수리 대전 고인돌군&lt;br /&gt;
| 이칭별칭=화순 사수리 대전 고인돌군, 화순 사수리 대전 지석묘군&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전라남도 화순군 사평면 사수리 산15-1 일원&lt;br /&gt;
| 성격=고인돌&lt;br /&gt;
| 키워드=[[고인돌]], [[자루 간 돌검]], [[삼각 돌칼]], [[슴베 간 돌살촉]], [[돌도끼]], [[갈돌]], [[민무늬 토기]], [[부장품]]&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신경숙&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전라남도 화순군 사평면 사수리 산15-1 일원에 위치한다. 주암댐 수몰 지역에 포함되어 1987~1989년에 충북대학교박물관에서 3차에 걸쳐 발굴 조사하였다. 지표 조사에서 확인된 [[고인돌|고인돌]] 24기 가운데 발굴 조사에서는 13기와 추가 확인된 고인돌 3기, [[덮개돌|덮개돌(上石)]]이 없이 [[무덤방|무덤방(墓室)]]만 있는 것 5기 등 모두 21기와 그 밖에 구석기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보성강의 지류인 동복천 하상과 30m 높이 차이를 이루는 산사면 구릉의 정상부에 구릉 방향으로 고인돌이 군집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고인돌 덮개돌의 크기는 1~2m가 많고, 길이에 비해 두께가 두꺼운 편이다. 형식은 [[기반식고인돌|바둑판식(碁盤式)]]과 [[개석식고인돌|덮개식(蓋石式)]]이 함께 있지만 덮개식이 더 많다. 무덤방의 방향은 대체로 강물의 흐름과 나란한 것이 많으며, 지상식 3기와 지하식 13기가 있다. 무덤방은 강돌(川石)과 깬돌(割石)을 이용하여 축조한 돌덧널형(石槨形)이다. 무덤방의 [[뚜껑돌|뚜껑돌(蓋石)]]이 있는 27호는 겹뚜껑돌(二重蓋石)이다. 바닥은 길죽한 깬돌을 부분적으로 깐 것, 강돌을 깐 것, 붉은색 맨땅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있다. 23호의 덮개돌은 길이 1.8m, 너비 1.4m, 두께 0.9m이며 무덤방은 길이 1.6m, 너비 0.5m, 두께 0.35m이다. 벽석은 매우 작고 납작한 강돌을 이용하여 축조하고 바닥은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27호는 덮개돌 없는 무덤방으로 판돌(板石) 8매를 이용하여 두 겹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무덤방은 길이 1.7m, 너비 0.4m, 두께 0.25m로 벽석은 강돌로 세워 축조하고 머리 쪽으로 추정되는 곳에 길이 0.65m, 너비 0.4m의 판돌 1매를 놓았다. 유적 내 무덤방에서는 베개돌(頭枕石)로 추정되는 판돌이 1매가 놓여져 있는 예가 확인되는데, 피장자의 머리 방향은 강물의 흐름과 나란한 것과 직교하는 것이 있다.&lt;br /&gt;
&lt;br /&gt;
출토 유물은 [[자루간돌검|자루 간 돌검(有柄式磨製石劍)]], [[삼각돌칼|삼각 돌칼]], [[슴베간돌살촉|슴베 간 돌살촉(有莖式磨製石鏃)]], [[돌도끼|돌도끼(石斧)]] 편, [[갈돌|갈돌(耉石棒)]] 편 등의 석기류와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가 있다. 또한 23호에서는 사람의 얼굴을 상징하는 눈돌과 [[옥천석탄리고인돌|옥천 석탄리 고인돌]] 출토품과 유사한 ‘X’자 모양이 새겨진 판돌이 출토되었다. 이 고인돌군은 발견된 무덤방 수에 비해 [[부장품|부장품]]이 빈약한 점에서 인근의 보성 덕치리나 죽산리와는 다른 면을 보인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500px&amp;gt;&lt;br /&gt;
File:화순_사수리_대전_고인돌군_유구_배치도.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1985년 4월 30일~1985년 12월 31일 || 주암댐 수몰지역 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Ⅳ)-사수리 대전 고인돌- || 1988 || 전남대학교박물관&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전남대학교박물관. (1988). &amp;lt;i&amp;gt;주암댐 수몰지역 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Ⅳ)-사수리 대전 고인돌-&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280756&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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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DISPLAYTITLE:사곡리 유적(晋州 沙谷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사곡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진주 사곡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 1845-7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돌널무덤]], [[돌뚜껑움무덤]], [[집자리]], [[구덩이]], [[가락바퀴]], [[돌도끼]], [[돌대팻날]], [[통자루 간 돌검]], [[슴베 간 돌살촉]], [[골아가리 토기]], [[달도끼]], [[민무늬 토기]], [[간 돌살촉]], [[대롱옥]], [[붉은 간 토기]]&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송영진&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 1845-7 일원에 위치한다. 진주 사봉 지방 산업 단지 조성에 앞서 2007~2008년, 2010·2012·2013년 3차례 조사되었다. 1차 조사에서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3기, [[돌뚜껑움무덤|돌뚜껑움무덤(石蓋土壙墓)]] 1기, 2차 조사에서는 [[집자리|집자리]] 2기, 돌널무덤 2기, 3차 조사에서 집자리 18기와 돌널무덤 17기, [[구덩이|구덩이]] 20기가 확인되었다. 유적은 반성천으로 유입되는 대천(大川)의 남쪽 구릉 경사면과 골짜기에 위치한다.&lt;br /&gt;
&lt;br /&gt;
1차 조사에서 확인된 돌널무덤은 여러 매의 판돌(板石)을 이용하여 ‘ㅍ’자 모양으로 축조하였다. 2호는 벽석 바깥에 넓은 판돌을 평평하게 덧붙여 보강하였다. [[덮개돌|덮개돌(蓋石)]]은 1매만 확인되었다. 3호는 벽석과 [[묘광|무덤 구덩이(墓壙)]] 사이에 다량을 석재를 채워 보강하였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돌뚜껑움무덤은 1·2호 사이에 위치하며, 주변에서 [[가락바퀴|가락바퀴]]와 [[돌도끼|돌도끼(石斧)]] 등이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2차 조사의 1호 집자리는 원형으로 길이 5.1m이다. 내부에는 타원형 구덩이와 바깥쪽 양 측에 [[기둥구멍|기둥 구멍]]이 설치되었다. 유물은 가락바퀴, [[돌대팻날|돌대팻날(扁平片刃石斧)]] 등이 출토되었다. 2호는 1호 집자리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한쪽 벽에 치우쳐 2개의 기둥 구멍이 확인되었다. 집자리에서 동쪽으로 약 15m, 남동쪽으로 약 20m 떨어져 돌널무덤이 위치한다. 축조 방식은 1차 조사에서 확인된 돌널무덤과 동일하다. 돌널무덤 2호의 바닥에서 [[통자루간돌검|통자루 간 돌검(一段柄式磨製石劍)]], [[슴베간돌살촉|슴베 간 돌살촉(一段莖式磨製石鏃)]]이 각 1점씩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3차 조사에서는 구릉 정상부와 경사면을 따라 다량의 유구가 분포한다. 집자리는 경사면에 축조되어 훼손된 상태이다. 집자리는 장방형(1·2·4·11호), 방형(3·7·13·16호), 원형(5·6·8~10·12·14·15·17·18호)으로 구분된다. 1호에서는 굽다리(臺却), [[골아가리토기|골아가리 토기(口脣刻目土器)]], 11호는 [[달도끼|달도끼(環狀石斧)]]가 출토되었다. 집자리는 형태와 유물을 통해 장방형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역삼동유형|역삼동]]·[[흔암리유형|흔암리식]] 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방형, 원형 집자리는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와 바깥 양 측에 기둥 구멍이 설치되었다. 16호 상부에서 [[겹아가리짧은빗금골아가리구멍무늬토기|겹아가리 짧은 빗금 골아가리 구멍무늬 토기(二重口緣短斜線口脣刻目孔列文土器)]]가 수습되었고, 이를 제외하면 대부분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이다. 원형 집자리에서는 민무늬 토기 편과 [[숫돌|숫돌]]이 출토되었다. 구덩이는 대부분 장방형이며, 원형도 일부 확인된다. 유물은 민무늬 토기 편, 골아가리 토기 편, 돌도끼, 숫돌, 미완성 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무덤은 구릉 정상부에 2기와 남서쪽 경사면에 다수 분포한다. 모두 돌널무덤으로 1매 또는 여러 매의 판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무덤 중 4·8·11·14·15호는 길이가 1m 내외로 소형이다. 2호에서는 옆으로 누워 팔과 다리를 접은 사람뼈가 확인되었다. 유물은 5호 집자리에서 길이 36.4㎝의 [[통자루간돌검|통자루 간 돌검]], 7호 무덤에서는 [[간돌살촉|간 돌살촉]]이 2점 출토되었다. 12호 무덤에서는 [[대롱옥|대롱옥(管玉)]]이 1점, 14호 무덤에서는 돌널 바깥쪽 별도의 공간에서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1점, 16호 무덤에서는 동쪽 벽가에서 붉은 간 토기 1점, 남쪽 벽 중앙에서 통자루 간 돌검 1점과 간 돌살촉 1점이 각각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유적의 시기는 역삼동·흔암리식 단계부터 송국리 단계까지 비교적 장기간 지속된 것으로 판단된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50px&amp;gt;&lt;br /&gt;
File:진주_사곡리_유적_III차_전경.jpg&lt;br /&gt;
File:진주_사곡리_유적_III차_집자리와_돌널무덤.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600px&amp;gt;&lt;br /&gt;
File:진주_사곡리_유적_III차_유구_배치도.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1차 시굴조사 || 2011년 9월 29일~2012년 9월 28일 || 진주 사곡리유적Ⅲ || 2017 || 동서문물연구원&lt;br /&gt;
|-&lt;br /&gt;
| 2차 시굴조사 || 2013년 3월 6일~2013년 4월 8일 || 진주 사곡리유적Ⅲ || 2017 || 동서문물연구원&lt;br /&gt;
|-&lt;br /&gt;
| 1차 발굴조사 || 2012년 3월 5일~2012년 9월 20일 || 진주 사곡리유적Ⅲ || 2017 || 동서문물연구원&lt;br /&gt;
|-&lt;br /&gt;
| 2차 발굴조사 || 2013년 3월 6일~2013년 3월 8일 || 진주 사곡리유적Ⅲ || 2017 || 동서문물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동서문물연구원. (2010). &amp;lt;i&amp;gt;진주 사곡리유적Ⅰ&amp;lt;/i&amp;gt;.&lt;br /&gt;
* 동서문물연구원. (2013). &amp;lt;i&amp;gt;진주 사곡리유적Ⅱ&amp;lt;/i&amp;gt;.&lt;br /&gt;
* 울산문화재연구원. (2017). &amp;lt;i&amp;gt;진주 사곡리유적Ⅲ&amp;lt;/i&amp;gt;.&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62&amp;diff=27127</id>
		<title>600-1262</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62&amp;diff=27127"/>
		<updated>2026-05-06T01:54: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빛가람동 유적(羅州 빛가람洞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빛가람동 유적&lt;br /&gt;
| 이칭별칭=나주 빛가람동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전라남도 나주시 빛가람동 42-143·273·310·330·348-4·814·900-66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구덩이]], [[화덕 자리]], [[저장 구덩이]], [[골아가리 토기]], [[민무늬 토기]], [[그물추]], [[돌살촉]], [[돌칼]], [[가락바퀴]], [[돌도끼]], [[돌검]], [[격지]], [[숫돌]], [[돌끌]], [[달도끼]], [[갈판]]&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박수진&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전라남도 나주시 빛가람동 42-143·273·310·330·348-4·814·900-66 일원에 위치한다. 빛가람동은 나주시 금천면 광암리·동악리·석전리·월산리 일부와 산포면 매성리·송림리·신도리 일부를 편입하여 설치된 동이다. 광주·전남 공동 혁신도시 건설 부지에 포함되어 2010~2011년에 조사가 진행되었다. 여러 유적 가운데 매성이 저성·신도리 완도촌·도민동Ⅰ·도민동Ⅱ·신평Ⅰ·신평Ⅱ·상야 등에서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집자리|집자리]] 43기, [[구덩이|구덩이]] 5기 등이 확인되었다. 유적은 대체로 해발 50m 이하의 충적지와 구릉지에 해당하며 북쪽과 동쪽으로는 지석천의 지류인 산포천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영산강의 지류인 영산천이 흐른다.&lt;br /&gt;
&lt;br /&gt;
&#039;&#039;&#039;매성리 저성 유적&#039;&#039;&#039;(빛가람동 42-143 일원)은 빛가람동 북쪽 경계에 위치한다. 3개 지구로 구분되며 청동기 시대 유구는 집자리 3기, 구덩이 2기 등이 조사되었다. 1지구 집자리는 해발 34m의 구릉 정상부에서 위치한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고, 내부에서 [[화덕자리|화덕 자리]], [[벽도랑|벽 도랑(壁溝)]], [[저장구덩이|저장 구덩이]], [[기둥구멍|기둥 구멍]] 등이 확인되었다. 집자리 바닥과 퇴적토에서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토기|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 [[골아가리토기|골아가리 토기(口脣刻目土器)]],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편, [[그물추|그물추]], [[삼각오목돌살촉|삼각 오목 돌살촉(三角灣入石鏃)]], 석재 편 등이 출토되었다. 4호와 7호 구덩이에서는 민무늬 토기 편, 미완성 [[돌살촉|돌살촉]] 등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2지구 집자리는 해발 32m의 구릉 사면부 끝자락에 위치한다. 평면 형태는 말각 방형이며 내부에서 화덕 자리가 확인되었다. 집자리 바닥과 1·10호 구덩이에서 민무늬 토기 편과 [[돌칼|돌칼(石刀)]], 돌살촉(石鏃) 등이 출토되었다. 3지구 집자리는 해발 28.5m의 구릉 사면 끝 자락에 위치한다. 평면 형태는 말각 방형이며 내부에서 타원형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집자리 바닥과 퇴적토에서 골아가리 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 토기(口脣刻目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 편, [[짧은빗금무늬토기|짧은 빗금무늬 토기(短斜線文土器)]] 편, 민무늬 토기 편, 석재편, 미완성 석기 편 등이 출토되었다. 저성 유적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지구 장방형 집자리들은 2750±50 BP(보정 연대 기원전 885년), 2920±50 BP(보정 연대 기원전 1130년)로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인 기원전 10~9세기, 타원형 구덩이가 설치된 3지구 1호 집자리에서는 2380±60 BP(보정 연대 기원전 465년)의 값이 측정되어 송국리 문화 단계인 기원전 5~4세기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도민동 유적(빛가람동 273·310 일원)은 도민동 유적Ⅰ(4구역)에서 집자리 6기, 도민동 유적Ⅱ(2구역)에서 집자리 24기가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039;&#039;&#039;도민동 유적Ⅰ&#039;&#039;&#039;(빛가람동 310 일원)은 해발 25~40m의 구릉이 발달한 지역으로 구릉 사이에는 곡간지가 형성되어 있다. 조사 지역은 4개 지구(1·2·3·4지구)로 구분하였고, 이를 다시 A·B·C지구로 세분하였기 때문에 총 13개 지구로 구분된다. 청동기 시대 집자리는 1A지구와 2A·B지구에서 6기가 확인되었는데, 모두 바닥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와 기둥 구멍이 설치된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 집자리]]다.&lt;br /&gt;
&lt;br /&gt;
1A지구는 해발 22~31m 구릉의 남쪽 말단부에 해당한다. 집자리 5기는 해발 30~31m의 구릉 상부에 위치하는데, 윗면이 대부분 깎여 나가 바닥만 남아 있거나 절반 정도 파괴된 상태이다. 평면 형태는 타원형과 말각 방형이고 장축 방향은 등고선과 나란하다. 내부 시설로는 타원형 구덩이와 기둥 구멍이 확인된다. 타원형 구덩이의 양 끝에는 기둥 구멍이 각각 1개씩 파져 있다. 4호 집자리는 남서쪽 바깥 도랑(外部溝)이 있다. 5호 집자리는 벽 가 도랑과 작은 기둥 구멍이 있다. 벽 도랑은 집자리 북서쪽 짧은 벽 쪽에만 설치되어 있으며 남서쪽 끝 부분에 있는 작은 기둥 구멍과 연결되어 있다. 집자리 바닥이나 타원형 구덩이 내부에서 토기류와 석기류가 출토되었다. 토기는 집자리 바닥이나 벽 아래에서 출토되었는데, 주로 민무늬 토기 편들이다. 석기는 타원형 구덩이 바닥이나 구덩이 주변에서 주로 확인되는데, [[가락바퀴|가락바퀴]], 돌살촉, [[돌도끼|돌도끼]], [[돌검|돌검]] 편, [[망치돌|망치돌]], 석재, 미상 석기 등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2지구는 도민동 마을의 서쪽과 북쪽에 있는 해발 40m 정도의 구릉에 위치한다. 28호 집자리는 조사 지역의 동쪽 사면에 위치하며 평면 형태는 방형계이고, 장축 방향은 남북으로 등고선과 나란하다. 내부 시설로는 바닥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가 설치되어 있다. 미완성 석기와 석재 [[격지|격지(剝片)]]가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039;&#039;&#039;도민동 유적Ⅱ&#039;&#039;&#039;(빛가람동 273 일원)은 경사가 완만한 해발 20~40m정도의 구릉 지역이다. 집자리들은 해발 39~40m의 북서쪽 구릉 정상부와 해발 37~39m의 남서쪽 구릉 사면부에서 24기가 조사되었다. 평면 형태는 원형, 방형, 말각 방형으로, 형태를 알 수 없는 6기를 제외한 나머지 18기는 원형 4기, 방형 1기, 말각 방형 13기이다. 내부 시설로는 타원형 구덩이, 화덕 자리, 벽 도랑(壁溝), 배수구, 기둥 구멍, 저장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타원형 구덩이와 그 주변에서 [[숫돌|숫돌(砥石)]]과 다량의 석기 격지(剝片)들이 출토되어 타원형 구덩이 주변에서 석기 제작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23호 집자리는 벽 가의 도랑이 타원형 구덩이로 연결되어 있어 물을 모으기 위한 집수구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타원형 구덩이의 장축 방향은 대부분 집자리의 장축과 같다. 화덕 자리는 21호 집자리의 바닥 중앙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쳐 확인되었다. 별다른 시설없이 바닥을 파내어 사용한 무시설식으로 바닥이 불에 타 단단하게 소결(燒結)되었다. 벽 도랑은 15호와 23호 집자리에서 확인되었다. 기둥 구멍은 지름 0.1~0.2m 정도로 집자리 바닥에 비슷한 크기의 기둥 구멍이 대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어 집자리에 세워졌던 보조 기둥 구멍들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은 토기류와 석기류로 구분된다. 토기는 대개 일부분만 남아있으며 대부분 민무늬 토기 편이다. 석기는 돌살촉, [[돌끌|돌끌(石鑿)]], 돌칼(石刀), [[달도끼|달도끼(環狀石斧]]), 숫돌, 망치돌, 그물추 등으로 다양하다. 돌살촉은 통슴베가 주를 이루며, 돌칼은 평면 반원형을 이루고 있다.&lt;br /&gt;
&lt;br /&gt;
도민동 유적Ⅱ-4·11·21호 집자리의 바닥에서 채취한 숯(木炭)의 방사성 탄소 연대가 기원전 10~5세기로, 도민동 유적Ⅰ-2지구 28호 집자리의 방사성 탄소 연대가 2420±50 BP로 측정되었으며, 대부분의 집자리들이 송국리식이라는 점에서 대부분 [[송국리문화|송국리 문화]] 단계에 해당한다. 그러나 도민동 유적Ⅱ-21호 집자리는 방형 집자리에 화덕이 설치되어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의 특징을 가진다.&lt;br /&gt;
&lt;br /&gt;
신도리 신평 유적(빛가람동 330-5·814 일원)은 Ⅰ·Ⅱ 유적으로 구분되며 집자리 7기가 조사되었다.&lt;br /&gt;
&lt;br /&gt;
&#039;&#039;&#039;신평 유적Ⅰ&#039;&#039;&#039;(빛가람동 330-5 일원)은 북쪽 구릉 및 남쪽에 형성된 곡간부, 동쪽 곡간부, 남쪽 구릉으로 구분되며 청동기 시대 집자리 5기가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구릉 정상부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1호 집자리는 해발 35.4m의 구릉 정상부에서 확인되었다. 평면 형태는 방형이며 장축 방향은 남북이다. 내부 시설로는 바닥 중앙에서 양쪽 끝에 기둥 구멍이 하나씩 파져 있는 타원형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돌살촉(石鏃), 미완성 돌살촉, 미완성 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2호 집자리는 해발 35.8m의 북서쪽 구릉 정상부에 단독으로 위치한다. 평면 형태는 방형이며, 장축 방향은 남북이다. 내부 시설로는 바닥 중앙에서 양쪽 끝에 기둥 구멍이 하나씩 파져 있는 타원형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민무늬 토기 바리, [[갈판|갈판(碾石)]], 미완성 돌살촉이 출토되었다. 3호 집자리는 북서쪽 구릉 정상부에서 위치한다. 경작으로 인해 삭평된 단애면에서 확인되어 집자리의 남벽이 모두 유실되었다. 평면 형태는 방형계로 추정되며 장축 방향은 동서이다. 내부 시설로는 타원형 구덩이와 기둥 구멍이 확인되었다. 미완성 석기, 미완성 돌살촉, 바리 편 등이 출토되었다. 4호 집자리는 해발 30.2m의 완만한 구릉 경사면에 단독으로 분포한다. 경사면 아래쪽은 유실되었다. 평면 형태는 방형계로 추정된다. 내부 시설로는 바닥 중앙에서 양쪽 끝에 기둥 구멍이 하나씩 파져 있는 타원형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바리, 돌살촉, 미완성 석기가 출토되었다. 5호 집자리는 남동쪽 구릉의 동쪽사면에서 확인되었다. 남벽 쪽이 삭평되어 절반 정도만 남아 있다. 평면 형태는 방형계로 추정되며, 장축 방향은 동서이다. 내부 시설로는 타원형 구덩이와 기둥 구멍이 확인된다. 미완성 석기, 용도미상 석기, 민무늬 토기 바닥 편 등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039;&#039;&#039;신평 유적Ⅱ&#039;&#039;&#039;(빛가람동 814 일원)는 해발 22~40m 정도의 저평한 구릉이 발달한 지역이다. 발굴 조사는 A·B·C지구로 나누어서 실시하였으며 청동기 시대 집자리 2기가 조사되었다. 집자리는 A지구 10호와 11호 집자리로, 해발 32.3~32.4m의 서쪽 구릉 정상부 10m 간격을 두고 분포한다. 상부는 대부분 삭평되었으며 평면 형태는 말각 방형이고, 장축 방향은 남북이어서 등고선과 나란하다. 크기는 길이 3.58~3.6m, 너비 3.18~3.42m, 남은 깊이 0.1~0.2m이다. 내부 시설로는 바닥 중앙에서 양 쪽 끝에 기둥 구멍이 파져 있는 타원형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민무늬 토기와 숫돌(砥石)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상야 유적(빛가람동 348-4일원)에서는 해발 31m의 구릉 정상부에서 구덩이 1기가 확인되었다. 길이 2.4m, 너비 1.5m, 깊이 0.07m이며, 민무늬 토기 편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빛가람동 유적은 도민동·신평·저성 유적을 포함하는 넓은 범위의 유적으로 집자리의 방사성 탄소 연대, 집자리 구조, 출토 유물 특징 등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부터 송국리 문화 단계까지 이어지며 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나주_빛가람동_유적(도민동_유적)_2구역_전경.jpg&lt;br /&gt;
File:나주_빛가람동_유적(도민동_유적)_출토_유물.jpg&lt;br /&gt;
File:나주_빛가람동_유적(매성리_저성_유적)_1지구_1호_집자리.jpg&lt;br /&gt;
File:나주_빛가람동_유적(매성리_저성_유적)_집자리_출토_석기류.jpg&lt;br /&gt;
File:나주_빛가람동_유적(신도리_신평_유적)_1호_집자리.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800px&amp;gt;&lt;br /&gt;
File:나주_빛가람동_유적(도민동_유적)_12호_집자리.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10년~2011년 || 나주 도민동·상야유적 || 2012 || 전남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대한문화재연구원. (2013). &amp;lt;i&amp;gt;나주 신도리 신평유적 Ⅰ지구&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3251260&lt;br /&gt;
* 동북아지석묘연구소. (2012). &amp;lt;i&amp;gt;나주 매성리 저성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2952897&lt;br /&gt;
* 마한문화연구원. (2014). &amp;lt;i&amp;gt;나주 신도리 도민동Ⅰ·신평Ⅱ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3538172&lt;br /&gt;
* 전남문화재연구원. (2012). &amp;lt;i&amp;gt;나주 도민동·상야유적&amp;lt;/i&amp;gt;.&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40&amp;diff=27126</id>
		<title>600-1240</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40&amp;diff=27126"/>
		<updated>2026-05-06T01:49: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북평리·범부리 유적[襄陽 北坪里·凡阜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북평리·범부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양양 북평리·범부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 북평리 산24-1 및 범부리 산22-1 일원&lt;br /&gt;
| 성격=집자리&lt;br /&gt;
| 키워드=[[집자리]], [[화덕 자리]], [[구덩식 화덕 자리]], [[민무늬 토기]], [[덧띠토기]], [[돌살촉]], [[칼자루 끝 장식]], [[둥근 덧띠 토기]]&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박영구&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 북평리 산24-1 및 범부리 산22-1 일원에 위치한다. 양양 주문진~속초 고속 국도 공사를 위한 발굴 조사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으며, 북평리 [[집자리|집자리]] 3기, 범부리에서 집자리 1기 등 총 4기의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유적은 남쪽의 남대천과 북쪽의 후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들어 합류되는 지점 중간부에 위치하는 해발 60m 내외의 구릉에 입지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양양북평리집자리|북평리 집자리]] 3기는 해발 55m 내외의 구릉 정상부에 열상으로 위치하며, [[양양범부리집자리|범부리 집자리]] 1기는 해발 60m 내외의 서쪽으로 뻗은 가지 능선의 말단부에 위치한다.&lt;br /&gt;
&lt;br /&gt;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북평리의 경우, 장방형 2기, 방형 1기이고 범부리는 장방형이 1기이다. 북평리 집자리의 바닥 시설은 점토를 다지거나 정지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생토를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범부리 집자리는 중심부에서 동쪽 짧은 벽까지 적갈색의 점토를 얇게 다진 것이 확인되었다. [[화덕자리|화덕 자리]]는 범부리에서만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 화덕 자리(竪穴式爐址)]]가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편, [[덧띠토기|덧띠 토기(粘土帶土器)]] 편, [[돌살촉|돌살촉(石鏃)]], [[칼자루끝장식|칼자루 끝 장식(劍把頭飾)]]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북평리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는 2483±21~2502±20 BP로 측정되어, 영동 지역 [[둥근덧띠토기|둥근 덧띠 토기(圓形粘土帶土器)]] 단계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판단된다.&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지표조사 || 2002년 || 동해고속도로(주문진-속초간) 건설사업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 2002 || 강릉대학교 박물관&lt;br /&gt;
|-&lt;br /&gt;
| 표본조사 || 2009년 9월 21일 ~ 2009년 10월 20일 || 양양 북평리·범부리유적 || 2012 || 예맥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9년 12월 23일 ~ 2010년 3월 5일 || 양양 북평리·범부리유적 || 2012 || 예맥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예맥문화재연구원. (2012). &amp;lt;i&amp;gt;양양 북평리·범부리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2952213&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38&amp;diff=27125</id>
		<title>600-1238</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38&amp;diff=27125"/>
		<updated>2026-05-06T01:49: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조사정보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북촌리 유적(咸安 北村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북촌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함안 북촌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북촌리 957-37 일원&lt;br /&gt;
| 성격=고분&lt;br /&gt;
| 키워드=[[돌널무덤]], [[붉은 간 토기]], [[바리 토기]], [[통자루 간 돌검]], [[간 돌살촉]]&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김재윤&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북촌리 957-37 일원에 위치한다. 함안 종합 정비 사업에 앞서 2016년 조사하여,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7기를 확인하였다. 유적은 하천 변 배후습지에 발달한 충적 평야에 입지하며, 하천의 상류와 중류 사이에 위치한다.&lt;br /&gt;
&lt;br /&gt;
돌널무덤은 함안천과 같은 방향으로 남북으로 열상 분포하며, 3~4기로 구분되어 배치되어 위치한다. 묘역석(墓域石)이나 [[덮개돌|덮개돌(上石)]]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북촌리 1호’ [[고인돌|고인돌]]의 덮개돌이 원래 위치에서 벗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1호 혹은 2호 돌널무덤의 덮개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뚜껑돌|뚜껑돌(蓋石)]]은 2기에서만 확인되었는데, 후대 훼손으로 상태가 좋지 않다. 돌널은 판돌(板石), 강돌(川石), 깬돌(割石) 등을 이용해서 다양하게 만들었다. 크게 짧은 벽과 긴 벽의 모서리가 서로 맞물린 ‘ㅁ’자 모양과 짧은 벽을 긴 벽과 모서리가 맞물리지 않게 만든 ‘ㅍ’자 모양으로 구분된다. 판돌을 쌓는 방법에 따라서는 긴 벽은 판돌 여러 매를 눕혀서 쌓고 짧은 벽은 판돌 1매를 세우는 방법, 긴 벽과 짧은 벽에 판돌을 세운 방법, 강돌을 웁혀 쌓고 짧은 벽은 판돌을 세우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바닥은 판돌을 깐 것, 바닥을 정지하여 흙을 깐 것, 아무 시설을 하지 않은 것으로 구분된다. 유물은 1호에서는 출토되지 않았고, 다른 무덤에서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바리모양토기|바리 토기(鉢形土器)]], [[통자루간돌검|통자루 간 돌검(一段柄式磨製石劍)]], [[간돌살촉|간 돌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유적의 시기는 유물을 통해 [[송국리단계|송국리 단계]]로 판단된다.&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표본조사 || 2015년 9월 16일 || 함안 북촌리 유적 || 2018 ||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16년 5월 9일~2016년 6월 10일 || 함안 북촌리 유적 || 2018 ||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18). &amp;lt;i&amp;gt;함안 북촌리 유적&amp;lt;/i&amp;gt;.&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28&amp;diff=27124</id>
		<title>600-1228</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28&amp;diff=27124"/>
		<updated>2026-05-06T01:48: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부장리 유적(瑞山 富長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부장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서산 부장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 219-10&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구덩이]], [[분구무덤]], [[돌덧널무덤]], [[역삼동 유형]], [[휴암리 유형]], [[송국리 유형]], [[송국리식 집자리]]&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이창호&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사적.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 219-10에 위치한다. 음암 임대아파트 신축 공사에 앞서 2004~2005년까지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 [[집자리|집자리]] 31기, [[구덩이|구덩이]] 8기와 백제 시대 집자리 44기, 구덩이 15기, [[분구묘|분구무덤(墳丘墓)]] 13기, [[돌덧널무덤|돌덧널무덤(石槨墓)]] 3기 등 모두 243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백제 시대 분구 무덤의 중요성으로 인해 사적으로 지정되어 현재 사적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조사 지역은 서산시의 동북쪽으로 약 6.5㎞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는데, 지형상으로는 서산시의 동쪽 외곽에 남북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는 가야산 줄기의 서쪽에 해당한다. 유적은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흘러내린 가지 능선의 정상부에 자리한다. 유적 주변으로는 해발 35~55m 정도의 저구릉성 산지와 평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으며, 덕수천과 대교천이 인접하여 흐르고 있다. 유구는 모두 구릉의 능선부를 중심으로 분포한다.&lt;br /&gt;
&lt;br /&gt;
집자리는 모두 31기로, Ⅰ지역에서 22기, Ⅱ지역에서 9기가 조사되었다. 평면 형태에 따라 세장방형, (말각) 장방형, (말각) 방형, 원형으로 구분된다. 방형계는 세장방형 4기, 장방형 17기, 방형 7기로 장방형이 대다수를 차지한다.&lt;br /&gt;
&lt;br /&gt;
(세)장방형 집자리는 ‘[[역삼동유형|역삼동 유형]]’에 해당하며, Ⅰ·Ⅱ지역 각 2기씩 조사되었다. 이 중 Ⅰ지역 51호는 대형으로 유적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내부 시설로는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 화덕 자리(土壙式爐址)]], [[저장구덩이|저장 구덩이]], 내부 구덩이 등이 확인된다. Ⅱ지역 4호는 [[기둥구멍|기둥 구멍]]만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장방형 집자리 가운데 역삼동 유형으로 구분되는 것은 모두 10기로 내부에서 [[화덕자리|화덕 자리]]가 조사되었다. 기본적인 구조는 세장방형 집자리와 유사하다. 화덕 자리가 확인되지 않은 집자리는 대부분 저장 구덩이와 기둥 구멍, 보조 기둥 구멍이 다수 발견된다. 장방형 집자리의 대부분이 화재로 인해 폐기되었고, 불탄 기둥과 함께 당시의 유물들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집자리의 구조와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lt;br /&gt;
&lt;br /&gt;
방형 집자리는 화덕 자리가 있는 ‘역삼동 유형’과 타원형 구덩이가 있는 ‘[[휴암리유형|휴암리]]·[[송국리유형|송국리 유형]]’으로 구분된다. ‘역삼동 유형’은 Ⅱ지역 2호로, 구덩식 화덕 자리 2기와 저장 구덩이가 확인된다. 나머지 집자리는 바닥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가 시설되어 있다. Ⅰ지역 48호는 타원형 구덩이와 연결된 [[구|도랑(溝)]] 시설이 확인된다. 타원형 구덩이는 양 끝 단에 기둥 구멍이 시설된 형태이다. 54호의 타원형 구덩이는 구덩이 외부에 기둥 구멍이 자리한 형태이다. 집자리 내부에서는 [[돌도끼|돌도끼]], [[돌끌|돌끌]], [[돌살촉|돌살촉]] 등 석기가 비교적 다량으로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평면 원형 집자리는 Ⅰ지역에서만 3기가 조사되었다. 4호는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으로, 5호 장방형 집자리와 중복 관계이며 집자리의 동편 바닥면에서 목탄 및 불탄 흙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화재로 폐기된 것으로 판단된다.&lt;br /&gt;
&lt;br /&gt;
출토 유물은 [[구멍무늬토기|구멍무늬 토기(孔列土器)]], [[골아가리토기|골아가리 토기(口脣刻目土器)]], 겹아가리 짧은 빗금무늬(二重口緣短斜線文)+골아가리 구멍무늬(口脣刻目孔列文) 토기 등 다양한 문양 조합을 보이는 토기류가 있다. 기종으로는 [[깊은바리모양토기|깊은 바리 토기(深鉢形土器)]], [[호형토기|배부른 단지(壺形土器)]], [[바리모양토기|바리 토기(鉢形土器)]] 등이 기본을 이루며 이외에도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와 함께 특징적인 [[검은간토기|검은 간 토기(黑色磨硏土器)]]가 있다. 이와 조합된 석기류는 [[턱슴베돌살촉|턱 슴베 돌살촉(二段莖式石鏃)]], [[통슴베돌살촉|통슴베 돌살촉(一段莖式石鏃)]], [[돌창|돌창(石槍)]], [[양날돌도끼|양날 돌도끼(兩刃石斧)]], [[반달돌칼|반달 돌칼]] 등이 있다. Ⅰ지역 집자리에서 미완성 석기와 함께 석재들이 다량 출토되고, 석기 가공구가 함께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활발한 석기 제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구덩이는 조사 지역 내 불규칙적으로 산포되어 있어 명확한 성격은 알 수 없다. 다만, 3·27·33·34호 구덩이의 경우 Ⅰ지역 34·46·47호 집자리와 인접하여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집자리의 부속 시설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서산_부장리_유적_I지역_42호_집자리.jpg&lt;br /&gt;
File:서산_부장리_유적_I지역_46호_집자리.jpg&lt;br /&gt;
File:서산_부장리_유적_I지역_48호_집자리.jpg&lt;br /&gt;
File:서산_부장리_유적_I지역_51호_집자리.jpg&lt;br /&gt;
File:서산_부장리_유적_출토_석기.jpg&lt;br /&gt;
File:서산_부장리_유적_출토_토기.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500px&amp;gt;&lt;br /&gt;
File:서산_부장리_유적_유구_배치도.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지정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구분 !! 지정 종목 !! 지정 명칭 !! 자세히 보기&lt;br /&gt;
|-&lt;br /&gt;
| 국가유산 || 사적 || 서산 부장리 고분군 (瑞山 富長里 古墳群) || &amp;lt;span class=&amp;quot;plainlinks&amp;quot;&amp;gt;[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333404750000 🔗]&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8). &amp;lt;i&amp;gt;서산 부장리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3530851&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26&amp;diff=27123</id>
		<title>600-1226</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26&amp;diff=27123"/>
		<updated>2026-05-06T01:47: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부용리·반월리 유적(金堤 芙容里·半月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부용리·반월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김제 부용리·반월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백구면 부용리 567-78·반월리 산21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도랑]], [[구덩이]], [[돌덧널무덤]], [[움무덤]], [[화덕 자리]], [[민무늬 토기]], [[송국리식 집자리]], [[덧띠 토기]], [[돌살촉]], [[송국리식 토기]]&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이민석&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백구면 부용리 567-78·반월리 산21 일원에 위치한다. 김제 공덕-전주 간 도로 공사 구간에 해당하여 1999년에 발굴 조사하였다. [[집자리|집자리]] 6기, [[구|도랑(溝)]] 5기, [[구덩이|구덩이]] 2기, [[돌덧널무덤|돌덧널무덤(石槨墓)]] 3기와 그밖에 고려~조선 시대의 [[움무덤|움무덤(土壙墓)]] 등이 확인되었다. 구릉 지대가 매우 발달한 곳으로 남쪽에 위치한 해발 61.1m 산을 중심으로 그 북쪽에 위치한다. 조사 구역의 동쪽부터 A·B·C·D지구와 월봉리 지구로 구분된다. 집자리는 B지구에서는 2기가 확인되었는데 구릉 지대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다. 거의 유실되어 전체적인 양상은 알 수 없다. 2기에서 [[화덕자리|화덕 자리]]가 일부 확인되었으며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편이 출토되었다. D지구에서는 구릉 지대의 정상부에서 2기, 완만한 지형인 서쪽 기슭 중단부에서 1기가 확인되었다. 가장 잘 남아 있는 D3호는 평면 형태 방형으로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와 그 양쪽에 기둥 구멍이 있는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으로 길이 4.36m, 너비 3.92m, 깊이 0.28m이다. 월봉리 지구의 집자리는 구릉 지대의 정상부에 위치한다. 남쪽벽에는 직선으로 출입 시설이 마련되었으며, 그 경계 부분과 가장 자리 부분에서 3기의 기둥 구멍이 확인되었다. 지름 3.41m, 깊이 0.33m이며, 출입 시설은 길이 2.46m, 너비 1.26m이다.&lt;br /&gt;
&lt;br /&gt;
도랑은 생토면을 단면 ‘U’자 모양으로 파내어 조성된 것으로 등고선과 평행하게 장축 방향을 두는 것(B·D지구)과 산사면과 직교되게 동서로 장축 방향을 두는 것(C지구)으로 구분된다. B지구 도랑은 길이 18m, 최대 너비 5.7m, 잔존 깊이 0.8m 내외이다. C지구 도랑은 길이 10.6m, 최대 너비 5.4m, 깊이 1m 내외이다. D지구 도랑은 길이 29.6m, 최대 너비 4.4m, 최대 깊이 0.85m이며 중앙부의 너비가 가장 넓다. 도랑에서는 [[굽다리토기|굽다리 토기(豆形土器)]] 편, [[덧띠토기|덧띠 토기(粘土帶土器)]] 편, 민무늬 토기 편, [[돌살촉|돌살촉(石鏃)]] 등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집자리 중 D3호는 송국리식이며 각 유적에서 확인된 민무늬 토기 편은 [[송국리식토기|송국리식 토기]]의 특징을 갖고 있다. 도랑은 출토 유물로 보아 원삼국 시대 이전에 조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단면 원형·삼각형의 덧띠 토기 편 및 굽다리 토기 편이 다량 출토되었는데, 기종이나 속성이 광주 신창동 저습지 유적의 출토품과 매우 흡사하다.&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1999년 10월 21일~2999년 12월 20일 || 김제 공덕-전주간 도로확·포장공사구간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 김제 석담리 || 2002 || 군산대학교박물관&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군산대학교박물관. (2002). &amp;lt;i&amp;gt;김제 석담리&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8606079&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20&amp;diff=27122</id>
		<title>600-122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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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1:46: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부송동 부평·석치고개 유적(益山 富松洞 富平·石峙고개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부송동 부평·석치고개 유적&lt;br /&gt;
| 이칭별칭=익산 부송동 부평·석치고개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부송동 산25-7(부평유적 Ⅰ구역)·산31-2(부평유적 Ⅱ구역)·133-3(석치고개) 일대&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구덩이]], [[움무덤]], [[토기 가마]], [[돌방무덤]], [[회덧널무덤]], [[송국리식 집자리]], [[바리 토기]], [[항아리 모양 토기]], [[민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돌살촉]], [[돌칼]], [[간 돌검]], [[돌끌]], [[숫돌]], [[홈자귀]]&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박서현&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부송동 산25-7(부평유적 Ⅰ구역)·산31-2(부평유적 Ⅱ구역)·133-3(석치고개) 일대에 위치한다. 유적은 부평 유적과 부송동 석치고개 유적으로 구분된다. 부평 Ⅰ~Ⅲ구역은 익산 부평선 도로 개설 공사 구간에 포함되어 2008년에 전북문화재연구원이, 석치고개 유적은 전북과학교육원 건설에 앞서 2014~2015년에 전라문화유산연구원이 발굴 조사하였다. 부송동 석치고개 유적과 부평 유적 Ⅱ지구는 300m 정도 떨어져 있으나 같은 구릉 안에 위치하고 있어, 원래는 동일 유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039;&#039;&#039;부송동 석치고개 유적&#039;&#039;&#039;에서는 구릉 정상과 사면에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집자리|집자리]] 9기, [[구덩이|구덩이]] 11기, [[도랑|도랑(溝)]] 2기와 함께 초기 철기 시대 [[움무덤|움무덤]] 4기, 원삼국~삼국 시대 집자리, [[기둥건물터|기둥 건물터]], [[구덩이|구덩이]], 도랑, [[토기가마|토기 가마(窯址),]] [[경작유구|경작 유구]], [[돌방무덤|돌방무덤]]과 조선 시대 움무덤과 [[회덧널무덤|회덧널무덤(石槨墓)]]이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청동기 시대 집자리는 구릉 정상부와 사면부에 위치하며, 후대 유구 혹은 청동기 시대 구덩이와 중복된 양상이 다수 확인된다. 집자리는 원형계와 방형계로 구분되며, 내부에 타원형 구덩이 또는 [[기둥구멍|기둥 구멍]]이 배치된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 집자리]]의 범주에 속한다. 집자리는 3개의 그룹으로 구분된다. 1그룹은 조사 구역 동쪽에 위치하며 집자리가 2기가 단독으로 입지한다. 집자리의 규모도 기타 집자리에 비해 크며, 내부에 타원형 구덩이를 중심으로 4개의 기둥 구멍이 배치된다. 2그룹은 중앙 사면에 입지하며 원형 및 방형계 집자리로 구성되었다. 3그룹은 2그룹의 북편에 위치하며 열상으로 배치되는 방형계 집자리로 타원형 구덩이 없이 기둥 구멍만 확인된다. 집자리의 규모가 기타 그룹에 비해 작으며, 출토 유물이 빈약해 원형 집자리와의 관계 및 기능을 추정하기 어렵다. 집자리의 내부 시설로는 [[벽도랑|벽 도랑]]과 도랑 시설, 벽 기둥 구멍 등이 있으나 일정한 규칙성이 확인되지 않는다. 집자리는 바닥은 주로 생토면을 이용하였으나, 일부 회백색 점토층으로 다졌으며, 이러한 바닥을 점토 다짐 처리한 집자리는 주로 각 그룹 내 규모가 큰 송국리식 집자리에서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구덩이는 집자리와 동떨어진 곳에 개별적으로 위치하거나 2~3기가 소군집을 이루며 배치되고 있다. 평면 형태는 원형계이며, 거의 바닥 부분만 남아 있으나 단면 형태는 ‘U’자 모양이 대부분이다. 규모는 가장 대형인 4호 구덩이가 길이 3.5m, 너비 3.87m이다. 구덩이는 주로 옥외에 저장과 관련된 시설로 판단되나 유적에서 확인된 구덩이는 잔존 깊이가 얕고, 저장과 관련하여 흔적이나 퇴적 양상도 확인되고 있지 않아 저장 시설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도랑은 2기가 확인되었으며, 모두 방향이 사면의 경사를 따라 위에서 남으로 이어져 있는데 깊이는 깊지 않다. 도랑 시설의 입지적 특성상 구릉 능선 및 사면부로부터 토사土砂나 유물이 쓸려가기 쉬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의도적으로 굴착하였다기 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얕은 구 안에 유물들이 집중적으로 퇴적된 것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유물은 [[바리모양토기|바리 토기(鉢形土器)]], [[항아리모양토기|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 등의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와 토제 [[그물추|그물추(魚網錘)]], [[돌살촉|돌살촉]], [[돌칼|돌칼(石刀)]], [[간돌검|간 돌검(石劍)]], [[돌끌|돌끌(石鑿)]], [[숫돌|숫돌(砥石)]], [[홈자귀|홈자귀(有溝石斧)]] 등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부송동 석치고개와 동일 유적으로 판단되는 &#039;&#039;&#039;부평 유적 Ⅱ지구&#039;&#039;&#039;를 살펴보면, 구릉 정상부와 사면부에 청동기 시대 집자리 3기와 삼국 시대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원형의 송국리식 집자리로, 규모는 2호 집자리가 길이 6.42m, 너비 6.34m로 가장 대형이다. 모두 타원형 구덩이 내부에서 기둥 구멍 2개가 배치되었으며, 2호 집자리에서는 기둥 구멍이 양 벽에 붙어 2개가 더 확인되었다. 바닥 시설을 주로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였다.&lt;br /&gt;
&lt;br /&gt;
그밖에 &#039;&#039;&#039;부평 유적Ⅰ지구&#039;&#039;&#039;는 해발 25m 정도의 구릉 정상부에 청동기 시대 집자리 5기와 구덩이(竪穴) 3기가 분포한다. 집자리는 모두 타원형 구덩이와 기둥 구멍(柱孔)이 배치된 송국리식 집자리로 유실되어 평면 형태를 알 수 없는 5호를 제외하고는 원형이다. 가장 크기가 큰 1호 집자리의 규모는 길이 5.9m, 너비 5.3m이다. 바닥은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회백색 점질토로 다졌다. 일부 집자리 안에서는 대형 구덩이가 확인된다. 이는 당시에 동시 사용되었기 보다는 퇴적상 이전에 사용하던 구덩이를 폐기한 후 집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반대되는 사례도 확인된다. 집자리 폐기 이후 구덩이를 축조하여 집자리 내부에 타원형 구덩이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일부 집자리도 중복되어 있지만 집자리의 규모, 타원형 구덩이의 장축 방향, 출토 유물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축조 시기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덩이는 집자리와 10m 정도 떨어진 곳에 군집하여 위치한다. 평면 형태는 원형계이며, 일부는 중복되었다. 부평 유적Ⅲ지구에서는 청동기 시대 유구가 확인되지 않는다.&lt;br /&gt;
&lt;br /&gt;
이상으로 부송동 석치고개 유적과 부평 유적의 연대는 석치고개 유적 1호 집자리 2440±30 BP, 2호 집자리 2760±40 BP, 9호 집자리 2660±30 BP, 8호 구덩이 2730±30 BP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치를 감안할 때, 기원전 8~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익산_부송동_부평_석치고개_유적(부평_유적)_I구역_전경.jpg&lt;br /&gt;
File:익산_부송동_부평_석치고개_유적(석치고개_유적)_7호_집자리.jpg&lt;br /&gt;
File:익산_부송동_부평_석치고개_유적(석치고개_유적)_8호_집자리.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14년 6월 25일~2014년 2014년 11월 20일 || 익산 부송동 석치고개유적 || 2017 || 전라문화유산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15년 4월 30일~2015년 8월 21일 || 익산 부송동 석치고개유적 || 2017 || 전라문화유산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전라문화유산연구원. (2017). &amp;lt;i&amp;gt;익산 부송동 석치고개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4843095&lt;br /&gt;
* 전북문화재연구원. (2010). &amp;lt;i&amp;gt;익산 부평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2704280&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12&amp;diff=27121</id>
		<title>600-121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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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1:45: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부근리 고인돌[江華 富近里支石墓]}}&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부근리 고인돌&lt;br /&gt;
| 이칭별칭=강화 부근리 고인돌, 강화 부근리 지석묘&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lt;br /&gt;
| 성격=고인돌&lt;br /&gt;
| 키워드=[[고인돌]], [[간 돌살촉]]&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구준모&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세계문화유산 강화 고인돌 유적. 사적 강화 부근리 지석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강화 부근리 고인돌군.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에 위치한다. 강화 고인돌 공원 재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 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은 고려산의 북편 구릉 끝 자락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곡부 충적지가 연접해 있고 하천이 흐르고 있다. 평지 하단은 간척 평야와 접해 있어 과거 간척 이전에는 바닷물이 고인돌 인접 지역까지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 구릉에는 인천광역시 기념물인 강화 부근리 고인돌군이 작은 군집을 이루어 분포하고 있다.&lt;br /&gt;
&lt;br /&gt;
[[고인돌|고인돌]]의 형태는 남한 최대 규모의 전형적인 탁자식(卓子式)으로 높이는 2.6m이다. 덮개돌(上石)의 장축(長軸)은 북동-남서 방향이며, 길이 6.5m, 너비 5.2m, 두께 1.2m로 화강암 재질이다. 2매의 긴 받침돌(支石)이 받치고 있으며 동쪽으로 30° 정도 기울어져 있는데 서쪽은 길이 4.5m, 너비 1.4m, 두께 0.6m, 동쪽은 길이 4.64m, 너비 1.4, 두께 0.8m이며 받침돌 간의 거리는 1.4m이다.&lt;br /&gt;
&lt;br /&gt;
사적 주변 일대는 형질 변경으로 인해 관련 청동기 시대 문화층은 남아 있지 않지만 상부 교란층에서 각종 석기류와 [[간돌살촉|간 돌살촉]] 2점 등이 출토되어 관련 유구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사적을 제외한 주변 부근리 320-1 일원에 보고된 3기의 추정 고인돌은 조사 결과 위치가 옮겨졌다는 점이 밝혀졌지만 여러 정황 상 현재 위치에 고인돌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된다.&lt;br /&gt;
&lt;br /&gt;
부근리 고인돌은 규모와 입지 면에서 주변 산지와 구릉에 분포하는 고인돌과 규모나 형태로 보았을 때 현저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어 강화도 북부 지역의 고인돌 축조 집단을 통합한 유력자의 무덤인 동시에 공동체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기념물적인 역할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6년 || 강화고인돌 공원 예정지 시굴 및 발굴조사보고서 || 2006 || 서울대학교박물관&lt;br /&gt;
|}&lt;br /&gt;
&lt;br /&gt;
==지정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구분 !! 지정 종목 !! 지정 명칭 !! 자세히 보기&lt;br /&gt;
|-&lt;br /&gt;
| 국가유산 || 사적 || 강화 부근리 지석묘 (江華 富近里 支石墓) || &amp;lt;span class=&amp;quot;plainlinks&amp;quot;&amp;gt;[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332301370000 🔗]&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 세계유산 || UNESCO 세계유산 ||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 &amp;lt;span class=&amp;quot;plainlinks&amp;quot;&amp;gt;[https://www.heritage.go.kr/heri/html/HtmlPage.do?pg=/unesco/Heritage/Heritage_07.jsp&amp;amp;pageNo=5_2_2_0 🔗]&amp;lt;/span&amp;gt;&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서울대학교박물관. (2006). &amp;lt;i&amp;gt;강화고인돌 공원 예정지 시굴 및 발굴보고서&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0852902&lt;br /&gt;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amp;lt;i&amp;gt;강화도 고인돌무덤(지석묘) 조사연구&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7482617&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05&amp;diff=27120</id>
		<title>600-1205</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205&amp;diff=27120"/>
		<updated>2026-05-06T01:44: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부곡동 고인돌[東海 釜谷洞支石墓]}}&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부곡동 고인돌&lt;br /&gt;
| 이칭별칭=동해 부곡동 고인돌, 동해 부곡동 지석묘&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부곡동&lt;br /&gt;
| 성격=고인돌&lt;br /&gt;
| 키워드=[[고인돌]], [[긴 배 모양 반달 돌칼]], [[간 돌검]], [[간 돌살촉]]&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서미정&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부곡동에 위치한다. [[고인돌|고인돌]]은 1972년과 1973년에 각각 1기씩 확인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부곡동 155-2에서 발견된 고인돌은 1973년 강릉대학교 교수 백홍기에 의해 조사되었으며 1982년 동해시청 동해시의회 앞으로 이전되었다가 2017년 구호동 239에 위치한 북평 제2공원으로 이전되었다. 묵호역에서 동해 고속 도로 진입로를 따라 서남 방향으로 약 1㎞ 거리에 있는 ‘도둑 고개’ 서쪽 구릉 위에 입지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고인돌은 남방식으로 [[덮개돌|덮개돌]]은 길이 1.76m, 너비 0.75m, 두께 0.4m이다. 하부 구조는 돌널형(石棺形)으로 남동벽은 확인되지 않았고, 북벽은 3개의 [[판돌|판돌(板石)]], 서벽은 1개의 판돌로 이루어졌다. [[무덤방|무덤방(墓室)]]은 길이 1.4m, 너비 0.42m, 높이 0.5m이고 장축 방향은 동서이다. 유물은 길이 18.5㎝, 너비 5.3㎝의 [[긴배모양반달돌칼|긴 배 모양(長舟形) 반달 돌칼]] 1점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한편 파괴되어 없어진 1기는 1972년 유물이 노출되면서 알려졌으나 정확한 출토 지점이나 상황은 알 수 없으며, 남호초등학교로 진입하는 갈림길의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남방식으로 [[덮개돌|덮개돌]]은 길이 1.87m, 너비 0.68m, 두께 0.4m이며, 하부 구조는 장방형의 [[돌널|돌널]]로 크기는 길이 1.41m, 너비 0.65m, 높이 0.4m이다. 출토 유물은 [[간돌검|간 돌검]] 1점, [[간돌살촉|간 돌살촉]] 2점이다. 간 돌검은 [[통자루식간돌검|통자루식(一段柄式)]]으로 [[검몸|검 몸(身部)]]에만 능(稜)이 섰으며, [[검끝|검 끝(鋒部)]]은 결실되었다. 잔존 길이 35.5㎝, 너비 5㎝이다. 간 돌살촉은 모두 [[슴베식간돌살촉|슴베식(有莖式)]]으로서 길이 6.8~8.9㎝이다.&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조사 || 1972년 ~ 1973년 || 강원도동해안지방의 지석묘 || 1982 || 백홍기&lt;br /&gt;
|-&lt;br /&gt;
| 조사 || 1995년 5월 22일 ~ 1996년 4월 3일 || 동해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 1996 || 관동대학교박물관&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관동대학교박물관. (1996). &amp;lt;i&amp;gt;동해시의 역사와 문화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9629719&lt;br /&gt;
* 한림대학교아시아문화연구소. (1986). &amp;lt;i&amp;gt;강원도의 선사문화&amp;lt;/i&amp;gt;. 한림대학교아시아문화연구소.  https://www.riss.kr/link?id=M3961263&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192&amp;diff=27119</id>
		<title>600-119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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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1:41: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봉성리 유적(咸安 鳳城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봉성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함안 봉성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봉성리 290, 703-2, 886-1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돌널무덤]], [[도랑]], [[구덩이]], [[기둥 구멍]], [[숫돌]], [[돌창]], [[부리형 석기]], [[부리형 토제품]], [[가지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홈자루 간 돌검]], [[마디 자루 간 돌검]], [[통자루 간 돌검]], [[슴베 간 돌살촉]], [[대롱옥]], [[환호 취락]]&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김재윤&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봉성리 290, 703-2, 886-1 일원에 위치한다. 가야-마산간 도로 확·포장 공사로 2003년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봉성리 703-2)가 조사하여 [[집자리|집자리]] 2기,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2기, [[구|도랑(溝)]] 1기, [[구덩이|구덩이]] 8기, [[기둥구멍|기둥 구멍]] 8기가 확인되었다. 이후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시설원예연구소 이전으로 2012~2013년 구역을 나누어 조사하였다(봉성리 290).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은 돌널무덤 28기, [[고인돌|고인돌]] 10기, 기호문화재연구원은 돌널무덤 8기를 확인하였다. 함안 다세대 주택 신축으로 2013년 우리문화재연구원이 봉성리 886-1 일원을 조사하여, 돌널무덤 3기를 확인하였다. 유적은 범람원상의 자연 제방대에 입지하며, 반경 400m 거리에 분포한다.&lt;br /&gt;
&lt;br /&gt;
집자리는 장방형과 원형으로 구분된다. 장방형에서는 석기 제작과 관련된 유물이 남동쪽 모서리의 구덩이에서 확인되었다. 구덩이 내부에 대형의 사암제 [[숫돌|숫돌]]이 확인되며, 석기를 갈 때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주변에서 이외의 석기는 출토되지 않지만, 북동쪽 모서리에서 [[돌창|돌창(石槍)]]이 확인되었다. 이외에 바리 모양 붉은 간 토기가 출토되었다. 2호 집자리는 내부에 별다른 시설이 없고, [[부리모양석기|부리형 석기]], [[부리형토제품|부리형 토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고인돌 중 8기는 [[덮개돌|덮개돌(上石)]]이 없고, [[받침돌|받침돌(支石)]]이 확인된다. 돌널무덤 중 [[뚜껑돌|뚜껑돌(蓋石)]]이 확인되는 것은, 1단 쌓은 것부터 2~4단 등 여러 단을 쌓아 올린 것이 확인된다. 돌널은 판돌(板石), 강돌(川石), 판돌과 강돌을 섞은 것 등 다양하며, [[묘광|무덤 구덩이(墓壙)]]의 형태에 따라서 긴 벽과 짧은 벽의 길이에 따라서 형태에 차이가 있다. 또한 무덤 모서리의 결구 형태 및 석재의 종류에 따라서 ‘ㅁ’, ’ㅍ’자 모양으로 구분된다. ‘ㅍ’자 모양은 판돌을 세워서 만든 것이고, ‘ㅁ’자 모양은 판돌 또는 강돌을 눕히거나 쌓았으며 짧은 벽 또는 긴 벽에 일부만 세우는 경우도 있다. 바닥돌(屍床石)이 있는 돌널무덤은 강돌을 깐 경우와 판돌을 사용 한 것이 있다. 바닥돌 위에 벽석을 축조한 것이 많으며, 그 아래는 정지토를 깐 것과 일부만 깐 것이 있다. 이외에 부장칸을 따로 설치한 무덤도 있다. 4호 무덤에서는 양쪽 긴 벽과 바닥돌 사이에 대칭으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확인되는데, 목재 등을 끼워 넣어 부장공간을 별도로 구획했을 가능성도 있다. 유물은 [[가지무늬토기|가지무늬 토기(彩文土器)]],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홈자루간돌검|홈 자루 간 돌검(二段柄式磨製石劍)]], [[마디자루간돌검|마디 자루 간 돌검(有節式磨製石劍)]], [[통자루간돌검|통자루 간 돌검(一段柄式磨製石劍)]], [[슴베간돌살촉|슴베 간 돌살촉(一段莖式石鏃石棺墓)]], [[대롱옥|대롱옥(管玉)]], [[반원판형장식옥|반원판형 장식옥]] 등이 출토되었다. 유적의 시기는 [[송국리단계|송국리 단계]]에 해당한다.&lt;br /&gt;
&lt;br /&gt;
유적에서 진동만까지는 15㎞ 거리이며, 이 사이에 [[환호취락|환호 취락]]과 대규모 묘역을 갖춘 고인돌 등이 조사된 진동 유적, 망곡리 유적 등이 위치한다. 또한 함안천을 따라 북쪽에는 북촌리 고인돌, 괴산리 고인돌 등이 확인된다. 즉, 유적은 함안에서 진동만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유적으로써, 해안에 인접한 송국리 단계의 거대한 환호 취락과 고인돌 유적이 복합된 특징을 보인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400px&amp;gt;&lt;br /&gt;
File:함안_봉성리_유적_32호_돌널무덤.jpg&lt;br /&gt;
File:함안_봉성리_유적_35호_돌널무덤.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시굴조사 || 2011년 11월 3일~2012년 2월 4일 || 함안 봉성리 청동기시대 무덤군 || 2014 ||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13년 5월 29일~2013년 6월 28일 || 함안 봉성리 청동기시대 무덤군 || 2014 ||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시굴조사 || 2011년 11월 3일~2012년 2월 4일 || 함안 봉성리 청동기시대 무덤군Ⅱ || 2015 ||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12년 3월 27일~2012년 8월 17일 || 함안 봉성리 청동기시대 무덤군Ⅱ || 2015 ||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05). &amp;lt;i&amp;gt;함안 봉성리 유적&amp;lt;/i&amp;gt;.&lt;br /&gt;
* 기호문화재연구원. (2015). &amp;lt;i&amp;gt;함안 봉성리 청동기시대 무덤군Ⅱ&amp;lt;/i&amp;gt;.&lt;br /&gt;
*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14). &amp;lt;i&amp;gt;함안 봉성리 청동기시대 무덤군&amp;lt;/i&amp;gt;.&lt;br /&gt;
* 우리문화재연구원. (2015). &amp;lt;i&amp;gt;함안 봉성리 886번지 유적&amp;lt;/i&amp;gt;.&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188&amp;diff=27118</id>
		<title>600-1188</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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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1:37: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봉산리 황산 유적(高敞 峰山里黃山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봉산리 황산 유적&lt;br /&gt;
| 이칭별칭=고창 봉산리 황산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수면 봉산리 1566 일대&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구덩이]], [[한뎃가마]], [[돌덧널무덤]], [[구하도]], [[외반 구연 항아리]], [[삼각 돌칼]], [[홈자귀]], [[송국리식 집자리]], [[송국리 유형]]&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김진&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수면 봉산리 1566 일대에 위치한다. 고창 일반 산업 단지 조성 사업에 앞서 2012년에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은 충적 대지의 옛 물길을 따라 입지하는데, 고수천을 중심으로 양쪽 기슭에 형성된 충적 대지와 그 뒤쪽의 구릉 지대에 걸쳐 위치한다. 이 일대는 낮은 구릉들과 소하천, 그리고 충적 대지가 발달되어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선호했던 자연·지리적 환경을 갖추고 있다. 발굴 조사 범위는 114,272㎡에 이르고, 지리적인 특성을 고려하여 총 5개 구역(1~5구역)으로 나누어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청동기~삼국 시대 마을과 더불어 조선 시대 [[회곽묘|회곽묘]] 등 다양한 유구들이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유구는 2구역과 3구역에서 [[집자리|집자리]] 87기, 폐기와 의례 관련 [[구덩이|구덩이]] 89기, 방형의 도랑(溝) 1기, 도랑 19기, 도로 유구 1개소와 무덤 유적인 [[돌덧널무덤|돌덧널무덤(石槨墓)]] 6기, [[구하도|구하도(舊河道)]] 1개소와 수로 1기·목재 저장 시설 1기 등이 조사되었다.&lt;br /&gt;
&lt;br /&gt;
집자리는 해발 33~35m의 충적 대지 일원에서 87기가 분포하는데, 모두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와 그 안쪽과 바깥쪽 양쪽으로 중심 기둥 구멍(柱穴)이 설치된 [[송국리식집자리|송국리식 집자리]]다. 평면 형태는 방형(23기), 말각 방형(29기), 원형(27기), 부정형(5기)으로 구분된다. 방형계의 비율이 원형계에 비해 높았으며, 평면 형태에 따라 분포 양상과 축조 시기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집자리의 평면 형태와 축조 위치의 관계를 살펴보면, 방형은 유적의 남동쪽과 남서쪽에 주로 축조되었고, 이후 말각 방형이 유적의 중앙부에 조성되었으며, 원형은 말각 방형과 동 시기나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축조되었다. 특히 말각 방형과 원형은 유적의 중앙부에 밀집 분포하는데, 동-서로 길게 조성된 9호 도랑(溝) 안쪽으로 축조되었다. 원형은 크기가 큰 44호·46호·47호를 중심으로 조밀하게 분포하며, 먼저 축조된 말각 방형을 파괴하고 축조되었다. 집자리는 대부분 단독으로 축조되었으나 일부 중복된 것도 있어 중복된 집자리의 관계와 평면 형태별 중복된 양상 등을 분석한 결과, 집자리는 방형, 말각 방형, 원형 순으로 축조되었다.&lt;br /&gt;
&lt;br /&gt;
집자리는 길이 3m이하의 소형(9기), 3.01~4m (43기)와 4.01~5m(20기)의 중형, 5.01m 이상(5기)의 대형으로 나뉜다. 중형이 총 63기로 가장 많고, 대형은 모두 평면 형태가 원형이며 타원형 구덩이 내 양쪽에 중심 기둥 구멍이 설치되고, 주변으로 4개의 기둥 구멍(柱孔)이 마련된 구조이다. 내부 시설은 타원형 구덩이와 중심 기둥 구멍, 내부 도랑, 벽 기둥 구멍(壁柱孔) 등이 있다. 먼저 타원형 구덩이와 중심 기둥 구멍의 결합양상을 살펴보면, 타원형 구덩이 내부 양쪽에 2개의 기둥 구멍이 있는 것과 타원형 구덩이 양쪽에 중심 기둥 구멍이 걸쳐 있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별도로 4개의 기둥 구멍을 설치한 것도 있다. 이외에도 타원형 구덩이만 확인되고 중심 기둥 구멍이 없는 경우, 집자리 중앙부에 양쪽에 중심 기둥 구멍을 두고 사이에 원형의 구덩이를 나란하게 배치한 경우, 타원형 구덩이 없이 중심 기둥 구멍 2개만 확인된 경우, 타원형 구덩이 없이 중심 기둥 구멍과 벽 기둥 구멍이 설치된 경우도 있다. 타원형 구덩이의 기능은 작업 구덩이, 집수구, 노지, 저장 구덩이, 보관구덩이 등으로 해석되는데, 본 유적에서는 타원형 구덩이 내부와 주변에서 [[석기|석기]]를 제작하거나 가공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들도 확인되었다. 특히 유적 내 동서 방향으로 길게 조성된 9호 도랑의 남쪽 구역을 중심으로 평면 형태가 방형인 집자리만 확인되는데, 이 중 49~53·66호 내부에서 석기 제작과 관련한 유물들이 다수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이외에도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빗물 등을 타원형 구덩이로 모으려는 도랑유인수로의 존재와 연관하여 집수(集水) 시설 및 [[화덕자리|화덕 자리]], 그리고 [[저장구덩이|저장 구덩이]]로서의 기능 혹은 임시적 수장收藏 구덩이 등 보관·보존의 성격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벽 기둥 구멍은 7호에서 확인되었는데, 벽 안쪽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확인된다. 송국리식 집자리의 지붕 구조를 고려할 때 벽 기둥은 주 기둥(主柱孔)보다 낮았을 것으로 판단되며, 벽 기둥은 벽체의 골격을 잡는 동시에 서까래를 지탱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입 시설은 47호에서 확인되었는데, 북쪽 벽에서 돌출된 형태이고, 벽면에서 비스듬하게 굴착하여 시설하였다. 출입구는 평면이 반타원형이면서 2단으로 이루어진 계단식이다. 출입 시설은 집자리의 구조상 벽선에서 바깥으로 돌출되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으며, 우기(雨期)에 빗물의 유입을 고려하여 출입부분에도 지붕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송국리식 집자리에서 발견된 사례가 많지 않으나, [[진안농산유적|진안 농산 유적]] 8호와 [[장흥신풍리유적|장흥 신풍 유적 14호]]에서 완전하게 확인되기도 하였다. 내부 도랑(溝)은 바닥에서 타원형 구덩이와 연결된 것으로, 12호와 39호에서 확인되었다. 이는 집자리 안으로 흘러드는 빗물을 타원형 구덩이 쪽으로 흘러들게 하여 바닥면이 젖지 않도록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한편, 집자리 대부분 자연 폐기되었으나, 37호와 73호는 화재로 폐기되었다. 화재 폐기된 집자리는 모두 평면 형태가 원형이었고, 집자리 내부에서 상부 구조물로 추정되는 목재와 벽체, 벽면에 세워진 목재 등이 내부로 쓰러진 양상이었다.&lt;br /&gt;
&lt;br /&gt;
돌덧널무덤(石槨墓)은 총 6기가 조사되었다. 집자리가 밀집 분포하는 곳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하는데, 구하도가 확인된 지역과 인접하다. 1구역 서쪽(해발 40.5m)과 남쪽(해발 35.3m), 남서쪽, 중앙부(해발 34.6m)에서 총 4기가 확인되었고, 2구역의 경우, 남쪽 경계 지역에서 2기가 확인되었다. 무덤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고, 대부분 훼손이 심하여 축조 방식은 명확하지 않으나 주변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판돌 및 깬돌을 이용하여 비교적 정연하게 무덤을 만들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바닥은 2-1호만 판돌을 2매를 깔고 그 사이에 점질토를 이용해 마무리하였고, 나머지 5기는 별다른 시설없이 사용되었다. 1-1호의 장축 방향은 남-북으로, 길이 1.03m, 너비 0.28m 정도이며, 무덤 구덩이(墓壙)는 길이 1.74m, 너비 0.75m, 깊이 0.37m 정도이다. 함몰되어 명확한 형태를 파악하기 어려우나, 짧은 벽은 비교적 편평한 판돌을 1~2매 정도 세워 축조하였으며, 긴 벽은 바닥에서 0.1m 정도를 점토로 채우고 그 위에 깬돌을 가로로 눕혀 만들었다. 1-2호의 장축은 동서 방향이고, 길이 1.64m, 너비 1.24m 정도이다. 벽면은 1단만 확인되나 깬돌을 수직으로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3호는 장축은 동서 방향으로, 길이 1.61m, 너비 0.64m이며, 무덤 구덩이는 길이 2.02m, 너비 1.04m, 깊이 0.3m 정도이다. 4호의 장축은 동서 방향이고, (추정) 길이 1.48m, 너비 0.54m 정도이며, 무덤 구덩이는 길이 2.22m, 너비 1.28m, 깊이 0.4m이다. 벽면은 동벽, 서벽, 남벽의 경우 일정하게 반듯한 벽면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반해 북벽의 경우 불규칙한 형태로 확인되었다. 2구역 무덤의 장축은 북동-남서 방향이다. 사용된 석재들은 판돌(1호)과 깬돌(2호)으로, 벽석은 양 짧은 벽들은 작은 판돌으로 2단으로 축조하였고, 북서쪽 긴 벽은 1매의 큰 판돌을 이용하여 가로로 눕혀 쌓았으며, 남동쪽 긴 벽은 비교적 작은 판돌으로 세워 축조하였다. 2-1호는 길이 1.24m, 너비 0.4m 정도이며, 무덤 구덩이는 길이 1.8m, 너비 0.84m, 깊이 0.45m 정도이다. 2-2호는 훼손이 심한 편으로, 잔존 길이 1.5m, 너비 0.48cm 정도이며, 무덤 구덩이는 길이 1.64m, 너비 0.84m, 깊이 0.23m 정도이다. 출토 유물은 민무늬 토기 바닥이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노천요|한뎃가마(露天窯)]]는 2구역 북서쪽 해발 34.1m 상에 위치한다. 벽면은 바닥면으로 비스듬히 떨어지고 바닥면은 동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또한 서쪽에서는 목탄과 불탄 흙(燒土)이 집중되었나, 유물은 동쪽에서 더 많이 출토되었다. 서쪽 부분에서 동쪽으로 연결되는 부분에서는 남쪽벽에 치우쳐 주변 바닥 면보다 깊게 굴착된 면이 길게 확인된다. 길이 6.6m, 너비 0.22~0.28m, 최대 깊이 0.2~0.3m 정도이다. 출토 유물은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민무늬토기|민무늬 토기]] 편, [[돌살촉|돌살촉]] 편, [[돌칼|돌칼]], 미완성 석기가 확인된다.&lt;br /&gt;
&lt;br /&gt;
구하도는 2-1구역 중앙부를 관통하여 2-2구역을 지나 2-3구역을 감싸 도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비교적 일정한 너비로 남북 방향으로 흐르며, 일정한 시기에 물길이 차단되면서 그 기능이 상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말목열은 호안 시설로, 축조 장소에 따른 기능적인 면에서 차이가 확인되었다. 1구역의 말목 열은 너비 0.25~0.48m, 깊이 0.2~0.28m 정도로 비교적 좁은 수로에서 물길의 보강 시설로 저수 호안(瀦水護岸)에 해당된다. 2구역의 말목 열은 옛 물길에서 확인되었으며 마을에 대한 보강 시설로 제방 호안(堤防護岸)으로 추정된다. 0.6~1m 정도의 말목이 다양하게 확인되고, 단면 형태도 다양하게 확인되나 삼각형 단면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2곳의 말목 열 모두 물의 유속에 의해 세굴됨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으나, 보강하고자 하는 부분에 따라 다른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lt;br /&gt;
&lt;br /&gt;
출토 유물은 토기류와 석기류로 나누어 지는데, 토기류는 민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검은간토기|검은 간 토기(黑陶)]]가 확인되었다. 민무늬 토기가 다수로, 기형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리모양토기|바리 토기(鉢形土器)]], [[항아리모양토기|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 등이 있고, 이외에는 대부분 파편으로 출토되어 전체적인 기형을 알 수 없다.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의 [[굽다리토기|굽다리 토기(臺附壺)]]로부터 시작되는 붉은 간 토기는 [[부여송국리유적|부여 송국리 유적]]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종이 등장하면서 [[송국리유형|송국리 유형]]의 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송국리식 집자리에서 다양한 기종의 붉은 간 토기가 확인된다. 기종에는 송국리식 토기, 병, [[둥근바닥의긴목항아리|둥근 바닥의 긴 목 항아리]], [[둥근바닥의짧은목항아리|둥근 바닥의 짧은 목 항아리]], 바리(鉢), [[완|완(盌)]] 등 다양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검은 간 토기는 1점이 편으로 출토되었는데 완(盌)으로 추정된다. 석기류는 무기류인 돌살촉과 [[돌검|돌검(石劍)]], 농구류인 [[돌도끼|돌도끼(石斧)]], [[돌끌|돌끌(石鑿)]], 돌칼(石刀)이 출토되었으며, 석기 제작과 관련된 것으로 [[대석|대석(臺席)]], [[고석|고석(鼓石)]], 석구(石球), 몸돌, 돌조각격지, [[숫돌|숫돌(砥石)]] 등이 확인되며 용도 미상 석기와 미완성 석기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돌살촉과 [[삼각형돌칼|삼각 돌칼]]을 통해 축조 연대를 추정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봉산리 황산 유적에서는 송국리식 집자리, [[외반구연항아리|외반 구연 항아리(外反口緣壺)]], 삼각 돌칼, [[홈자귀|홈자귀(有溝石斧)]]와 같은 송국리 유형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확인되었다. 청동기 시대 집자리는 기원전 9세기를 전후하여 집자리의 평면 형태가 소형화되고 규격화되면서 방형 집자리가 축조된다. 기원전 8세기를 전후하여 송국리식 집자리가 출현하면서 말각 방형화되고 이후 평면 형태가 원형이고, 규모가 큰 집자리가 축조된다.&lt;br /&gt;
&lt;br /&gt;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값]]은 2455~2465±20 BP(한뎃가마), 2495±20 BP (37호 집자리), 2750±20 BP(34호 집자리) 등이 제시되어 기원전 917~827에서 기원전 773~727년을 전후하여 형성되었음을 파악하였다.&lt;br /&gt;
&lt;br /&gt;
고창 지역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대규모의 고인돌이 밀집·분포하는데, 상대적으로 집자리 등 마을 유적에 대한 조사가 부족하였다. 봉산리 황산 유적에서 확인되는 마을은 그 규모로 보아 지역의 거점 마을 혹은 준거점 마을으로 해석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평가된다. 따라서 집자리와 함께 조사가 이루어진 방형의 도랑, 구덩이, 기둥 건물터, 도랑 등과의 연관성과 더불어 주변 지형과의 관계 및 생활 환경 등과 같은 경관(景觀)까지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한국 청동기 시대 문화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200px&amp;gt;&lt;br /&gt;
File:고창_봉산리_황산_유적_1구역_수로.jpg&lt;br /&gt;
File:고창_봉산리_황산_유적_2구역_1호_돌덧널무덤.jpg&lt;br /&gt;
File:고창_봉산리_황산_유적_2구역_46호_집자리.jpg&lt;br /&gt;
File:고창_봉산리_황산_유적_2구역_7호_집자리.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500px&amp;gt;&lt;br /&gt;
File:고창_봉산리_황산_유적_유구_배치도.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한국고고학저널==&lt;br /&gt;
* &amp;quot;[http://portal.nrich.go.kr/kor/journalUsrDtlView.do?menuIdx=801&amp;amp;idx=8&amp;amp;d_idx=300 청동기시대 대규모 마을의 생활과 건축기술]&amp;quot;, &amp;lt;i&amp;gt;2012 한국고고학저널&amp;lt;/i&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대한문화재연구원. (2015). &amp;lt;i&amp;gt;고창 봉산리 황산유적&amp;lt;/i&amp;gt;.&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186&amp;diff=27117</id>
		<title>600-118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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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1:36: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봉산리 유적(蔚珍 烽山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봉산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울진 봉산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봉산리 494-1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화덕 자리]], [[구멍무늬 토기]], [[굽다리 토기]], [[간 돌도끼]], [[덧띠 토기]]&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김도헌&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봉산리 494-1 일원에 위치한다. 울진 공항 건설에 앞서 2001~2002년 조사하여, [[집자리|집자리]] 5기를 확인하였다. 유적은 바다와 가까운 야트막한 구릉지의 남쪽 비탈면(斜面)에 위치한다. 집자리는 산등성이의 평탄한 지점(해발 66~67m)부터 비탈면 자락 부근(해발 42m)까지 넓은 범위에 위치한 다. 그중 중복된 4·5호를 제외하면 모두 멀리 떨어져 단독으로 분포한다.&lt;br /&gt;
&lt;br /&gt;
집자리는 장축 방향이 등고선과 평행하며, 형태는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1호는 길이 6.35m, 너비 4.95m, 깊이 0.15m로 가장 크며, 5호는 길이 1.5m, 너비 2.56m, 깊이 0.23m로 가장 작다. 내부 시설은 [[화덕자리|화덕 자리]], [[기둥구멍|기둥 구멍]]으로, 3호에서만 확인되었다. 화덕 자리는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竪穴式)]]으로, 길이 0.75m, 너비 0.65m이다. 기둥 구멍은 22개가 확인되었지만, 정형성이 없어 주 기둥 구멍(主柱穴)을 파악할 수 없다.&lt;br /&gt;
&lt;br /&gt;
출토 유물은 [[구멍무늬토기|구멍무늬 토기(孔列土器)]], [[굽다리토기|굽다리 토기(豆形土器)]], [[간돌도끼|간 돌도끼]]가 확인되었다. 이외에 유물 포함층에서 [[덧띠토기|덧띠 토기(粘土帶土器)]] 편이 확인되어, 유물이 출토되지 않은 집자리 중 일부는 [[초기철기시대|초기 철기 시대]] 집자리일 가능성도 있다.&lt;br /&gt;
&lt;br /&gt;
유적에서 확인된 집자리는 남아 있는 상태가 좋지 않고, 출토 유물도 적지만 울진을 포함한 동해안의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문화를 알려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조사 || 2001년 ~ 2002년 || 울진 봉산리유적 || 2002 || 중앙문화재연구원, 부산지방항공청&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중앙문화재연구원. (2002). &amp;lt;i&amp;gt;울진 봉산리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8583873&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175&amp;diff=27116</id>
		<title>600-1175</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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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1:34: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봉길리 유적(慶州 奉吉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봉길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경주 봉길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산14-3, 13-1, 856, 868, 874, 884&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도랑]], [[화덕 자리]], [[기둥 구멍]], [[벽 도랑]], [[붉은 간 토기]], [[그물추]], [[반달 돌칼]], [[돌도끼]], [[가락바퀴]], [[숫돌]], [[검단리식 집자리]], [[검단리식 토기]]&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신영애&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산14-3, 13-1, 856, 868, 874, 884에 위치한다. 1997년 국도 31호선 개설 공사로 산14-3 일대를 울산대학교박물관이 조사하였다(봉길 고분군Ⅰ). 2002~2003년 신월성 원전 사업의 일환으로 봉길리 884 일원을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봉길리 고분군)과 영남문화재연구원(봉길리 유적)이 조사하였다. 또한, 2003년 월성 원자력 홍보관 건립으로 봉길리 874 일원을 영남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하였다(봉길리 117-2번지 유적). 2006년에는 근린 생활 시설 건립을 위해 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서 봉길리 13-1을 조사하였다. 이외에 방사성 폐기물 처분 시설 등을 목적으로 2007~2008년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봉길리 868 일대를 조사하였고(봉길리 유적), 해당 시설 내 환경 친화 단지 조성을 위해 2010년에 성림문화재연구원이 봉길리 856 일대를 조사하여 다수의 유구를 확인하였다(봉길리 청동기 시대 취락 유적). 유적은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대종천 남쪽 구릉에 입지하며, 동쪽으로 0.3㎞ 정도 떨어져 동해와 만난다. 분포 범위는 남북 1.5㎞, 동-서 0.5㎞ 정도이다.&lt;br /&gt;
&lt;br /&gt;
&#039;&#039;&#039;봉길 고분군Ⅰ&#039;&#039;&#039;과 &#039;&#039;&#039;봉길리 13-1 유적&#039;&#039;&#039;은 대종천과 동해안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구릉에 입지하며, 유적은 약 110m 떨어져 위치한다. 집자리는 3기로 파괴되어 일부만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봉길리 884 일대의 &#039;&#039;&#039;봉길리 유적&#039;&#039;&#039;(영남문화재연구원)과 &#039;&#039;&#039;봉길리 고분군&#039;&#039;&#039;(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은 인접하여 위치한다. 봉길리 유적에서는 [[집자리|집자리]]14기, 돌널형(石棺形) 유구 1기, [[구|도랑(溝)]] 2기를 확인하였다. 집자리는 장방형, 방형으로, 길이 3.7~7.1m이다. [[화덕자리|화덕 자리]]는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이 1개씩 설치되었다. [[기둥구멍|기둥 구멍]]은 4·6·8주식으로 배치되었다. 벽을 따라 설치된 [[벽도랑|벽 도랑(壁溝)]]은 내부에 기둥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된다. 바닥은 맨땅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불 다짐 처리하였다. 외부 돌출구(外部突出溝)는 9호에서 확인되었으며, 경사면 아래쪽을 향해 설치되었다. 돌널형 유구는 장방형이며, 장축 방향은 등고선과 직교한다. 길이 1.41m, 0.68m, 깊이 0.2m이며, 내부에는 길이 30~50㎝의 깬돌(割石)로 채워져 있다. 도랑은 길이 14~20m, 너비 0.4~0.7m 내외이다. 봉길리 고분군에서는 집자리 2기가 확인되었다. 후대 훼손으로 일부가 유실되었다. 2호는 장방형이며, 남아 있는 규모는 길이 3.6m, 너비 1.95m, 깊이 0.21m이다.&lt;br /&gt;
&lt;br /&gt;
&#039;&#039;&#039;봉길리 874 유적&#039;&#039;&#039;(봉길리 117-2번지 유적)은 봉길리 유적(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북쪽으로 500m 떨어진 구릉 정상부에 위치하며, 집자리 2기가 확인되었다. 1호는 장방형으로 길이 4.95m, 너비 3.67m, 깊이 0.15m이다.&lt;br /&gt;
&lt;br /&gt;
방사성 폐기물 처분 시설 건립으로 조사된 봉길리 868 유적(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서는 가구역에서 집자리 1기를 확인하였다. 형태는 방형이며 길이 3.82m, 너비 2.38m, 깊이 0.36m이다. 내부에 많은 목탄이 확인되어 화재로 폐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039;&#039;&#039;봉길리 856 유적&#039;&#039;&#039;(성림문화재연구원)은 봉길리 868 유적과 0.9m 떨어져 있다. 집자리 10기, 구덩이 9기, 기둥 구멍 2기, 도랑(溝) 8기를 확인하였다. 집자리는 장방형과 방형이며, 길이 3.7~4m의 소형이다. 화덕 자리는 일부 집자리에서만 확인되며, 구덩식으로 한쪽 짧은 벽에 치우쳐 있다. 기둥 구멍은 바닥 가운데 일정한 거리를 두고 2개씩 설치되는데 6·8주식도 확인되었다. 벽 도랑은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내부에 기둥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기도 한다. 바닥은 맨땅을 그대로 다지거나 불 다짐 처리하여 사용하였다. 외부 돌출구는 3기에서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출토 유물은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그물추|그물추]], [[반달돌칼|반달 돌칼]], [[돌도끼|돌도끼(石斧)]], [[가락바퀴|가락바퀴]], [[숫돌|숫돌(砥石)]] 등이 확인되었다. 토기의 무늬는 [[겹아가리|겹아가리(二重口緣)]], [[구멍무늬|구멍무늬(孔列文)]], [[단사선문|짧은 빗금무늬(短斜線文)]], [[낟알무늬|낟알무늬]]가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유적은 해안을 따라 이어진 구릉에 동해안 지역에서 확인되는 [[검단리식집자리|검단리식 집자리]]가 축조된 유적이다. 유적의 연대는 집자리에서 확인된 목탄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통해 봉길리 884 유적(영남문화재연구원) 5호 2360±40 BP(보정 연대 기원전 450년), 9호 2730±30 BP(보정 연대 기원전 87년), 봉길리 856 유적(성림문화재연구원) 6호 2850±50 BP(보정 연대 기원전 1010년), 9호 2650±50 BP(보정 연대 기원전 400년)로 확인되었다. 집자리의 구조 및 출토 유물을 통해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부터 [[검단리식토기|검단리식 토기]] 단계에 해당한다.&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2년 3월 6일 ~ 2003년 5월 27일 || 경주 봉길리고분군 || 2005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3년 4월 22일 ~ 2003년 10월 8일 || 경주 봉길리유적 || 2005 || 영남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시굴조사 || 2006년 8월 28일 ~ 2006년 9월 27일 || 경주의 문화유적Ⅳ-경주 양북면 봉길리 13-1번지 유적 || 2008 || 신라문화유산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06년 11월 6일 ~ 2006년 12월 30일 || 경주의 문화유적Ⅳ-경주 양북면 봉길리 13-1번지 유적 || 2008 || 신라문화유산연구원&lt;br /&gt;
|-&lt;br /&gt;
| 조사 || 2010년 || 경주 봉길리 청동기시대 취락유적 || 2013 || 성림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5). &amp;lt;i&amp;gt;경주 봉길리고분군&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0431626&lt;br /&gt;
* 성림문화재연구원. (2013). &amp;lt;i&amp;gt;경주 봉길리 청동기시대 취락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3279639&lt;br /&gt;
* 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08). &amp;lt;i&amp;gt;경주의 문화유적Ⅳ-경주 양북면 봉길리 13-1번지 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3889041&lt;br /&gt;
* 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10). &amp;lt;i&amp;gt;경주 봉길리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2357223&lt;br /&gt;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5). &amp;lt;i&amp;gt;경주 봉길리117-2번지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0331856&lt;br /&gt;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5). &amp;lt;i&amp;gt;경주 봉길리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9999030&lt;br /&gt;
* 울산대학교박물관. (2000). &amp;lt;i&amp;gt;경주 봉길 고분군Ⅰ&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9070930&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171&amp;diff=27115</id>
		<title>600-117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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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1:33: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봉계리 계당 유적(蔚山 鳳溪里桂堂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봉계리 계당 유적&lt;br /&gt;
| 이칭별칭=울산 봉계리 계당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 660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구덩이]], [[도랑]], [[화덕 자리]], [[기둥 구멍]], [[검단리식 유형]], [[원판 모양 석기]], [[간 돌살촉]], [[숫돌]], [[깊은 바리 토기]], [[붉은 간 토기 작은 항아리]]&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황창한&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 660 일원에 위치한다. 봉계 일반 산업 단지 조성으로 2010~2011년 조사하여, Ⅰ지구에서 [[집자리|집자리]] 14기, Ⅱ지구에서 집자리 12기, [[구덩이|구덩이]] 1기, Ⅲ지구에서 집자리 62기, 구덩이 4기, [[구|도랑(溝)]] 4기, Ⅳ지구에서 집자리 11기가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구릉 사이의 계곡부를 경계로 남쪽과 북쪽의 구릉 말단부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lt;br /&gt;
&lt;br /&gt;
Ⅰ지구의 집자리는 서쪽으로 뻗어 내리는 구릉 사면(해발 93~103m)에 분포한다. 전체적으로 삭평과 중복이 심해 집자리의 상태는 양호하지 않다. 집자리는 대부분 등고선과 나란하게 축조되었으며, 중복된 것을 제외하면 2기가 세트를 이룬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과 방형으로 구분되며, 기둥의 배치에 따라 무주혈식, 4·6·10주식(柱式)이 확인된다. 4주식은 소형, 6주식은 중형, 8주식 이상은 대형으로 구분된다. 5호는 길이 8.4m, 너비 4.6m, 깊이 0.59m, 면적 38.6㎡로 가장 크다. 집자리의 내부 시설로는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竪穴式)]]과 [[평지식화덕자리|평지식 화덕 자리]], [[기둥구멍|기둥 구멍]], [[벽도랑|벽 도랑(壁溝)]] 및 배수구가 확인되었다. 화덕 자리는 4·6주식에는 대부분 1개가 설치되었고, 10주식 집자리에는 2개가 확인되었다. 형태는 원형이며 구덩식이 많다. 일반적으로 [[검단리식집자리|검단리식 집자리]]에서 [[화덕자리|화덕 자리]]는 중앙부에서 한쪽 벽 쪽에 치우쳐 설치되었으나, 장방형인 11호는 경우 집자리 중앙부에 설치되어 특징적이다. 기둥 구멍은 5·13호와 같이 정연하게 확인되기도 하지만 없는 집자리(7·11호)도 있다. 집자리의 내부 가장자리를 따라 설치되어 있는 벽 도랑 내부에는 [[벽기둥구멍|벽 기둥 구멍(壁柱穴)]]이 설치되어 있는데 6주식 이상의 대형 집자리에서 확인된다.&lt;br /&gt;
&lt;br /&gt;
Ⅱ지구 집자리는 능선의 중앙을 기준으로 북쪽으로 약간 치우친 사면(해발 91m)을 따라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중복이 심하다. 형태는 대부분 장방형이고, 3호와 같이 방형에 가까운 장방형도 확인된다. 6호는 길이 11.06m, 너비 5.15m, 깊이 0.74m, 면적 52.1㎡로 가장 크다. 화덕 자리는 2개로, 가운데 있는 화덕 자리는 구덩이와 중복되었다. 벽 도랑도 남동쪽에서 이중으로 확인되어 장방형에서 세장방형으로 확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둥 구멍은 6주식으로 뚜렷하게 확인되는 것은 4호가 유일하고 나머지는 기둥 구멍이 확인되지 않았다. 벽 기둥 구멍은 6호에서 약 2m 간격, 10·11호는 약 0.2m 간격으로 확인된다. 유물은 토기에 비해 석기의 비율이 높다. 1호에서는 미완성 [[원판모양석기|원판 모양 석기(圓板形石器)]], 미완성 [[간돌살촉|간 돌살촉]], [[숫돌|숫돌(砥石)]] 등이 출토되어 내부에서 석기 제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5호에서는 토기의 뚜껑으로 추정되는 원판 모양 석기와 [[단추형토제그물추|단추형 토제 그물추]] 33점이 출토되어 어로 활동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5·11호와 같이 바닥에서 다량의 목탄이 검출된 집자리는 화재로 인해 폐기된 것으로 판단된다.&lt;br /&gt;
&lt;br /&gt;
Ⅲ지구 집자리는 구릉의 사면부(해발 83~100m)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집자리의 형태는 장방형과 방형으로 구분된다. 장방형 집자리는 대부분 장축이 등고선과 평행하지만 직교(6·17호)되는 것도 있다. 전반적으로 집자리간 중복된 사례가 많다. 내부 시설은 화덕 자리, 벽 도랑, 기둥 구멍 등이 있다. 외부로 이어지는 배수구는 일부 집자리에서 확인되었으나 지형이 삭평된 것을 감안한다면 대다수의 집자리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장방형에서 벽 도랑 내부에 벽 기둥 구멍이 설치된 예가 많다.&lt;br /&gt;
&lt;br /&gt;
Ⅳ지구 집자리는 서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사면(해발 78~82m)에 집자리가 분포한다. Ⅲ지구에 비해 밀집도가 떨어지며 중복된 집자리(5·6호)도 상대적으로 적다. 집자리의 상태는 삭평이 심해 불량하다.&lt;br /&gt;
&lt;br /&gt;
유적에서 확인된 집자리는 검단리식 집자리로, 방형과 장방형 집자리에 벽 도랑, 배수구, 사각 구도의 기둥 구멍 배치와 짧은 벽으로 치우쳐 설치된 화덕 자리가 시설된 형태를 지칭한다. 검단리식 토기는 아가리에 [[단사선문|짧은 빗금무늬(短斜線文)]] 혹은 [[낟알무늬|낟알무늬]]가 새겨진 [[깊은바리모양토기|깊은 바리 토기(深鉢形土器)]]에 한정하거나 그 외 [[손잡이달린깊은바리토기|손잡이 달린 깊은 바리 토기(把手附鉢形土器)]], [[붉은간토기작은항아리|붉은 간 토기 작은 항아리(赤色磨硏小壺)]]를 포함한 양식화된 토기군을 지칭한다. 장방형 집자리에 2개의 화덕 자리가 확인되는 것은 Ⅰ-5호, Ⅱ-6호, Ⅲ-8·28·47호이다. Ⅰ-5호, Ⅲ-47호는 10주식의 정형화된 기둥 구멍 배치와 화덕 자리의 위치, 벽 도랑과 배수구가 설치되어 화덕 자리의 수를 제외하면 검단리식 집자리와 유사하다. Ⅱ-6호, Ⅲ-28호는 기둥 구멍이 확인되지 않거나 정형성이 없으며 화덕 자리의 위치에서도 Ⅰ-5호와는 차이가 있다. Ⅲ-39호는 구덩식 화덕 자리가 1개 설치되어 있지만 이 외에도 장축 선상에 불탄 흔적이 있어 [[지면식화덕자리|지면식 화덕 자리]]일 가능성도 있다. 장방형 집자리에서 1개의 화덕 자리와 정형화된 기둥 구멍이 배치된 검단리식 집자리 중 10주식은 Ⅲ-20호가 유일하다. 4주식은 Ⅲ-10·35·41·43·52·56·60호, 6주식은 Ⅰ-13호, Ⅱ-4·11호, Ⅲ-2·9·27·32·46호, Ⅳ-4·9호 등이다. 검단리식 집자리에 화덕 자리, 벽 도랑, 배수구는 확인되지만 기둥 구멍이 확인되지 않거나 배치가 정형하지 않는 것은 Ⅰ-9호, Ⅱ-1·2·4·9호, Ⅲ-5·11·15·17·23·25·36·53·55·57·58호, Ⅳ-7호 등이다. 즉, 집자리의 형태에 따라 전형적인 검단리식 집자리와 변형된 검단리식 집자리로 구분할 수 있으며, 지구별로는 4주식 집자리가 Ⅲ지구에서 많이 확인된 점이 특징적이다.&lt;br /&gt;
&lt;br /&gt;
토기는 깊은 바리 토기, 항아리 모양 토기, 손잡이 달린 바리 토기, 붉은 간 토기 작은 항아리 등이다. 복합무늬 토기는 안에서 밖으로 구멍을 뚫은 구멍무늬+짧은 빗금무늬가 새겨진 깊은 바리 토기가 Ⅰ-7호에서 1점, [[골아가리|골아가리]]는 Ⅱ-39호에서 1점 확인되었다. 반관통 골아가리무늬는 5동에서 각각 1점이 출토되었고, 구멍무늬는 외부에서 내부로 반투공 되어 있으며 2기에서 확인되었다. 검단리식 토기의 낟알무늬는 사선으로 새겨진 것(2기)과 가로 줄로 새겨진 것(8기)으로 구분된다. Ⅲ-36·46·53·54호에서는 무늬가 없는 깊은 바리 토기가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유적의 시기는 Ⅱ-6호는 [[흔암리유형|흔암리 유형]] 단계이지만 중심 연대는 [[검단리유형|검단리식 유형]] 단계이다. 유적에서 자연 과학적 분석으로 목탄의 [[수종분석|수종분석(樹種分析)]], [[탄화종실|탄화종실(炭化種實)]],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실시하였다. 수종분석 결과 굴피나무, 상수리나무류와 졸참나무류로 확인되었으며, 탄화 종실은 Ⅱ-11호 화덕 자리에서 대두속(屬)(종자) 1점, Ⅲ-47호 집자리 토기 내부에서 대두속(과서), 대두속(종자)가 검출되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치는 Ⅰ-1호 2340±40 BP(보정 연대 기원전 440년), 7호 2900±40 BP(보정 연대 기원전 1070년), Ⅱ-5호 2700±50 BP(보정 연대 기원전 850년), 11호 2810±40 BP(보정 연대 기원전 960년), Ⅲ-37호 2640±40BP(보정 연대 기원전 810년), 39호 2810±50 BP(보정연대 기원전 970년), 60호 2440±40 BP(보정 연대 기원전 480년)로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500px&amp;gt;&lt;br /&gt;
File:울주_봉계리_계당_유적_46호_집자리_및_출토_유물.jpg&lt;br /&gt;
File:울주_봉계리_계당_유적_47호_집자리_및_출토_유물.jpg&lt;br /&gt;
File:울주_봉계리_계당_유적_III지구_유구_배치도.jpg&lt;br /&gt;
File:울주_봉계리_계당_유적_II지구_유구_배치도.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시굴조사 || 2010년 11월 29일~2011년 1월 25일 || 울산 울주 봉계리 계당 유적 || 2013 || 동서문물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11년 2월 7일~2011년 11월 24일 || 울산 울주 봉계리 계당 유적 || 2013 || 동서문물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동서문물연구원. (2013). &amp;lt;i&amp;gt;울산 울주 봉계리 계당 유적&amp;lt;/i&amp;gt;.&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160&amp;diff=27114</id>
		<title>600-116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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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1:32: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복성리 고인돌군[漆谷 福星里支石墓群]}}&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복성리 고인돌군&lt;br /&gt;
| 이칭별칭=칠곡 복성리 고인돌군, 칠곡 복성리 지석묘군&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321-1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구덩이]], [[고인돌]], [[돌널무덤]], [[돌덧널무덤]], [[붉은 간 토기]], [[간 돌살촉]], [[슴베 간 돌검]], [[대롱옥]], [[돌도끼]], [[칼자루 끝 장식]]&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유병록&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321-1 일원에 위치한다. 경부 고속 철도의 차량 보수기지 건설에 앞서 1995~1997년 경북대학교박물관이 [[구덩이|구덩이]] 2기, 1999년 영남문화재연구원이 [[고인돌|고인돌]] 3기, [[돌널무덤|돌널무덤(石棺墓)]] 및 [[돌덧널무덤|돌덧널무덤(石槨墓)]] 13기, 구덩이 1기를 확인하였다. 유적은 서남쪽 서진산(棲鎭山)의 북서 사면 끝 자락에서 경호천(鏡湖川) 남쪽 기슭 사이에 형성된 선상지성 충적 대지에 입지한다.&lt;br /&gt;
&lt;br /&gt;
구덩이 5호(경북대학교박물관)는 평면 형태 원형이며, 지름 2.1m, 깊이 0.15m이다. 내부에서 불탄 흙과 숯이 확인되었고, 북쪽 벽면에는 화덕 자리로 추정되는 불탄 흙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민무늬토기바리|민무늬 토기 바리(鉢)]] 2점과 바닥 편 2점이 확인되었다.&lt;br /&gt;
&lt;br /&gt;
고인돌은 유적의 서쪽에 위치한다. 1호는 [[덮개돌|덮개돌(上石)]]길이 3.55m, 너비 1.9m, 높이 1m이며, 아래에서 길이 4.1m, 너비 2.05m, 깊이 0.15m의 [[무덤구덩이|무덤 구덩이(土壙)]]가 확인되었다. 무덤 구덩이는 숯과 재를 섞은 흙으로 바닥을 정지하였다. 무덤 구덩이 주변으로 길이 0.5m 내외의 깬돌(割石)이 다수 확인되어 [[부석시설|부석 시설(敷石施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호는 1호에서 남동쪽으로 12m 떨어져 위치한다. 덮개돌은 길이 4.3m, 너비 2.4m, 높이 1.4m이며, 아래에는 깊이 0.2m의 구덩이를 파고 주변에 길이 0.9m 내외의 받침돌支石 10개를 돌렸다. 3호는 2호와 동쪽에 위치하며 덮개돌은 길이 2m, 너비 1.25m, 높이 0.3m이며, 아래에는 깬돌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었다.&lt;br /&gt;
&lt;br /&gt;
[[돌널|돌널]]·돌덧널무덤은 15호가 길이 0.9m, 너비 0.5m로 가장 작고, 7호가 길이 1.8m, 너비 0.75m로 가장 크다. 깬돌로 축조한 것과 판돌(板石) 여러 매를 사용한 것(6·7·12·14·18)으로 나뉜다. 바닥석의 위치에 따라 지상식이 7기이며, 지하식은 10기이다. 12·15호는 길이 11.6m, 너비 7.6m의 부석 시설 안에 만들어졌다. 부석 시설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는 12호는 길이 1.9m, 너비 0.55m, 깊이 0.7m이며 바닥에는 판돌 7매를 깔았다.&lt;br /&gt;
&lt;br /&gt;
[[뚜껑돌|뚜껑돌(蓋石)]]은 세 겹으로 덮었다. 8·9호는 깬돌을 옆으로 눕혀 쌓거나 세워 쌓은 돌덧널형(石槨形)으로 바닥은 잔돌을 깔았다. 내부 크기는 8호 길이 1.2m, 너비 0.45m, 깊이 0.5m, 9호 길이 1.2m, 너비 0.55m, 깊이 0.45m이다. 출토 유물은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간돌살촉|간 돌살촉]], [[슴베간돌검|슴베 간 돌검(有莖式磨製石劍)]], [[대롱옥|대롱옥(管玉)]]이 확인되었다. 부석 내부에서는 [[돌도끼|돌도끼(石斧)]] 1점과 돌로 만든 [[칼자루끝장식|칼자루 끝 장식(劍把頭飾)]] 1점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고인돌 1호에서 북동쪽으로 120m 떨어져 구덩이가 위치하고 있어, 무덤 구역이 구분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집자리는 하천과 무덤 구역 사이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12호 돌널무덤과 관련 유구, 고인돌의 덮개돌 일부는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이전·복원되었다.&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예비조사 || 1995년 ~ 1997년 || 경부고속철도 대구·경북권 문화유적 발굴예비조사 보고서 || 1997 || 경북대학교박물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1998년 3월 1일 ~ 1999년 6월 28일 || 칠곡 복성리 지석묘군 || 2001 || 영남문화재연구원,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경북대학교박물관. (1997). &amp;lt;i&amp;gt;경부고속철도 대구·경북권 문화유적 발굴예비조사 보고서&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7157625&lt;br /&gt;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1). &amp;lt;i&amp;gt;칠곡 복성리 지석묘군&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8653781&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139&amp;diff=27113</id>
		<title>600-1139</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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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1:26: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보은리·조일리·상천리 유적(蔚州 寶隱里·早日里·上川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보은리·조일리·상천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울주 보은리·조일리·상천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보은리 산282, 조일리 산4-8, 삼남읍 상천리 660-1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도랑]], [[바리 토기]], [[항아리 모양 토기]], [[붉은 간 토기]], [[돌살촉]], [[돌도끼]], [[돌칼]], [[간 돌검]], [[돌창]], [[숫돌]], [[갈돌]], [[배 모양 석기]], [[조갯날 돌도끼]], [[돌대팻날]], [[‘ㄱ’자 모양 돌칼]], [[마디 자루 간 돌검]], [[흔암리 유형]], [[검단리 유형]]&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황창한&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보은리 산282, 조일리 산4-8, 삼남읍 상천리 660-1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은 밀양-울산 간 고속 도로 건설로 2015년 조사되었다. 유적은 3개 지구로 구분하였는데 Ⅰ지구(조일리 산4-8)에서 [[집자리|집자리]] 13기, [[구|도랑(溝)]] 1기, Ⅱ지구(보은리 산282)에서 집자리 11기, Ⅲ지구(상천리 660-1)에서 집자리 2기 및 고려·조선 시대 유구가 확인되었다. 유적은 반경 200m 거리에 위치한다.&lt;br /&gt;
&lt;br /&gt;
집자리는 방형, 장방형, 세장방형으로 구분되며 내부에는 [[화덕자리|화덕 자리]], [[벽도랑|벽 도랑(壁溝)]], [[벽기둥구멍|벽 기둥 구멍(壁柱穴)]] 등이 설치되었고, 한쪽 모서리에서 외곽으로 배수구(排水溝)가 설치되었다. Ⅰ지구 7·9호, Ⅱ지구 3호 내부 한 곳에는 돌이 쌓여 있고, 일부 집자리에는 [[저장구덩이|저장 구덩이]]가 설치되어 있다. 화덕 자리는 대부분 1개씩 설치되었으며, 세장방형에는 2개 이상이 확인된다. 대부분 [[평지식화덕자리|평지식]]이며, Ⅱ지구 6호는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竪穴式)]]이다. 벽 도랑은 네 벽을 모두 돌린 것과 일부만 돌린 것이 있다. Ⅱ지구 7호에서는 벽 도랑으로 공간을 분할한 양상도 확인된다.&lt;br /&gt;
&lt;br /&gt;
유물은 토기류 60점, 토제품 6점, 석기류 52점 등 총 118점이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깊은 [[바리모양토기|바리 토기(深鉢形土器)]], [[얕은바리토기|얕은 바리 토기(淺鉢形土器)]], [[항아리모양토기|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등이며, 무늬는 깊은 바리에 [[겹아가리짧은빗금골아가리무늬|겹아가리 짧은 빗금 골아가리무늬(二重口軟短斜線文口脣刻目)]], [[겹아가리짧은빗금반관통구멍무늬|겹아가리 짧은 빗금 반관통 구멍무늬]], [[겹아가리골아가리구멍무늬|겹아가리 골아가리 구멍무늬(二重口軟口脣刻目孔列文)]], 골아가리 구멍무늬가 새겨진 복합무늬와 반관통 구멍무늬만 새겨진 단독무늬가 확인된다. 복합 무늬의 구성은 대부분 흔암리식이며, Ⅱ지구 2호에서 출토된 골아가리 구멍무늬는 역삼동식에 해당한다. 석기류는 [[돌살촉|돌살촉]], [[돌도끼|돌도끼(石斧)]], [[돌칼|돌칼(石刀)]], [[간돌검|간 돌검]], [[돌창|돌창(石槍)]], [[숫돌|숫돌(砥石)]], [[갈돌|갈돌(碾石)]], 미완성 석기 및 [[배모양석기|배 모양 석기(船形石器)]], [[석재|석재]], [[격지|격지]] 등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화살촉은 슴베 없는 것(無莖式)과 통슴베식(一段莖式)이 출토되었는데 Ⅱ지구 7호에서 출토된 화살촉은 턱 슴베(二段莖式)에서 통슴베로의 변화가 확인된다. 돌도끼는 [[합인석부|조갯날 돌도끼(蛤刃石斧)]] 8점, [[돌대팻날|돌대팻날(扁平片刃石斧)]] 1점으로 벌목구(伐木具)의 비율이 높다. 돌칼은 [[반달돌칼|반달 돌칼]], [[ㄱ자돌칼|‘ㄱ’자 모양 돌칼(東北型石刀)]]이 확인되었다. Ⅱ지구 10호에서는 [[마디자루간돌검|마디 자루 간 돌검(有節式磨製石劍)]]의 손잡이가 집자리에서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이외의 석기류는 미완성 석기의 비율이 높아 보고자는 주변 지역에 돌대팻날류를 제작하여 공급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lt;br /&gt;
&lt;br /&gt;
유적의 시기는 세장방형 집자리에서 복합무늬 토기가 공반되는 [[흔암리유형|흔암리 유형]] 단계에서 [[검단리식집자리|검단리식 집자리]]가 중심이 되는 [[검단리유형|검단리 유형]] 단계까지 존속되었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700px&amp;gt;&lt;br /&gt;
File:울주_보은리_조일리_상천리_유적(보은리_유적)_I지구_유구_배치도.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표본조사 || 2015년 5월 14일~2015년 5월 29일 || 울산 보은리 유적 || 2017 || 울산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2015년 11월 25일~2015년 12월 31일 || 울산 보은리 유적 || 2017 || 울산문화재연구원&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울산문화재연구원. (2017). &amp;lt;i&amp;gt;울산 보은리 유적&amp;lt;/i&amp;gt;.&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086&amp;diff=27112</id>
		<title>600-108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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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1:21: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 조사정보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방기리 유적(蔚州 芳基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방기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울주 방기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방기리 359-1, 379-1 일대&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환호]], [[화덕 자리]], [[바리 토기]], [[항아리 모양 토기]], [[붉은 간 토기]], [[조갯날 돌도끼]], [[돌대팻날]], [[반달 돌칼]], [[슴베 간 돌살촉]], [[삼각 오목 돌살촉]], [[돌낫]], [[가락바퀴]], [[그물추]], [[구멍무늬 토기]]&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유병일&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방기리 359-1, 379-1 일대에 위치한다. 공용화물 터미널 조성으로 1996년 창원대학교박물관(방기리 359-1)이 조사하여 [[집자리|집자리]] 49기, [[환호|환호(環濠)]] 2기를 확인하였다. 이후 자동차 출고장 부지 조성으로 1998년 부산대학교박물관(방기리 379-1)이 조사하여 집자리 5기를 확인하였다. 유적은 취서산(해발 1,059m)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가장 말단부에 입지하며, 두 유적은 300m 거리에 위치한다.&lt;br /&gt;
&lt;br /&gt;
방기리 유적(창원대학교박물관)은 Ⅰ·Ⅱ구역으로 나누어 조사하였다. Ⅰ구역은 집자리 간에 중복 관계가 없으며, 구릉 정상부에 11~13호가 1열로 배치되어있다. 이를 중심으로 세장방형 2기, 방형 3기의 집자리가 군집을 이루며, 외곽에 환호가 돌려져 있다. Ⅱ구역은 장방형이 방형을 파괴하고 축조되었으며, 환호 및 군집 양상도 보이지 않는다. 집자리는 세장방형, 장방형, 방형으로 구분된다. 규모는 길이 3.27~7.8m, 너비 2.66~4.86m, 면적 8.7~32.9㎡이다. 23호는 장방형으로 길이 3.27m, 너비 2.66m로 가장 소형이며, 2호는 세장방형으로 길이 7.8m, 너비 4.22m로 가장 크다. 내부에서는 [[기둥구멍|기둥 구멍]], [[화덕자리|화덕 자리]], [[벽도랑|벽 도랑(壁溝)]], [[저장구덩이|저장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기둥 구멍은 4·6·10주식(柱式)이며 방형 집자리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화덕 자리는 [[구덩식화덕자리|구덩식(竪穴式)]]으로 일반적으로 방형은 바닥 가운데에 1개, 세장방형은 2~3개씩 설치하였으며, 2호는 서쪽 짧은 벽 쪽에 1개, 22호는 중앙에 등 간격으로 3개 설치하였다.&lt;br /&gt;
&lt;br /&gt;
일부 집자리에서는 화덕 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도랑이 확인되며, 16호는 바닥의 낮은 쪽으로 빠져나간다. 집자리의 장·짧은 벽 모서리에 불탄 흙과 목탄 등이 집중적으로 확인되는데, 이는 벽 도랑에 나무 등을 세우고, 그 사이에는 흙이나 나무 등으로 마무리한 벽체 시설(壁體施設)로 추정된다. 또한 일부 집자리에는 벽 도랑이 외부 경사면 아래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배수구(排水溝)가 확인되며, 구릉의 경사진 곳에 있는 집자리에서는 모두 설치되었다. 저장 구덩이가 확인되는 10호는 벽에 붙어 흙을 쌓아 단(段) 시설을 만들었고, 2·8·31호는 바닥을 굴착하여 만들었다. 바닥은 불 다짐 처리한 것과 점토를 깐 것으로 구분되며, 출입 시설은 6·16·18호는 한쪽 모서리를 경사지게 굴착하고 내부는 바닥에 작은 나무 기둥을 세워서 출입 시설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화재에 의하여 폐기된 집자리가 많으며, 6호는 바닥 중앙부에 작은 돌을 쌓아 폐기하였다. 환호(環濠)는 Ⅰ·Ⅱ구역에서 조사되었다. 단면은 넓은 ‘U’자 모양 혹은 역사다리꼴(逆梯形)이며, Ⅰ구역 환호는 길이 18m, 너비 2~3.5m, 깊이 0.42m이다. Ⅱ구역은 길이 4m, 너비 1.2~3.5m, 깊이 0.5m로 구릉과 직교한다.&lt;br /&gt;
&lt;br /&gt;
출토 유물은 [[바리모양토기|바리 토기(鉢形土器)]], [[깊은바리모양토기|깊은 바리 토기(深鉢形土器)]], [[항아리모양토기|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로 구멍무늬(孔列文), 골아가리 구멍무늬(口脣刻目孔列文), 구멍무늬 짧은 빗금무늬(孔列短斜線文) 등이 새겨져 있다. 석기는 [[합인석부|조갯날 돌도끼(蛤刃石斧)]], [[돌대팻날|돌대팻날(扁平片刃石斧)]], 배 모양(舟形) 및 물고기 모양(魚形) [[반달돌칼|반달 돌칼]], [[슴베간돌살촉|슴베 간 돌살촉(有莖式磨製石鏃)]], [[삼각오목돌살촉|삼각 오목 돌살촉(三角灣入石鏃)]], [[돌낫|돌낫(石鎌)]], [[가락바퀴|가락바퀴]], 단추 모양의 흙으로 만든 [[그물추|그물추(漁網錘)]]가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방기리 취락 유적(부산대학교박물관)의 집자리는 모두 장방형이며, 2호는 길이 6.3m, 너비 3.62m, 깊이 0.45m, 3호는 길이 5.4m, 너비 3.15m, 깊이 0.2m이다. 내부에는 벽 도랑, 기둥 구멍, 화덕 자리가 있다. 기둥 구멍은 정형성이 없으며 벽 도랑 내부에도 설치되었다. 2호에는 구덩식 화덕 자리와 벽 도랑, 배수구가 확인되었다. 유물은 [[구멍무늬토기|구멍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조갯날 돌도끼, [[돌끌|돌끌(石鑿)]], 간 돌살촉 편, 물고기 모양 반달 돌칼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유적의 시기는 구멍무늬 토기, 골아가리 구멍무늬 및 짧은 빗금무늬 토기, 조갯날 돌도끼, 돌대팻날, 반달 돌칼 등을 통해 [[여주흔암리유적|흔암리 유적]]과 유사한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로 판단된다. 유적은 마을을 감싸는 환호와 환호 내부에 3~4기의 집자리가 군집을 이루는 현상을 통해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 마을의 구조를 알 수 있다. 특히 기둥 배치, 벽체 시설, 배수구, 바닥 처리 시설, 출입 시설, 불탄 목재를 통해 취락을 구성하는 개별 집자리의 구체적인 구조와 운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400px&amp;gt;&lt;br /&gt;
File:울산_방기리_유적(방기리_359-1_유적)_33호_집자리.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조사정보==&lt;br /&gt;
{|class=&amp;quot;listtable&amp;quot;&lt;br /&gt;
! class=&amp;quot;col-type&amp;quot; | 유형 !! 조사 시기 !! 보고서명 !! 발간 연도 !! 조사 기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1998년 6월 1일~1998년 6월 17일 || 울산방기리유적 || 2002 || 부산대학교박물관&lt;br /&gt;
|-&lt;br /&gt;
| 발굴조사 || 1996년 2월 21일~1996년 5월 30일 || 울산 방기리 청동기시대 취락 || 2003 || 창원대학교박물관&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부산대학교박물관. (2002). &amp;lt;i&amp;gt;울산방기리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8355600&lt;br /&gt;
* 창원대학교박물관. (2003). &amp;lt;i&amp;gt;울산 방기리 청동기시대 취락&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1518544&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079&amp;diff=27111</id>
		<title>600-1079</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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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1:20: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발안리 유적(華城 發安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발안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화성 발안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발안리 305&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나무널무덤]], [[덧띠토기 문화]], [[덧띠토기]], [[검은 간 토기]]&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이형원&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발안리 305에 위치한다. 2002~2003년 택지 개발 지구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청동기 시대 [[목관묘|나무널무덤(木棺墓)]] 2기를 비롯하여 원삼국~삼국 시대(백제) [[집자리|집자리]] 59기, [[구덩이|구덩이]] 250기, 도랑 72기, 지상 건물 39기, [[독무덤|독무덤(甕棺墓)]] 4기, 야외 화덕자리(野外爐址) 4기, 노적(爐蹟) 7기 등을 확인하였다. 유적은 발안천 변의 충적 대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나무널무덤 2기는 [[덧띠토기문화|덧띠토기 문화(粘土帶土器文化)]]시기에 해당한다. 1호 및 2호 나무널무덤은 남북 방향을 향하며 서로 5m 정도 떨어져 있다. 무덤의 형태는 장방형이다.&lt;br /&gt;
&lt;br /&gt;
1호 무덤의 규모는 길이 1.85m, 너비 0.55m, 깊이 0.4m이며, 2호 무덤은 길이 1.65m, 너비 0.55m, 깊이 0.45m이다. 1·2호 나무널무덤은 ‘U’자 모양의 점토 층이 확인되는 점으로 볼 때, 통나무 관을 썼던 것으로 보이며, 토층으로 볼 때 위 아래 각각 관과 뚜껑을 마련하고 내부를 판 뒤 시신과 유물을 안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널무덤의 부장품은 1호와 2호 무덤 각각 [[덧띠토기|덧띠토기(粘土帶土器)]]와 [[검은간토기|검은 간 토기(黑色磨硏土器)]]가 1점씩만 나왔다. 1호 나무널무덤은 검은 간 토기가 짧은 벽 쪽에 거의 붙어 있는 채 덧띠 토기와 떨어져 위치하는데 비해, 2호 나무널무덤은 검은 간 토기와 덧띠토기가 서로 곁에 붙어 있다.&lt;br /&gt;
&lt;br /&gt;
유적의 연대는 기원전 3~2세기로 추정된다. 화성 지역에서는 이 시기의 무덤이 발굴 조사된 사례가 적으며,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덧띠 토기 시기 무덤이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500px&amp;gt;&lt;br /&gt;
File:화성_발안리_유적_1호_널무덤_및_출토_토기.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기전문화재연구원. (2007). &amp;lt;i&amp;gt;화성 발안리 마을유적&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2568601&lt;br /&gt;
* 박진일. (2006). 서울·경기지방 점토대 토기문화 시론. &amp;lt;i&amp;gt;고고학, 5-1&amp;lt;/i&amp;gt;, 31-50.&lt;br /&gt;
* 서길덕. (2018). &amp;lt;i&amp;gt;한국 덧띠 토기문화기 무덤 연구&amp;lt;/i&amp;gt;. (박사 학위 논문). 세종대학교.&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dka.nrich.go.kr/wiki/index.php?title=600-1072&amp;diff=27110</id>
		<title>600-107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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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6T01:19: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Admin: &lt;/p&gt;
&lt;hr /&gt;
&lt;div&gt;{{DISPLAYTITLE:반정리 유적(永川 半亭里遺蹟)}}&lt;br /&gt;
&lt;br /&gt;
{{유적정보&lt;br /&gt;
| 한글표제어=반정리 유적&lt;br /&gt;
| 이칭별칭=영천 반정리 유적&lt;br /&gt;
| 시대=청동기 시대&lt;br /&gt;
| 위치=대한민국&lt;br /&gt;
| 소재지=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반정리 395-1 일원&lt;br /&gt;
| 성격=복합유적&lt;br /&gt;
| 키워드=[[집자리]], [[구덩이]], [[도랑]], [[바리 토기]], [[항아리 모양 토기]], [[붉은 간 토기]], [[간 돌검]], [[반달 돌칼]], [[숫돌]], [[가락바퀴]]&lt;br /&gt;
| 수록사전=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br /&gt;
| 집필연도=2019&lt;br /&gt;
| 집필자=이석범&lt;br /&gt;
}}&lt;br /&gt;
&lt;br /&gt;
==설명==&lt;br /&gt;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반정리 395-1 일원에 위치한다. 경부 고속 도로 언양-영천 간 확장 공사에 따라 2012~2018년 34개의 유적을 조사하였고, 그 중 반정리 유적에서는 [[집자리|집자리]] 33기, [[구덩이|구덩이]] 17기, [[구|도랑(溝)]] 18기, [[기둥건물터|기둥 건물터(高床建物址)]] 2기 및  [[신석기시대|신석기 시대]] 깐돌(敷石) 1기가 확인되었다. 조사는 고속 도로 서울 방면(Ⅰ·Ⅱ구역)과 부산 방면(Ⅰ·Ⅱ구역)으로 구분되며, 유구는 대부분 부산 방면 Ⅰ구역에 분포한다. 유적은 금오산(해발 412m)에서 북쪽으로 뻗은 구릉 끝 자락에 위치한 ‘반정마을’과 북안천 사이의 선상지상 충적지(沖積地)에 입지한다. 남동쪽으로 1.4㎞ 떨어져 [[영천고지리팔암유적|영천 고지리 팔암 유적]]을 비롯하여 북안천 주변으로 [[영천내포리고인돌군|영천 내포리]]·[[영천임포리고인돌군|임포리]]·[[영천고지리고인돌군|고지리]]·[[영천신리고인돌군|신리 고인돌군]], [[경주아화리고인돌군|경주 아화리 고인돌군]] 등 다수의 [[청동기시대|청동기 시대]] 유적이 분포한다.&lt;br /&gt;
&lt;br /&gt;
집자리는 원형 1기, 방형 12기, 장방형 7기, 세장방형 7기로 구분된다. 내부 시설로는 [[벽도랑|벽 도랑(壁溝)]], [[기둥구멍|기둥 구멍]], [[화덕자리|화덕 자리]] 등이 있다. 벽 도랑은 원형을 제외한 모든 집자리(1·10·11~15·17~23·25·26호)에서 확인되었고, 화덕 자리는 17기(1·2·4·5·11~18·20~23·28호)에 설치되었다. 세장방형(11·13·22·28호) 장방형(18·20·23~27호)에는 바닥 가장자리를 따라 벽 도랑이 설치되어 있으며, 중앙부에 1개 또는 2개 이상의 화덕 자리가 확인된다. 화덕 자리는 대부분 바닥식(床面式)이다. 18호는 바닥 면에서 다량의 숯이 확인되었는데, 기둥과 지붕재로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lt;br /&gt;
&lt;br /&gt;
출토 유물은 [[바리모양토기|바리 토기(鉢形土器)]], [[항아리모양토기|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 [[항아리모양토기|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 [[붉은간토기|붉은 간 토기]], [[간돌검|간 돌검]], [[통자루간돌검|통자루 간 돌검(一段柄式磨製石劍)]], [[슴베간돌살촉|슴베 간 돌살촉(有莖式磨製石鏃)]], [[기둥모양외날돌자귀|기둥 모양 외날 돌자귀(柱狀片刃石斧)]], [[반달돌칼|반달 돌칼]], [[숫돌|숫돌(砥石)]], [[가락바퀴|가락바퀴]] 등이며, 토기의 문양은 [[골아가리|골아가리(口脣刻目)]]이다.&lt;br /&gt;
&lt;br /&gt;
구덩이는 부산 방면 Ⅰ구역의 북서편에 집중되어 확인되는데, 집자리 주변 또는 빈 터에 3~6기가 무리(群集)져 있다. 원형, 타원형, 방형, 부정형(不定形)이며, 지름 1~2m로 내부 시설은 없다. 도랑은 집자리를 파괴하고 조성되었는데, ‘一’, ‘Y’자 모양 , 부정형 등 다양하다. 유물은 9호 도랑에서 붉은 간 토기, 반달 돌칼이 출토되었다.&lt;br /&gt;
&lt;br /&gt;
유적에서 집자리의 밀집된 양상을 통해 북안천 서안(西岸) 일대에 대규모의 청동기 시대 마을이 분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빗살무늬토기|빗살무늬 토기(櫛文土器)]]가 확인된 깐돌로 보아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lt;br /&gt;
&lt;br /&gt;
==이미지==&lt;br /&gt;
&amp;lt;gallery mode=packed heights=300px&amp;gt;&lt;br /&gt;
File:영천_반정리_유적_18호_집자리.jpg&lt;br /&gt;
File:영천_반정리_유적_유구_배치도.jpg&lt;br /&gt;
&amp;lt;/gallery&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 삼한문화재연구원. (2018). &amp;lt;i&amp;gt;삼한문화재연구원 발굴 10년 특별전 대구·경북 청동기시대 문화&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5415340&lt;br /&gt;
* 삼한문화재연구원. (2020). &amp;lt;i&amp;gt;고속국도 제1호선 언양-영천 확장 공사(제5·6공구) 내 영천 반정리 부흥·영천 고지리 팔암·경주 도계리 지석묘군Ⅱ 외 16개소 유적Ⅰ&amp;lt;/i&amp;gt;.  https://www.riss.kr/link?id=M16001960&lt;br /&gt;
&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사전]]&lt;br /&gt;
[[분류:한국고고학전문사전(청동기 시대 편)]]&lt;/div&gt;</summary>
		<author><name>Admi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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